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3일 연중 제30주일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복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선교
-키엣 대주교-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지친 몸과 쏟아지는 졸음, 실망 등 다시 그 바다에 나가는 것이 즐거울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다시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지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고단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센 파도와 씨름하며 밤새도록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던 그들처럼 선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는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내가 아는 모든 것과 나의 모든 힘을 다 바쳐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이 끝났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과 고단함을 받아들이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선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을 것입니다. 선교도 더욱 그렇습니다. 선교는 성공보다 실패가, 즐거움보다 괴롭고 힘든 일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힘겨운 인내가 필요합니다. 실패가 닥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절망과 피곤에 지칠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새겨보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4,2)
밤을 새우며 고생했지만 빈손으로 돌아 오는 실패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또 다시 선교를 떠난 그들은 참으로 인내심이 많은 분들입니다.
실패도 선교입니다. 선교의 길을 떠나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금 바로 대답하십시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굳건한 인내심은 우리가 역경과 실패를 무릅쓰고 선교의 벌판으로 나가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단련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의 인도로 나아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곁에 있으면 안될 죄 많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바오로 사도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처럼, 이사야가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느낀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약하고 죄 많은 신분이라는 자신을 깨닫고 성령의 부름을 따를 수 있도록 단련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계획하에 모든 단련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선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선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선교는 무엇보다 영적인 일입니다. 세상과 인간의 힘에 의지해 할 수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바다에서 살아 온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음에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선교는 어떠한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따라 ‘배의 오른 쪽에 그물을 내렸다’는 것은 그들이 겸손되이 주님 말씀에 귀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부도 아니고 바다도 알지 못하는 스승의 말씀이지만 그들은 절대 순종하였고 그 결과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선교는 나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주님을 위한 선교일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선교를 위해 어려움과 고단함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주님, 저희가 쉼 없는 선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실패를 극복하는 강인한 인내를 주소서.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알게 하여주소서.
주님, 저희가 선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도록 단련시켜주십시오. 아멘.
1. 선교란 성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해보십시오.
3. 그 동안 나의 선교는 어떠했습니까? 무엇이 부족하였습니까?
1. 선교는 주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마십시오. 실패도 선교입니다.
다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선교만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의 힘을 얻고 성령과 함께 선교의 길을 떠나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욕망이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행동이나 마음을 말합니다. ‘~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미국의 작가 나폴레온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욕망이 있다면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은 욕망과 함께 온다.”
제 형님이 은퇴 후에 요즘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그리고 그린 그림을 가족 SNS에 계속 올리십니다. 점점 더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그림을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형님이 그린 멋진 그림을 보며 “우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에게는 그림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어서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제 형은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그리고 싶다’라는 욕망을 가지면서, 여기에 본인의 능력도 추가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능력도 함께 오도록 합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최초로 등정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에베레스트산을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욕망이 계속 커졌던 것입니다. 이 욕망에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최초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마태 10,5; 루카 10,1 이하). 그러나 이때는 일종의 실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하셨고,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체험을 위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파견하셨습니다.
이번 파견은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결정적이고 본격적인 파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전교는 주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아 때로는 박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교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전교하고 싶다’라는 욕망 자체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따른 능력도 생길 것입니다.
늘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야 할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3-8VnifNUkE
얼마 전에 어떤 자매가 자신과 결혼하자는 어떤 형제와 결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니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라면 나의 딸은 절대 그런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우 이창훈 씨 딸 효주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TV에 출연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효주는 공부하면서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바라봐야 공부할 힘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바라보는 곳에는 5만 원권 지폐 모형이 달려있었습니다. 심지어 금주머니 열쇠고리, 골드바 자석, 금전운을 부른다는 돈나무 그림도 붙어있었습니다. 아이의 꿈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그래서 편안할까요? 아이는 불안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엄마와 분리되면 안 되는 불안증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착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착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이란 두 단어로 집결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가 불안하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자기 생존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불안하면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딸의 이 불안함은 이창훈 씨의 가족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창훈 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5남매 중 유일한 아들 막내로 태어났고 어머니가 계
셨지만 세상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는 이창훈 씨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으로 이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는 하교하다가 나쁜 일도 많이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호해주지 못한 것, 왜 자신을 낳았는지 부모에 대한 원망도 들었습니다.
그에게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돈과 인기였습니다.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일하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린 신부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수입도 줄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다 아내 탓이라고 하며 우울증에 걸리고 방황하였습니다. 임신한 아내는 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습니다. 매일 이혼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불안’이 해결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 자녀에게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선교하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하시며, 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십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사랑하고 선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는 먼저 죽음까지 이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 나를 보호해주시니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안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만약 쥐의 꼬리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쥐일 수도 있고 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불안해합니다. 확인한 뒤에 불안해 할 수 없습니다. 쥐면 안심하고 뱀이면 싸우든 도망치든 결정해야 합니다. 불안은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증을 없애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명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 차원에서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만이 진정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족도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정은표 씨 부부는 자녀들에게 불안함을 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 공부를 방해도 하지만 지웅이는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구글에서 창의력이 가장 높은 부서의 특징을 조사하였습니다. 결과는 소통이나 아이큐나 학벌 등에 있지 않았고 그 부서의 ‘심리적 안정감’ (Psychological safety)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하면 외우는 기계밖에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날입니다. 먼저 가족이 복음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민족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을까요? 나 먼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 성령을 받는 기도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부터 복음화되어야겠습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 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 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나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김찬선-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나눔을 위해 오늘 전례를 처음서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본기도의 첫 구절이 눈에 꽂히면서 뜬금없이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기도의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는가?
이 점이 반성이 되며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로 파견된 예언잔데
그곳으로 가기 싫어, 도망치다 죽다가 살아난 뒤에야
니네베로 가 억지로 회개를 선포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도 요나 예언자처럼 니네베의 구원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민족의 구원을 싫어하지 않아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닐까요?
싫어하는 사람은, 요나에게 니네베처럼, 다른 민족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고,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챙길 사랑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교 주일을 맞아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남북이 화해하고 북한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본과 중국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일까요?
솔직히 우리의 사랑이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니네베도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에 못 미칩니다.
사실 나는 나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같이 아파할 정도로 행복하지 못하며
다른 이의 구원을 걱정할 정도로 구원을 사는 사람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이 마음 아프지 않으면 아직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이 걱정되지 않으면 아직 하느님의 구원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면서도 참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적어도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넘쳐 남에게까지 흘러가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행하게도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하여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본기도의 내용처럼 수확할 밭의 일꾼, 곧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모든 이가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지만
그 전에 내가 선교사로 파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구원과 사랑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를 포함하여 선교사들이
세상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본기도를 이어서 바쳐야겠습니다.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시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사로 힘을 얻어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복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선교
-키엣 대주교-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지친 몸과 쏟아지는 졸음, 실망 등 다시 그 바다에 나가는 것이 즐거울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다시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지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고단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센 파도와 씨름하며 밤새도록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던 그들처럼 선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는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내가 아는 모든 것과 나의 모든 힘을 다 바쳐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이 끝났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과 고단함을 받아들이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선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을 것입니다. 선교도 더욱 그렇습니다. 선교는 성공보다 실패가, 즐거움보다 괴롭고 힘든 일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힘겨운 인내가 필요합니다. 실패가 닥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절망과 피곤에 지칠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새겨보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4,2)
밤을 새우며 고생했지만 빈손으로 돌아 오는 실패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또 다시 선교를 떠난 그들은 참으로 인내심이 많은 분들입니다.
실패도 선교입니다. 선교의 길을 떠나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금 바로 대답하십시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굳건한 인내심은 우리가 역경과 실패를 무릅쓰고 선교의 벌판으로 나가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단련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의 인도로 나아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곁에 있으면 안될 죄 많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바오로 사도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처럼, 이사야가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느낀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약하고 죄 많은 신분이라는 자신을 깨닫고 성령의 부름을 따를 수 있도록 단련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계획하에 모든 단련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선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선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선교는 무엇보다 영적인 일입니다. 세상과 인간의 힘에 의지해 할 수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바다에서 살아 온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음에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선교는 어떠한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따라 ‘배의 오른 쪽에 그물을 내렸다’는 것은 그들이 겸손되이 주님 말씀에 귀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부도 아니고 바다도 알지 못하는 스승의 말씀이지만 그들은 절대 순종하였고 그 결과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선교는 나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주님을 위한 선교일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선교를 위해 어려움과 고단함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주님, 저희가 쉼 없는 선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실패를 극복하는 강인한 인내를 주소서.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알게 하여주소서.
주님, 저희가 선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도록 단련시켜주십시오. 아멘.
1. 선교란 성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해보십시오.
3. 그 동안 나의 선교는 어떠했습니까? 무엇이 부족하였습니까?
1. 선교는 주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마십시오. 실패도 선교입니다.
다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선교만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의 힘을 얻고 성령과 함께 선교의 길을 떠나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욕망이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행동이나 마음을 말합니다. ‘~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미국의 작가 나폴레온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욕망이 있다면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은 욕망과 함께 온다.”
제 형님이 은퇴 후에 요즘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그리고 그린 그림을 가족 SNS에 계속 올리십니다. 점점 더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그림을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형님이 그린 멋진 그림을 보며 “우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에게는 그림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어서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제 형은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그리고 싶다’라는 욕망을 가지면서, 여기에 본인의 능력도 추가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능력도 함께 오도록 합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최초로 등정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에베레스트산을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욕망이 계속 커졌던 것입니다. 이 욕망에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최초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마태 10,5; 루카 10,1 이하). 그러나 이때는 일종의 실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하셨고,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체험을 위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파견하셨습니다.
이번 파견은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결정적이고 본격적인 파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전교는 주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아 때로는 박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교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전교하고 싶다’라는 욕망 자체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따른 능력도 생길 것입니다.
늘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야 할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3-8VnifNUkE
얼마 전에 어떤 자매가 자신과 결혼하자는 어떤 형제와 결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니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라면 나의 딸은 절대 그런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우 이창훈 씨 딸 효주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TV에 출연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효주는 공부하면서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바라봐야 공부할 힘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바라보는 곳에는 5만 원권 지폐 모형이 달려있었습니다. 심지어 금주머니 열쇠고리, 골드바 자석, 금전운을 부른다는 돈나무 그림도 붙어있었습니다. 아이의 꿈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그래서 편안할까요? 아이는 불안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엄마와 분리되면 안 되는 불안증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착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착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이란 두 단어로 집결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가 불안하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자기 생존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불안하면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딸의 이 불안함은 이창훈 씨의 가족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창훈 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5남매 중 유일한 아들 막내로 태어났고 어머니가 계
셨지만 세상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는 이창훈 씨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으로 이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는 하교하다가 나쁜 일도 많이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호해주지 못한 것, 왜 자신을 낳았는지 부모에 대한 원망도 들었습니다.
그에게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돈과 인기였습니다.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일하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린 신부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수입도 줄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다 아내 탓이라고 하며 우울증에 걸리고 방황하였습니다. 임신한 아내는 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습니다. 매일 이혼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불안’이 해결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 자녀에게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선교하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하시며, 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십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사랑하고 선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는 먼저 죽음까지 이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 나를 보호해주시니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안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만약 쥐의 꼬리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쥐일 수도 있고 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불안해합니다. 확인한 뒤에 불안해 할 수 없습니다. 쥐면 안심하고 뱀이면 싸우든 도망치든 결정해야 합니다. 불안은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증을 없애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명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 차원에서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만이 진정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족도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정은표 씨 부부는 자녀들에게 불안함을 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 공부를 방해도 하지만 지웅이는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구글에서 창의력이 가장 높은 부서의 특징을 조사하였습니다. 결과는 소통이나 아이큐나 학벌 등에 있지 않았고 그 부서의 ‘심리적 안정감’ (Psychological safety)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하면 외우는 기계밖에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날입니다. 먼저 가족이 복음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민족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을까요? 나 먼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 성령을 받는 기도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부터 복음화되어야겠습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 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 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나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김찬선-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나눔을 위해 오늘 전례를 처음서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본기도의 첫 구절이 눈에 꽂히면서 뜬금없이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기도의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는가?
이 점이 반성이 되며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로 파견된 예언잔데
그곳으로 가기 싫어, 도망치다 죽다가 살아난 뒤에야
니네베로 가 억지로 회개를 선포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도 요나 예언자처럼 니네베의 구원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민족의 구원을 싫어하지 않아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닐까요?
싫어하는 사람은, 요나에게 니네베처럼, 다른 민족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고,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챙길 사랑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교 주일을 맞아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남북이 화해하고 북한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본과 중국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일까요?
솔직히 우리의 사랑이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니네베도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에 못 미칩니다.
사실 나는 나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같이 아파할 정도로 행복하지 못하며
다른 이의 구원을 걱정할 정도로 구원을 사는 사람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이 마음 아프지 않으면 아직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이 걱정되지 않으면 아직 하느님의 구원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면서도 참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적어도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넘쳐 남에게까지 흘러가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행하게도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하여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본기도의 내용처럼 수확할 밭의 일꾼, 곧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모든 이가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지만
그 전에 내가 선교사로 파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구원과 사랑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를 포함하여 선교사들이
세상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본기도를 이어서 바쳐야겠습니다.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시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사로 힘을 얻어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드는 환시를 본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복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선교
-키엣 대주교-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뭍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지친 몸과 쏟아지는 졸음, 실망 등 다시 그 바다에 나가는 것이 즐거울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다시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지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고단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센 파도와 씨름하며 밤새도록 그물을 드리우고 있었던 그들처럼 선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선교는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내가 아는 모든 것과 나의 모든 힘을 다 바쳐 쉬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시간이 끝났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어려움과 고단함을 받아들이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선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을 것입니다. 선교도 더욱 그렇습니다. 선교는 성공보다 실패가, 즐거움보다 괴롭고 힘든 일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힘겨운 인내가 필요합니다. 실패가 닥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절망과 피곤에 지칠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을 새겨보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2티모4,2)
밤을 새우며 고생했지만 빈손으로 돌아 오는 실패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또 다시 선교를 떠난 그들은 참으로 인내심이 많은 분들입니다.
실패도 선교입니다. 선교의 길을 떠나라고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금 바로 대답하십시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굳건한 인내심은 우리가 역경과 실패를 무릅쓰고 선교의 벌판으로 나가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단련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의 인도로 나아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 곁에 있으면 안될 죄 많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바오로 사도가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처럼, 이사야가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느낀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약하고 죄 많은 신분이라는 자신을 깨닫고 성령의 부름을 따를 수 있도록 단련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계획하에 모든 단련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선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선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선교는 무엇보다 영적인 일입니다. 세상과 인간의 힘에 의지해 할 수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바다에서 살아 온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음에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선교는 어떠한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따라 ‘배의 오른 쪽에 그물을 내렸다’는 것은 그들이 겸손되이 주님 말씀에 귀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부도 아니고 바다도 알지 못하는 스승의 말씀이지만 그들은 절대 순종하였고 그 결과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선교는 나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주님을 위한 선교일 때 비로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선교를 위해 어려움과 고단함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주님, 저희가 쉼 없는 선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실패를 극복하는 강인한 인내를 주소서.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알게 하여주소서.
주님, 저희가 선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도록 단련시켜주십시오. 아멘.
1. 선교란 성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해보십시오.
3. 그 동안 나의 선교는 어떠했습니까? 무엇이 부족하였습니까?
1. 선교는 주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마십시오. 실패도 선교입니다.
다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선교만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의 힘을 얻고 성령과 함께 선교의 길을 떠나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욕망이란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행동이나 마음을 말합니다. ‘~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미국의 작가 나폴레온 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욕망이 있다면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능력은 욕망과 함께 온다.”
제 형님이 은퇴 후에 요즘 그림을 계속 그립니다. 그리고 그린 그림을 가족 SNS에 계속 올리십니다. 점점 더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그림을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형님이 그린 멋진 그림을 보며 “우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에게는 그림에 관한 관심 자체가 없어서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제 형은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그리고 싶다’라는 욕망을 가지면서, 여기에 본인의 능력도 추가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욕망은 능력도 함께 오도록 합니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최초로 등정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에베레스트산을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욕망이 계속 커졌던 것입니다. 이 욕망에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최초로 정상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인의 능력이 더해져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일이 있었습니다(마태 10,5; 루카 10,1 이하). 그러나 이때는 일종의 실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길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하셨고,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체험을 위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신 뒤에 파견하셨습니다.
이번 파견은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결정적이고 본격적인 파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전교는 주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반대를 받아 때로는 박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교할 수 없는 이유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전교하고 싶다’라는 욕망 자체를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따른 능력도 생길 것입니다.
늘 마음이 불안한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 믿어야 할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3-8VnifNUkE
얼마 전에 어떤 자매가 자신과 결혼하자는 어떤 형제와 결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야 하니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라면 나의 딸은 절대 그런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우 이창훈 씨 딸 효주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TV에 출연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효주는 공부하면서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였습니다. 그렇게 바라봐야 공부할 힘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 바라보는 곳에는 5만 원권 지폐 모형이 달려있었습니다. 심지어 금주머니 열쇠고리, 골드바 자석, 금전운을 부른다는 돈나무 그림도 붙어있었습니다. 아이의 꿈은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은 그래서 편안할까요? 아이는 불안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쓰레기를 버리러 밖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엄마와 분리되면 안 되는 불안증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착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착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욕구는 다 ‘생존’이란 두 단어로 집결됩니다. 다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가 불안하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 생존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자기 생존을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불안하면 그 대상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게 됩니다. 딸의 이 불안함은 이창훈 씨의 가족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창훈 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5남매 중 유일한 아들 막내로 태어났고 어머니가 계
셨지만 세상에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어머니는 이창훈 씨를 보호하기 위해 학교 앞으로 이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보호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함께 있어 주지 않을 때는 하교하다가 나쁜 일도 많이 당하곤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호해주지 못한 것, 왜 자신을 낳았는지 부모에 대한 원망도 들었습니다.
그에게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돈과 인기였습니다.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일하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어린 신부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수입도 줄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다 아내 탓이라고 하며 우울증에 걸리고 방황하였습니다. 임신한 아내는 이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했습니다. 매일 이혼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사랑하려면 먼저 ‘불안’이 해결된 상태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 자녀에게 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선교하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하시며, 또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십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사랑하고 선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는 먼저 죽음까지 이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 나를 보호해주시니 불안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불안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만약 쥐의 꼬리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쥐일 수도 있고 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불안해합니다. 확인한 뒤에 불안해 할 수 없습니다. 쥐면 안심하고 뱀이면 싸우든 도망치든 결정해야 합니다. 불안은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의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증을 없애기 위해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명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 차원에서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만이 진정 불안에서 우리를 해방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 정은표 씨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족도 재정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정은표 씨 부부는 자녀들에게 불안함을 품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아이 공부를 방해도 하지만 지웅이는 서울대에 당당히 합격하였습니다.
구글에서 창의력이 가장 높은 부서의 특징을 조사하였습니다. 결과는 소통이나 아이큐나 학벌 등에 있지 않았고 그 부서의 ‘심리적 안정감’ (Psychological safety)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하면 외우는 기계밖에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날입니다. 먼저 가족이 복음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민족들을 복음화시킬 수 있을까요? 나 먼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확실하게 믿기 위해 성령을 받는 기도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부터 복음화되어야겠습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 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 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나의 복음화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김찬선-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나눔을 위해 오늘 전례를 처음서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본기도의 첫 구절이 눈에 꽂히면서 뜬금없이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습니다.
오늘 본기도의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하느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되기를 바라시니”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하느님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바라는가?
이 점이 반성이 되며 요나 예언자가 떠올랐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로 파견된 예언잔데
그곳으로 가기 싫어, 도망치다 죽다가 살아난 뒤에야
니네베로 가 억지로 회개를 선포한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도 요나 예언자처럼 니네베의 구원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다른 민족의 구원을 싫어하지 않아도 무관심한 사람은 아닐까요?
싫어하는 사람은, 요나에게 니네베처럼, 다른 민족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이고,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챙길 사랑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교 주일을 맞아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남북이 화해하고 북한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일본과 중국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일까요?
솔직히 우리의 사랑이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니네베도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사랑에 못 미칩니다.
사실 나는 나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고통을 같이 아파할 정도로 행복하지 못하며
다른 이의 구원을 걱정할 정도로 구원을 사는 사람이 못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이 마음 아프지 않으면 아직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구원이 걱정되지 않으면 아직 하느님의 구원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면서도 참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적어도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넘쳐 남에게까지 흘러가지 못하는 사람이고,
불행하게도 사랑 대신 미움이 가득하여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본기도의 내용처럼 수확할 밭의 일꾼, 곧
선교사들을 보내시어 모든 이가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주십사고 기도해야겠지만
그 전에 내가 선교사로 파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구원과 사랑을 살아가게 해달라고,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나를 포함하여 선교사들이
세상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본기도를 이어서 바쳐야겠습니다.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시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성사로 힘을 얻어
구원과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0월 24일 연중 제30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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