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아빌라의 데레사’로 널리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그는 평생을 완덕의 길에 정진하며 살았다. 그는 수도회의 발전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으나 주님께 매달리며 곤경을 이겨 나갔다.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긴 성녀는 15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데레사 수녀를 시성하였고, 1970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8-12)
“Everyone who speaks a word
against the Son of Man will be forgiven,
but the one who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ot b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만약 이 포도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포도주잔이 아닌 종이컵에 따라 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맛을 음미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훌륭한 맛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싸고 귀하게 여기면 그만큼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싸구려로 취급하면 다른 사람 역시 싸구려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귀한 물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상술이라고 하지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생각납니다. 유리창이 깨진 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망가뜨리기가 쉽지만, 멀쩡한 차는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사람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귀하게 대접해야 남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비하하고 함부로 대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보고, 다른 이 역시 주님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이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남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거슬러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준엄한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장차 당하게 될 박해 속에서 이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의 말씀으로 항변하는 지혜와 용기를 성령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성령 모독죄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죄를 말합니다. 진리는 권력과 폭력 앞에서 자칫 꺾이기 쉽습니다. 제자들은 곧 스승 예수님의 비참한 세속적 패배를 목격할 것이며, 그들 자신도 박해받으며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성령 모독죄가 바로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삶입니다. 이 성령 모독죄는 다른 이에게도 전달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면 그 모습 역시 전달되어서 다른 이들도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가 됩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역시 모두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아빌라의 대 데레사).
말씀의 힘, 성령의 능력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1xdig72xS0
-조재형신부-
진리 치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가를 부르면 2번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는 단순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리 친모이라는 유명한 인도의 수행자이자 명상의 대가는 ‘수련 중의 으뜸은 소리요, 음악은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고 난 후 성가대원의 혈액을 검사하니 자연면역세포(NK세포)의 면역력이 1,000배나 증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가, 염불, 자연과 함께하는 소리와 음악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소리와 음악은 고막에 진동 파장을 만들어 뇌의 활동 파장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공부한 하버드 대학생의 성적이 놀랍게 향상되어 의학적으로 모차르트 효과라는 말도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 미숙아들은 신체 발달이 훨씬 빠르고, 부모님의 사랑 가득한 목소리 파장은 자녀들의 뇌 파장에도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고 합니다. 음악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은 감소하고, 성장 호르몬의 생산을 증가시켜 동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식품의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물론 유전인자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이 생명 활동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바탕으로 음악치료라는 새로운 치유법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저는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하면 피곤함을 줄일 수 있고, 졸음도 막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산보를 할 때도 강의를 듣는 경우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산보는 음악과 함께 하면 즐거운 시간이 되곤 합니다. 음악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며 진정시켰습니다. 한국의 BTS는 음악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은 그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형식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건물, 제도, 교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의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화려한 건물인 교회가 있지만, 제도와 교리가 신앙생활의 울타리가 되지만 영성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교회는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모래 위에 세운 건물처럼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영성입니다.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보다는 영적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 명예, 성공과는 다른 삶이 있으며 그것이 인류의 지혜와 문화의 힘입니다. 행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앞을 보고 달리기보다는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것이 영성입니다. 나와 인류는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함께 하는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2000년 전 로마는 당시 세계의 기준이었습니다. 로마가 법이었고, 로마가 길이었고, 로마가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로마라는 법을 채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로마가 만들 길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교회의 조직과 교회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문명이 법과 길을 만들어 갈 겁니다. 그것을 거스르기도 힘들고, 외면하기도 힘들 겁니다. 법이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채우는 건 정신과 영성이어야 합니다. 플랫폼과 빅데이터가 새로운 시대의 길이라면 그 길의 종착점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산업, 경제, 재물이라는 잔은 믿음, 희망, 사랑을 채울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드리며, 주님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의 성녀 데레사, 혹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축일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기도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습니다. 하느님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서(戀書), 연애편지가 바로 ‘천주 자비의 글’입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깊은 묵상기도와 황홀한 관상 생활은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영적 생활의 기쁨과 행복, 감미로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이웃들과 연결시켰습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던 수도회와 교회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그녀를 용감한 수도회의 개혁가이자 투사로 변모시켰습니다.
우리가 절실히 체험하는 바처럼 인간 존재는 대체로 한결같지 못합니다. 바깥에서는 천사, 법 없이도 살 사람, 성인군자가 따로 없지만 귀가(歸家)즉시 폭군으로 돌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타인으로부터 받는 평가 중에서 가장 정확한 평가이자 신빙성 있는 평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는 가족, 이웃, 동료들로부터 받는 평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크게 칭송받을 만합니다. 그녀는 교회 역사 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영성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가들보다 훨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동료 수도자들의 평가입니다. “이토록 거룩하고 신비로운 분,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성녀를 저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성생활과 관련된 그녀의 가르침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렇게 영성생활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바가 없었습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성(理性)만으로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탁월하고 매력적인 인물이요 성인 가운데서도 대성인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였지만 자신의 생애 안에 방황하던 청소년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때 연애 소설에 심취해서 밤낮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또한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예쁜 옷, 값비싼 향수, 화려한 장신구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래 여자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지금은 만인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성인께서도 한때 이런 ‘흑역사’가 있었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는 큰 위안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험난한 생애 내내 그녀를 동반한 분이 있었는데, 곧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저는 자신을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그때 마다 여왕이신 성모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소박한 개혁 수녀회(맨발의 가르멜회) 하나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수녀회(신발의 가르멜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고 초라한 수녀회였지만 그녀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료 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영광에 가득 차 계신 하얀 망토의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운 망토로 우리 수녀님들을 감싸주고 계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이신 수녀님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있으니 감사하십시오. 수녀님들, 성모님의 위대한 겸손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그분의 수녀라고 불리는 것에 큰 감사를 드립시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가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 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초래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항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는데, 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하시는데, 제 제 스스로가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반영억신부-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루카 12, 11)
-한상우신부-
자신을 살피는
일이 수도생활의
시작입니다.
낡은 인식에
머물지 않는 것은
자기성찰과
하느님 은총으로
가능한
수도공동체의
힘입니다.
수도생활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수녀님께서는
해야할 일을
묵묵히 실천하여
나가셨습니다.
가장 요구되는
정신은
수도공동체의
정신입니다.
전도되고
왜곡된
잘못된 무질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셨습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의 자세를
수녀님을 통해
다시 배웁니다.
우리의 눈을
하느님께로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있고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바람직한 관계가
개혁과 혁신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은 일상생활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실천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사랑입니다.
가장 빛나고
극적인 선택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회개입니다.
회개없는
순명이 없고
회개없는
개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수도생활이란
마음과 몸의
실천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봉헌의 삶입니다.
복음삼덕인
청빈, 정결, 순명의
덕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이
수도생활의
의미입니다.
수도생활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을
통해 희망을
만납니다.
수도공동체의
변화와 발전
성장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녀의 삶을
만나는 것은
수도생활의
제 자리를 찾는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8주 토요일-알게 되기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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