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가12,54-59)
You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why do you not know how to interpret the present time?
David Roverts, 예루살렘의 멸망.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풀이할 줄 모르냐고 하시며,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숫대야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을까요? 당연히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세숫대야가 흔들려서 물이 계속 출렁거릴 때는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잘 보려면 물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해서 물의 흔들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부정적 생각이 자기를 더 힘들게 하는데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이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내 마음에 나를 똑바로 볼 수 없으니 자기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니 제대로 살기 힘들게 됩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다. 침묵 속에서 잔잔한 내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위해, 이 세상을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를 알아봐야 하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 나라를 꼭꼭 숨겨 놓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위선적인 마음으로 징조를 보려고 하지 않고, 또 징조가 보여도 무시하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기예보를 과학화하여 기압의 수치로 나타내지만, 하늘을 보고 또 바람의 방향을 보고서 날씨를 알아맞히는 것은 옛날부터 계속되고 있습니다. 농사일을 위해, 전쟁의 작전을 짜기 위해서도, 그리고 바다로 항해하기 위해서도 날씨 아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을 보고, 바람을 보면서 날씨를 어느 정도 정확하게 맞췄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징조는 어떠할까요?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행적과 메시지만 봐도 메시아가 여기에 있고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보고도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계속해서 세상 것과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몸을 흔들다 보니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닥칠 멸망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세상보다 주님 안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잔잔한 내 마음을 만들 수 있으며, 그 마음을 통해 하늘의 징조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왔습니다.
심판을 피하려면: 내가 합의해야 할 대상과 합의금이 무엇인지 알아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5CcmYnJQdj4
연예인 박수홍 씨의 친형이 구속되었습니다. 박수홍 씨는 근 10년간 100억 이상을 횡령한 혐의가 있는 형을 고소하였습니다. 그 이전 20년 것도 있지만 그것은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박수홍 씨는 목숨을 끊을 생각도 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형제, 모두에게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대로라면 박수홍 씨는 친형제나 자녀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용당하였습니다.
박수홍 씨는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형과 7대 3으로 재산을 나누자고 제안하였다고 합니다. 형의 재산은 100억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생이 번 돈 중에서 상당 액수를 가질 수 있었지만 형은 그 합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수홍 씨는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그렇게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 12,57-58)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가서 그 값을 다 갚아야 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때에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그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마지막 심판 때 나를 고소하는 자일까요? 당연히 내가 피해를 준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해를 준 대상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됐다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저도 운전병으로 군대에 있을 때 사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군용 트럭으로 프라이드 승용차 한 대를 폐차시켰습니다. 다행히 그 차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300만 원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저는 군 재판에 넘겨지어 그에 해당하는 만큼 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그 돈을 여기저기 꾸어 마련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지어 피해를 주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자녀가 누구에게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큰 대상은 부모입니다. 그 사랑에 반하여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녀에게 그 죗값을 보상하도록 오히려 합의금을 내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죄를 짓는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그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양심’입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우리를 고소합니다. 양심의 고소를 당하는 이는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고 미워합니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심은 결국 하느님께서 당신이 만들어주신 우리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하느님의 법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멈추려면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해 주신 것처럼 하느님 자신이 합의금을 내어주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가죽옷’이 그 합의금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해 주셨습니다. 그 합의금을 받는 순간이 특별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입니다. 고해성사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으로 나의 고소자인 양심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치 제가 군제대를 하고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께서 주시는 합의금을 원치 않고 내 힘만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은 부모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도 부모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을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 때를 대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고해성사를 해도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가시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완전한 합의금을 주셨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가라앉으면 미움도 가라앉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을 심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비가 심판을 이깁니다. 내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만나느냐, 따듯한 부모로 만나느냐는 내 안의 양심의 가책을 당신 피로 잠재워 이웃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뿐입니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jaInaK6US8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이 시대의' 징표를 풀이하고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사실 군중들은 자연의 징표나 자신 몸의 징표는 잘 읽고 대처하면서 ‘시대의 징표’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면서 책임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하고, 그들의 회피와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복음으로 읽어내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읽으면서 그러한 눈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언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루카 12,58)
바르게 행동하라는 엄한 경고입니다.
'징조'를 잘 읽고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재판에 붙여지기 전에 화해라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역사의 징조를 읽으셨고, '때가 차자'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시어 빛을 비추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해석하고 응답해 왔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교종들의 <사회회칙>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응하여 레오 13세 교종께서 1891년에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을 발표하셨고, 이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촉구하는 비오 11세께서는 1931년에 회칙 <40주년>을 발표하셨습니다.
또 요한 23세 교종께서는 <지상의 평화>(1961)에서 냉전시대의 인권을, 바오로 6세께서는 <민족들의 발전>(1967)에서 식민화와 빈부격차와 문화 충돌을 대처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노동하는 인간>(1981)과 <백주년>(1991)에서 '새로운 사태'의 90주년과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사회문제를 재해석하셨고,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진리안의 사랑>(2009)에서 자본주의 확산과 세계화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환경을 주제로 한 첫 번째의 회칙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통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모든 공동체가 시대의 징표를 주의 깊게 살피도록 권고”(51항)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우상화된 신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물질만능의 물신주의의 병폐와 무관심의 세계화 등을 지적하시면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는 교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한 교회, 곧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공빈(共貧)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이 시대가 징표'를 읽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에 응답하며,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 할 줄 알면서, ~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루카 12,56)
주님!
거짓과 어둠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게 하시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는 이 시대에 가난을 함께 살게 하소서.
말과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영적인 사정에 민감하라
-반영억신부-
어르신들은 지혜가 많으신 분입니다. 많이 배우지 못해 지식은 풍부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분도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는 늘 차고 넘칩니다. 제비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상했고, 개미의 움직임을 보면서 장마에 대비했습니다. 서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을 보며 비를 예상하고 남풍이 불면 더위를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들은 자연의 징조를 읽어냈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밝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무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관심 부족이 아니라 외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었기 때문에 시대의 뜻을 올바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시대의 징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체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시대의 뜻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낼 때 하느님의 뜻을 만나게 됩니다.
새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촛불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할 일을 오늘 복음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재판관에게 가기에 앞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루카12,58).는 것입니다. 화해가 쉽지는 않지만, 재판정에 서서 판결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5,24) 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에페4,26). 하고 권고합니다. 더더욱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면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이든 ‘나는 아니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말씀이나 강론을 들으면 “저 얘기는 아무개를 두고 하는 얘기야!”, “그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하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은 “모두가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이야!” 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 시대는 하느님을 잊어가는 시대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정신이 아주 사소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우리를 정복하려고 들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 영적인 사정에 둔감해지는 시대입니다”(함께야).
이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려면 세상의 지혜를 찾지 말고, 주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심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회개할 기회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빕니다. 단풍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곧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겨울을 맞이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의 절정에는 내려놓아야 할 과정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평화의 끈
-김찬선신부-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공동체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애초부터 쉽지 않고
그래서 애써야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애쓰라 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리 애쓰지 않고 일치를 이루려고 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 애쓰다가 일치점을 찾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기에
바오로 사도는 조금 더 아니, 많이 애쓰라고 말하는 것으로 오늘 제게는 들립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표현들만 봐도
일치는 많이 애써야 이루어지는 것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겸손, 온유, 인내심, 사랑을 가지고 참으라고 합니다.
서로 참아 주라고 하는 것부터가 서로 불편하고, 서로 불쾌하고,
그래서 서로 힘들게 하며,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님을 전제합니다.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형이고,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면,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그래서 참아야 할 것이 애초에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예외 없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고,
그래서 힘들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고 서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갈리는 것입니다.
바뀌라고 요구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과 사랑을 지닌 사람은 참을 것이고,
그것이 없는 사람 곧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내 마음에 들게 바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은,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참기 위해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이 바탕이 된 사랑을 지니려 애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른 곳, 곧 코린토 전서의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고,
온유하고 겸손하며(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지요.
이런 것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실은 사랑이 아니라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며,
이것을 우리는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든 것이 내 맘에 들도록
다 좋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이런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려 애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시는 일치를 얘기합니다.
평화의 끈?
끈은 하나로 묶어주지요.
그런데 불화는 묶어주지 않고 갈라서게 하니 아예 일치의 끈이 될 수 없고,
당연히 평화라야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의 끈이 되는데 제가 보기에
이 평화도 성령의 평화여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성령은 내 맘에 들기를 애초부터 바라지 않고,
사랑의 성령은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기에
우리는 사랑의 성령으로 평화롭게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바자회와 관련해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자회를 8시에 끝마치는 것으로 공지되었는데
이웃의 불평도 있었고,
봉사자들도 그때까지 봉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이 파악되었습니다.
그래서 6시에 바자회는 접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무리를 위해 봉사해주실 형제님 계시면 많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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