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2. 10. 24. 05:53

2022 10 24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루가 13,10-17)

 

“Woman, you are set free of your infirmity.”
He laid his hands on her,
and she at once stood up straight

and glorified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주님 안에 있는 빛이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를 고쳐 주시고, 이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망신을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호박벌’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개체를 가지고 있는 벌입니다. 몸이 털로 뒤덮여서 다른 벌들보다 인상이 동글동글해서 귀엽지요. 그런데 다른 벌과 비교해서 날개가 작고 몸집이 큽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많은 학자가 의문을 가졌습니다. 호박벌의 몸은 비행에 적합한 구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호박벌이 나는 것은 물리 법칙에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물리 법칙에 어긋나고, 날고 있는 것도 비효율적이지만 그래도 호박벌은 계속해서 날아다닙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호박벌에게 누군가가 물리 법칙에 어긋나게 날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인간과 같은 생각을 한다면 호박벌은 날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남의 말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 말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는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순간,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무시해야 할 것이 참 많습니다. 부정적인 말, 나의 발전을 반대하는 말들…. 모두 무시해야 할 말입니다.

무시할 것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따라야 할 것은 무조건 따르는 삶. 이것이 현명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그마치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 펼 수 없었던 여자를 만나십니다. 이런 병을 현대의학 용어로는 '척추 교착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고 하지요. 이 증세는 보통 40세 이후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60대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있어도 자비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포기상태였던 것이지요.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하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이 고쳐진다는 상징적인 표시로, 그래서 여자는 곧바로 하느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식일 법 위반이라며 회당장이 군중에게 말하지요.

십계명 3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거룩한 일입니다. 동물도 살리기 위해 안식일에는 물을 먹이는데, 하물며 사람을 살리는 일이 왜 안식일 법 위반이 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이루어질 때마다 심한 반대가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그 반대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죄인으로 만드는 말은 무시해야 할 말이었습니다. 또한 변화와 성장을 가로막는 말 역시 무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입니다. 그때 불가능해 보이는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윌리엄 서머셋 모옴).

 안식일에 일하는 남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qhKlmRejo0

 -조재형신부-

 

어릴 때 만화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주제가는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황금박쥐요괴인간타이거 마스크는 지금도 노래가 기억납니다신학생 때는 여름 신앙학교가 있었습니다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율동을 가르치는데 만화영화의 주제가를 아이들의 율동에 사용했습니다노래가 경쾌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가사를 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만화영화를 보지 않아서 내용은 잘 모르지만 멜로디와 가사가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이름은 캔디입니다오늘은 그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울면은 바보다 캔디

 

교포 사목하는 후배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치 캔디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월에 눈이 오면서 시작되는 겨울은 4월에 눈이 모두 녹으면서 끝이 난다고 합니다긴 겨울은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자동차도 사야하고아파트 랜트비도 내야 한다고 합니다대부분의 교포 사목은 본당에서 자동차를 제공하고사제관을 마련해 주는데 그곳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본인이 부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주방 일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것은 좋은데 본당 일을 도와 줄 사무장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합니다추운 겨울처럼 차갑게 식어있는 공동체를 뜨겁게 달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그러나 그럼에도 후배 신부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기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긴 겨울도재정적인 열악함도 신부님의 열정 앞에는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매주 목요일에 성경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1시간 30분을 강의한다고 합니다저도 강의를 해 보았지만 매 주 강의를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처음에는 강의를 듣는 분들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20명 이상이 강의를 듣는다고 합니다면담 요청이 오면 언제든지어디든지 달려가는 신부님의 모습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주변에 함께 할 수 있는 교구 사제들이 있습니다한국 마트는 물론 한국 식당도 얼마든지 있습니다주방을 도와주는 자매님도 있고저를 도와주는 직원도 있습니다차량도 회사에서 지원해 주고출장을 가면 항공권도 회사에서 지원해 줍니다문화생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뮤지컬도 보고영화도 보고미술관도 갈 수 있습니다겨울이 있지만 그리 길지도 않고매섭게 춥지도 않은 편입니다코로나도 끝이 보이니 이제 신문홍보를 다니면 재정적인 어려움도 해소 될 것입니다손님들도 자주 오니 타국에서의 외로움도 별로 없습니다어려울 때면 도움을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교우들 중에는 회계사변호사의사약사 분들이 있습니다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불평과 불만은 후배 신부님과 비교하면 사치였습니다저 역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은 임기를 기쁘게 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8년 동안 몸이 굽어서 허리를 펼 수 없었던 여인의 고통을 아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그 여인도 어쩌면 캔디와 같은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울지 않고웃으면서 고통을 이겨냈을 것 같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것 같습니다그 여인에게 육체의 고통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받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도 우리의 고통 속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양승국신부-

 

가끔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나이도 슬슬 생각해야 하는데, 급한 성격에 혼자 무거운 것을 들다가 뚝! 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아차! 조심했어야 했는데, 후회하지만 늦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단 할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허리를 굽힌 채로 겨우겨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가는데, 겨우 50미터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는데, 무려 15분이나 걸리더군요. 이제는 하도 당해봐서, 뭔가를 들 때면 허리를 똑바로 펴고 들던지, 미안하지만 형제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러 차례 그런 일을 겪다 보니 허리야말로 신체의 근본이며, 삶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시원찮으면 만사가 다 귀찮아집니다. 그저 가장 통증이 덜 느껴지는 자세로 며칠이고 끙끙 앓다 보면, 삶의 정말이지 피폐해지더군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은 장장 18년 세월 동안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심각한 허리 질환에 시달려왔습니다. 허리가 굽은 채로 살다 보니, 그의 시선은 언제나 땅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늘 한번 올려다보려면 용을 썼어야 했습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18년 세월 동안 말입니다. 병이 오래 가다 보니 사람들이 점점 떠나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녀를 죽은 사람 취급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수군거렸습니다.

  

이렇게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친히 당신 손을 그녀의 허리에 얹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복음 13장 12절)

  

여인은 이제 누구를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병고의 세월을 거두어가시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예수님만이 인생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이란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어떤 것,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만이 우리 삶의 중심이요 기초임을 기억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18년 세월 동안 병마에 시달려온 여인이 말끔히 치유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하느님은 아무리 오래되고 깊은 상처라 할지라도 깔끔하게 치유시켜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무리 망가지고 허물어진 우리라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원상 복귀, 혹은 완벽한 ‘리모델링’을 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고통 속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때로 우리가 겪게 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면서 치유의 길에 동반해주심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 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 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 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루카 13,16)

 

주님!

꺾인 제 영혼에 당신 손을 얹으소서.

악행을 멈추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소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소서.

아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넘습니다
 -반영억신부-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필요 없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일생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법이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 하려 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넘습니다.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을 우선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처럼 되는 것과 짐승처럼 되는 것 아이에서

-김찬선신부-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넘습니다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필요 없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일생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 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 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지켜야 할 법이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 하려 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넘습니다.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을 우선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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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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