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 39-48)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현재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간디에게 다가가, “제가 집으로 가져갈 수 있게 심오한 생각이 담긴 메시지 좀 써주실 수 있으신가요?”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종이 위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삶이 내 메시지다.”(My life is my message.)
맞습니다. 내 삶이 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까? 그리고 보내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삶 전체를 사랑으로 채우시며 하느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모범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 모범을 따르는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외면하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 삶을 통해 세상에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되어야 한다는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주님이 와서 셈 받을 때를 대비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언제나 충실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라는 잘못된 판단에서 불충실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당장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죄로 기울어진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더 잘 보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현실에서 주님을 직접 볼 수도 없고 또 그 목소리도 직접 들을 수 없다면서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때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 시간이 남아돌 때 실천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명예만 생각하고 자기 직분을 남용하는 것, 잘못된 판단 아래 자기의 고집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 주님께서 가장 강조했던 사랑보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런 모습이 올바르고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이런 모습이 바로 불충실한 종이라고 주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충실한 종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를 많이 맞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나의 메시지를 만들어야 할까요?
참 행복의 비밀: '이 밥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I83rCuGWRcY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dJ2nncisDE
-조재형신부-
문명(文明)과 문화(文化)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것이 있는 단어입니다. 문명은 밝게 비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지의 세상에 있는 이들에게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는 진리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진리의 빛을 동쪽으로 전하였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에 불교는 전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진리이 빛을 서쪽으로 전하였습니다. 로마,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지금은 불교도 서쪽으로 전해지고 있고, 그리스도교도 동쪽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문명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유럽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FAX AMERICA’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문명은 그리스, 로마의 의회 정치가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전해졌습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치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화는 창조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과학은 이런 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현대사회가 누리는 풍요로움은 이런 과학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물, 석탄, 원자력은 변화를 통하여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됩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도 변화를 통하여 우리가 활동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유전공학, 생명공학, 의학은 변화를 추구하며 우리의 생명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창조적인 변화는 문학, 미술, 음악, 건축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고전은 인류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한편의 글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합니다. 고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시작된 미술은 인간의 꿈과 희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인 소리는 음악이 되어 인류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건축은 인간이 머무는 공간에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전이 되었고, 문화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명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에게는 용기의 빛이 되셨습니다. 병들고 아픈 이들에게는 치유의 빛이 되셨습니다. 이방인과 죄인들에게는 희망의 빛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입니다. 갈릴래아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하신 것 또한 문명의 시작입니다. 어둠에 빛을, 슬픔에 기쁨을, 절망에 희망을, 미움은 용서로, 다툼은 화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화의 모습도 보여 주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깨끗하게 치유하셨습니다. 죽었던 소녀와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자캐오는 변화되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와 가족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끝난 다음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신비인 성체성사입니다.
문명과 문화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지역과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한다면 그것은 제국주의가 되고 맙니다. 식민지의 역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문명과 문화는 철저하게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문을 열지 않으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명과 문화를 전하는 방법을 우리게 알려 주셨습니다. ‘섬김과 비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전하려는 사람은 불의한 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신의 뜻만을 전하려는 사람은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명과 문화가 상대방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문명과 문화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하여 깨달은 것을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양승국신부-
어떤 사람이 한창 건축 중인 공사장을 지나다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3명의 인부를 보았습니다.
그는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당을 받으니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벽돌을 쌓는 중이요.”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인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런데 때로 주인의식이 지나치게 되면 주인행세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인의식과 주인행세 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겸손의 덕의 유무입니다. 주인의식은 주인으로서의 당당함과 함께 주인으로서의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합니다. 주인행세에는 당당함과 요구만 있지 겸손이나 배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기롭지 못한 불의한 집사가 지녔던 태도는 100% 주인행세였습니다. 그는 분명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낱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일정 부분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겸손과 배려의 덕이 전혀 없었던 불의한 집사는 갑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쥐꼬리만한 권한, 별것도 아닌 작은 완장에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갑자기 어깨가 우쭐해지면서 주인행세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잠시 맡긴 재산을 마치 자신의 것 인양 흥청망청 썼습니다. 하인과 하녀들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매일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주인행세의 표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던지는 경고의 말씀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복음 12장 46절)
사실 우리 인간 존재는 본질상 그 어떤 것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가 그 사람의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과 몇 년 만에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물려주고 쓸쓸히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막대한 돈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그 돈의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우리 모두 나이를 먹습니다. 80, 90, 100...
그때가 되면 천만 원짜리 수표를 손에 쥐어 줘도 이게 돈인지 종이인지도 구별못하게 됩니다. 애써 모은 돈들은 모두 자동으로 누군가의 소유로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영원한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변치 않는 든든한 주인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리시는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의지와 노예 근성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집주인과 도둑의 관계를 비유로 들며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하고 여쭙니다.
이 대화를 보면서 저는 자기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왜 다른 사람을 들먹이는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주님이 오실 것을 대비해야 하는 것에서
자기는 빠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을 이어지는 주님의 비유와 연결하여 보면 제자들은 주님의 집사들인데,
그리고 집사들은 주님이 오실 때를 대비해 맡겨진 역할이랄까 책임을
충실히 하며 기다려야 하는데 그 책임과 역할을 맡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집사의 책임을 맡기시려고 하고,
제자들은 충실함이 요구되는 그 책임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제자들이 집사는 되지 않고
종으로만 있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도 집사는 되지 않고
종으로만 있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요즘 우리 교회에 갈수록 집사들이 없습니다.
갈수록 일과 책임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자기 일을 하지 주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느 종들처럼 집사들이 나눠주는 것을 받아먹기는 해도
나눠주는 역할과 책임은 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그래서 맡은 사람이 또 책임을 과중하게 맡는 일이 생깁니다.
어제 루카 축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며 크게 걱정하시는데
주님으로부터 이런 걱정을 듣는 우리가 아닐지 돌아보는,
또 우리말에 노예 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집사 의지는 없고 노예 근성만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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