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7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역이었던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10년 무렵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주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루가 12,13-21)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연애 6개월 차인 여대생에게 남자 친구 사진과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 사진을 보게 한 후 뇌의 활동성을 비교했습니다. 그 결과, 두 경우 모두 뇌의 다양한 영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는 주의를 집중하고 높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에는 결혼한 지 15년이 된 부인에게 남편의 사진을 보여준 후 뇌의 활성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앞의 연구와는 달리 뇌의 활성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뇌의 반응은 우리가 의자나 책상과 같은 사물을 인식할 때와 유사했습니다.
익숙해지다 보니 아무런 감응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생겼을 때, 다시 뇌의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즉, 인간이 인간답게 살 때는 익숙하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서로 인간답게 살 수 없게 됩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과연 어떨까요? 혹시 너무 익숙해져서 의자나 책상 같은 사물을 인식할 때의 뇌의 반응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반응에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크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달라는 어떤 사람의 말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우선 부자는 죄인일까요?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경고하는 부자는 탐욕스러운 부자, 돈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인생관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부자 자체를 죄인이라고 했던 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보다 더 귀중한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모은 재산이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데도 자기 재산에 모든 것을 맡긴다면 너무나도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하시지요. 여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을 낭비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보통 기존의 곳간이 부족하면, 그 옆에 부족한 만큼 더 지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곳간을 헐고 크게 새로 지을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곳간이 아니라, 남는 곡식과 재물을 이웃에게 나눌 생각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특별한 감응을 얻게 됩니다. 삶 안에서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bcUm7-WQY4
-조재형신부-
1982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장 즐겨 입는 옷의 색깔은 ‘검정색’이 되었습니다. 양복도 검정색, 넥타이도 검정색, 그리고 수단과 성직자 복장인 클러지 셔츠도 검정색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른 색을 특별히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검정색 옷을 40년 입고 다니니 이것이 편하게 된 것입니다. 사제복을 입으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감독관이 신자였습니다. 제게 강복을 청했고,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웃으면서 대하니 긴장도 풀리고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식사 할 때도 사제복을 입은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식사비용을 대신 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민국에 가서 서류를 낼 때도 사제복을 입고 가면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검정색이 저에게 필요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검정색이기 때문에,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류시화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을 좇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을 갈구한다는 것은 지금 내면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행복을 발견하지 않는 한 외부에서 얻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공허감만 더할 뿐입니다. 술을 마셔서 행복할 것 같지만 깨고 나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떤 충동에 이끌린다면 자기 안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갈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그것에 사랑을 기울일 것입니다. 물을 찾는다면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마른 입술은 물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끝내 물을 얻지 못하면 영혼의 탈수증으로 고통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 됨이 없는 한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마녀는 인어 공주에게 없는 두 다리를 줄 테니 아름다운 목소리를 달라고 유혹합니다. 목소리를 내준 인어공주는 남들처럼 걸을 수 있게 되어 사회적 위치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녀의 정체성이었던 아름다운 목소리는 잃어버립니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사디 쉬라지는 한 아랍 상인의 일화를 전합니다. 그 상인이 한번은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먹을 음식이 한 조각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절망 속에서 낙타 등에 실린 짐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마침내 곡식 낟알로 느껴지는 것이 가득 든 자루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의 기쁨과 환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망과 절망 또한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루를 열자, 그 안에는 값비싼 보석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지금 타는 목마름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는 금은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갈증을 덜어주는 한 모금의 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채워지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자가 창고를 새로 지어서 곡식과 재물을 채우려 하지만 그것은 부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지녀야 할 자존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 믿음을 선행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한 줌 재더군요. 결국 한 줌 흙이더군요!
-양승국신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자주 목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외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 지상적인 것들에만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들,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초라할 대상들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 영적 생활, 조만간 맞이하게 될 사후의 삶에 대해서는 단1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 좋은 역세권 아파트나 조건 좋은 매물에는 그리도 관심 있어 하면서 필연적으로 맞닥트려야 할 마지막 날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의 위력, 정말 대단합니다.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합니다.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딱 한 가지 생각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단단히 한 몫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급속도로 재산을 증식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에게 한 차원 높은 단어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봉사, 희생, 나눔, 가족애, 우정... 그까짓 것들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단연 첫째가는 화두는 자녀교육입니다. 많은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자신의 미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그렇게 투자한 자녀들이 자신의 미래를 확실하게 책임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자녀가 내 노후의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이나 외모도 빠지지 않는 화제 거리입니다만 장례식에 자주 가면서 늘 보게 됩니다. 결국 한 줌 재더군요. 결국 한 줌 흙이더군요.
어떻게 해서든 보다 덕스럽고, 보다 영예롭고,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의미 있는 것에 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다름 아닌 영혼에 대한 투자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지상 생활을 마무리 짓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우리가 그토록 물불 안 가리고 투자했던 육신은 다 두고 건너가야 합니다.
결국 언젠가 마지막 순간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간 노력해왔던 영적 생활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봉사요, 희생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루카 12,1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12,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러합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중재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의 옳음을 밝혀 주며, 자신을 지지해주고 상대의 부당함이 들추어지기를 도모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거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기고 의탁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도와달라고 간청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청할 일입니다.
사실 이 아우는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판과 중재를 요청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요,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합니다.
만약에 탐욕이 아닌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걸려 있고,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그렇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에게 걸려 있듯, 사람의 생명 또한 자신에게 걸려 있지 않고 주인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도 아닐 뿐더러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할 일입니다.
진정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주인으로 중히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탐욕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탐욕을 채우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소유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무엇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더블류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루카 12,15)
주님!
모든 탐욕을 경계하게 하소서.
물질이나 재물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게 하소서.
명예와 권력, 학문과 재능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탐욕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간직하게 하시고, 제 생명이 당신께 달려 있게 하소서.
주님,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한상우신부-
삶의 참모습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모두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가야할 길을
아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아름답게
떠나는 법을
배우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나
생각들이
바뀌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육신이 마음을
죽이는 삶에서
물질이 정신을
조종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금 무엇을
내려놓으며
살고 있는 지를
반성합니다.
목숨의 주인이
우리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남들 위에
조금 더
올라서려는
이 서글픈 현실을
바라보시는
주님이십니다.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스스로
자기 착각에
갇혀 살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소유하는
재물이 우리의
인격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재물과 지위
명예까지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이 모든 것에
묶여있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빈 손
빈 마음으로
떠나는
생명의
순례자들임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김찬선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과 에페소 신자들이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 시비를 건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존재가 어디 있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작품이 아닌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모든 존재가 다 하느님의 작품이지만,
다만 걸작인지 졸작인지 그것만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하느님 작품이 졸작일 리 없으니
졸작이 있다면 그것은 원래 걸작이 졸작이 된 것,
곧 우리의 죄로 망가진 작품일 것입니다.
그리고 앞선 바오로 사도의 말에 의하면
죄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거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앞에서 육의 욕망에 이끌려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받았다는 뜻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걸작이란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은 존재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존재이고,
졸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받는 것이고,
선물을 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받는 것이며,
구원을 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사랑이 어디 있고 공짜가 어디 있냐고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은총을 거부하면 구원은 받지 못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 은총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 은총으로 구원받은 걸작들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이제 하느님의 선업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거부한 졸작들은 선행을 할 사랑이 하나도 없어
아무런 선행을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인 걸작들은 충만해진 사랑으로
하느님의 선업을 이어가고 무상으로 선행을 거저 행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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