2022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루가 13,22-30)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but will not be strong enough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종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하며, 주인도 종들을 그렇게 대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시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음악을 잘 듣지 않지만 그래도 음악을 듣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차 안입니다. 차 안 라디오를 이용해서 음악을 듣는데, 주로 클래식을 듣습니다. 조용한 클래식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운전하는 데 더 집중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차 시동을 켜자 클래식 음악이 아닌 최신 가요가 나오는 것입니다. 클래식 전문 방송이기에 당연히 클래식이 나와야 하는데, 최신 가요가 나오니 ‘방송국에서 음악을 잘못 틀었나?’ 싶었습니다.
확인해보니 방송국에서 잘못 틀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신부에게 차 운전대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때 방송 주파수를 바꾼 것 같습니다.
클래식 방송을 들으려면 클래식 방송이 나오는 곳으로 주파수를 맞춰야 합니다. 주파수도 맞추지 않으면서 클래식 방송이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주파수를 맞춰야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주파수를 맞추고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은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삶, 평화와 기쁨의 삶을 살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주님께 주파수를 맞춰서 매 순간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참 기쁨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주님께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좁은 문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입니다. 단순히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쉽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루카 13,25.27)라면서 내치실 것입니다.
유다인은 스스로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들 외에 구원받을 사람은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역전되어 구원받을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과 세속 중심이기에 사랑 중심인 주님의 뜻과 반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아 힘든 상황에 부닥쳐지게 됩니다. 그래도 이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 문 안에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정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7Z1u5aw0_E
-조재형신부-
매일 산보를 다니면서 가끔 제게 길을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계속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길을 걷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또 다른 길을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예수님께서는 묻는 사람의 의도를 넘어서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묻는 사람은 구원 받을 사람의 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현명한 답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쩌면 어떤 사람처럼 숫자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마치 행복도 숫자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집, 좋은 차, 비싼 보석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돈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숫자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셨고, 재물을 창고에 쌓으려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행복할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도 비즈니스 석을 탈 수 있습니다. 전망이 좋은 집을 살 수 있습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는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과 욕망의 탑입니다. 먼저 가고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따라오고 있는 사람은 내치려고 합니다.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존재인 사람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냉혹한 전쟁터에 내몰립니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분노와 원망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무엇이 좁은 문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현문우답이 아니라 현문현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프란치스코 성인은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줌으로 써 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좁은 문은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된 행복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면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몸집을 줄이십시오!
-양승국신부-
어르신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찌 저리 큰 질병과 노화, 임종의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그냥 데려가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작게 아주 작게 만드십니다. 알량한 자존심이며, 마지막 남아있는 수치심까지 다 제거하신 후, 마치 갓난아기처럼 만드신 후에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제 생각은 구원에 이르는 문이 좁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급적 작게 만드신 후 데려가시는가, 하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들이 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멸망에 이르는 죽음의 문들이 보이는 특징은 화려함이요, 휘황찬란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 그럴 듯 해 보이고, 있어 보입니다. 요란스럽고 재미있어 보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다 보면, 이미 깊은 수렁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 되돌아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늘 깨어 기도하면서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어떤 문이 우리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인가? 어떤 문이 우리를 심연을 알 수 없는 깊은 죽음의 수렁 속으로 빠트리는 문인가?
좁은 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사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넓은 문 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세상의 것들은 그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우리들의 시선을 끄는지 모릅니다.
‘좁은 문’, 참으로 큰 희생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인내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포기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문입니다. 큰 대가를 요구하는 문입니다.
그러나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상급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할 것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번번이 실패하곤 하지만, 기를 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던 어느 날,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 모두 가뿐히 좁은 문을 통과하리라 믿습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몸집을 줄이십시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던 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루카 13,2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 받을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대답하십니다.
그것이 더 본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첫 번째 충격은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이는 어찌 들으면 참으로 모진 말씀으로 들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보편성에 어긋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문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문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닌 '좁은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가 부르심은 받지만 모두가 응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당신은 '문'이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라 들어가는 이에게 열려 있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은 동서남북 온 세상에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루카 13,29)
두 번째 충격은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닫는 집주인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루카 13,25)
또한 이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문이 열려 있으니 당장 들어오라는 다급함을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곧 영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문’은 내일 들어가야 하는 문이 아니라 오늘 당장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곧 지금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 충격은 지금과 그때에는 ‘첫째와 꼴찌’가 바뀌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과 그분의 눈이 서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 출신이나 가문 혹은 세상의 출세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첫째와 꼴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이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30)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두를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급함과 절실한 요청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루카 13,24)
주님!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문이 좁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열린 문이신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아멘.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김찬선신부-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오늘 어떤 사람이 주님께 구원받을 사람에 대해서 묻습니다.
많은지, 적은지.
이에 주님께서는 좁은 문 얘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이 좁다는 말씀인데 왜 좁습니까?
주님께서 문을 좁게 만드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까?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
구원받는 것은 받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시고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시는 공평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우리 문제입니다.
줘도 받아들여야지 받는 것이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주셔도 받지 못하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데 왜 받지 않습니까?
그 이치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무엇이건 우리는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구원이라면 그 문이 좁지 않을 텐데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에 그 문이 좁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세상 살 때 주님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였다고 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이 세상 끝 날에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내치십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먹기도 마시기도 한 사람이 우리가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영락없이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매주 또는 매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의를 저지른다면 그것이 다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과 먹고 마신 것이 영적인 힘이 되고,
그 힘으로 주님께 들은 말씀 곧 사랑을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오히려 불의를 저질렀다면 아무리 천주교 신자라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을 끝으로 주님께서 하십니다.
첫째 곧 주님을 알고 지내던 사람이 꼴찌 되고,
꼴찌 곧 주님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 첫째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주님을 알고 지내도 소용없고
주님 말씀대로 사랑해야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은,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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