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10. 13. 06:33

2022 10 13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너희 율법교사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렸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루가 11,47-54)

 

 Woe to you, scholars of the law!
You have taken away the key of knowledge.
You yourselves did not enter

and you stopped those trying to ent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은총을 베푸시며 만물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신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 네바다주 사막 한복판에서 낡은 트럭을 몰고 가던 ‘멜빈 다마’라는 젊은이가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 가십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라스베이거스까지 태워주길 청했고 청년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서는 25센트를 주며, “영감님! 차비에 보태쓰세요.”라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면서 명함을 청해서 받았습니다.

시간이 꽤 흘러서 뉴스에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사망이라는 기사와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사, 비행기 회사, 호텔, 카지노 등 50개 업체의 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언장 중에 자기 유산의 1/16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멜빈 다마가 받은 유산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0억 가량이었습니다. 낡은 트럭을 태워준 친절과 25센트의 차비가 2,000억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친절이라는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이렇게 큰 가치를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그 가치를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 보답해주실 것입니다. 이 점도 하워드 휴즈가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가 죽기 바로 직전 남긴 단 하나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Nothing”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남기는 것 하나 없는 삶, 하늘나라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을 거부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를 향해서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오히려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이신 예수님까지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어떻게 하면 옭아맬 수 있을지를 계속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모습이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할까요? 또 하느님 나라에 자기 자리를 널찍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들이 보여줬던 모습은 하느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안에서만 힘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에 온 힘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삶이 있다. 하나는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는 삶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이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투자의 삶이다(알버트 아인슈타인).

 신앙에 기도와 공부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k7B6CnojWXY

영화 ‘식스 센스 ’(1999)에서 말콤은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어린이들을 잘 치료해서 주지사에게 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치료해주던 한 아이에게 총격을 당합니다. 몇 달 뒤 말콤은 콜이라는 아이를 맡게 됩니다. 콜은 자신이 실패했던 그래서 자신에게 총을 쏘았던 그 아이와 같은 증상입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 다짐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문제를 자세히 검토합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말콤에게 있었습니다. 말콤은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총을 쏜 아이와 마찬가지로 콜도 귀신을 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로서 이는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믿어주기로 합니다. 가르치고 치료하는 자세에서 배우고 치료받는 자세로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콜의 말을 믿어주니 방법도 떠올랐습니다. 콜에게 나타나는 귀신들의 원한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정말 원한을 풀어주니 귀신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로 보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콜이 말콤에게 말합니다. 현재 말콤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콜은 말콤에게 아내가 잠들었을 때 말을 해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말을 잘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의 손에서 자신의 결혼반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말콤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실상은 전에 총을 맞아 죽었었고 자신도 귀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며 어린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그 누군가에게서 받은 사랑도 있겠지만 분명 받은 가르침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가르침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후손들이 만들고 있다는 것으로 그들의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책임을 지금 세대들이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만약 그들이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그들은 예언자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거나 줄어듭니다. 하지만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그들은 예언자를 알아볼 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박해하니 그들은 몰라서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박해하는 것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이 예언자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언자들이 하려던 말이나 예수님께서 하시려던 말씀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언자들의 지식을 배웠다면 예수님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무덤을 만들고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닮은 예언자들이 오면 어떨까요?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면 교회에서 환영받을까요? 예수님은 모시면서도 그분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에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시에만 해당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하셨을까요?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이 당시에만 해당하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십일조 이야기하면 대부분이 반대합니다.  

 

    ‘지옥’에 관한 이야기도, ‘심판’에 관한 이야기도,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도, ‘선교’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교리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말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성인들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이것이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섬기는 척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부터 회개해야 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전에 어디서 읽었던 예화 내용을 제 생각대로 정리해봅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을 접해보지 못한 아마존의 오지로 들어갔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에게 문명의 이로움을 알려주며 호감을 얻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에게 신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선교사가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자 선교사는 자신의 가르침을 책 한 권에 그들 언어로 써서 그들에게 남겼습니다. 부족은 선교사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 한 권을 소중히 간직하기로 하였습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게 우선 사제만 볼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제도 그 책을 보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원을 만들어 가장 깊숙한 곳에 책을 숨겨두고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도 만족하지 못한 부족은 분실할 위험을 없애기 위해 아예 금고에 넣어놓고 일 년에 한 번만 꺼내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이익을 준 선교사를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가 알려준 대로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과 진리를 주십니다.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입니다. 성물방에서 보면 성물과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 하.사.시.를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책이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진리의 열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은총을 위해 기도는 하되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와 공부의 균형이 맞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책을 묻어놓고 선교사만 기리는 부족처럼 되지 않습니다.  

 

    레지오 회합에서도 맨날 교본만 공부합니다. 하지만 교본에서는 쁘레시디움이 생긴 지 처음 몇 년만 교본으로 하고 나머지는 영적독서를 하라고 쓰여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본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10년을 레지오를 했다면 적어도 영적 독서 10권은 읽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본만 읽으며 지식을 쌓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묵주기도의 은총과 영적 독서의 균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지식의 열쇠’는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은총의 열쇠와 함께 지식의 열쇠도 간직한 우리 공동체가 됩시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데 모으는 자리. 교회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b2QVII2sw

 -조재형신부-

 

메이플우드 성당 설립 50주년 축하미사엘 다녀왔습니다추기경님께서 축하미사를 주례해주셨고, 30여명의 사제들이 함께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허락하셨고교우들은 정성껏 50주년 감사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50주년을 감사드리면서 교우들은 묵주기도 100만단을 봉헌하였고성서필사를 하였습니다제단 양옆에는 50주년을 기념하는 성서말씀이 걸려있었습니다.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포하고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라는 레위기의 말씀이 있었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 당신 목장의 양 때 감사기도 당신께 드리오리다세세대대 영원토록 찬양노래 부르오리다.”라는 시편의 말씀이 있었습니다메이플우드 성당이 다른 성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본당 출신 사제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3번 연속 본당 출신 사제들이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고 합니다본당을 설립하신 초대 신부님께서 무엇보다 사제양성에 관심을 기울였고젊은이들에게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었고젊은이들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하느님의 자비와 크신 사랑으로 본당 설립 100주년도 기쁨의 잔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기생충이 작품상을 비롯해서 4개 부분의 상을 받았습니다저는 한국에서 보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에 한 번 더 미국에서 기생충을 보았습니다여러 장면이 있지만 제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아들아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참으로 시의적절하다.”였습니다한동안 이 대사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패러디가 되었습니다안 될 것 같은 일힘들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지면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고 웃으며 말하였습니다메이플우드 성당의 설립 50주년 행사도 많은 분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차질 없이 진행되었습니다본당 신부님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국가 역시 재난 상황이 벌어지면 그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있습니다. ‘다 계획이 있습니다.’ 캠핑을 준비하는 신부님도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캠핑 장소를 예약하고마트에서 장을 보고장작을 사고텐트를 설치하는 모든 것들을 빈틈없이 준비하였습니다덕분에 저는 편하게 캠핑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저도 교구청에서 일할 때는 나름 계획을 세우면서 준비했습니다적어도 2년 전에는 강사를 섭외했습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시작입니다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는 것도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맡겨 주셨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지 않고남도 따르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섬김과 봉사의 시대, 겸손과 헌신의 시대가 펼쳐졌습니다!

-양승국신부-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다양한 삶의 모습들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모습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하향성(下向性)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삶, 그분의 가르침을 묵상해보면 끊임없는 하향의 삶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바닥이 아니라 철저하게도 가장 밑바닥을 향한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추구하셨던 가장 최종적인 밑바닥은 바로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참으로 역설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정복에서 패배를 향해, 부유함에서 가난함을 향해, 영광에서 비참을 향해, 삶에서 죽음을 향해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사명 한 가지는 무력함의 수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력함 가운데서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함을 발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향성의 예수님과는 정반대의 경향 상향성을 추구합니다. 기를 쓰고 위를 향해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좀 더 높은 자리, 좀 더 그럴듯한 직함, 좀 더 많은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런 우리기에 철저하게도 하향적인 예수님 앞에 마음 깊이 불편함과 껄끄러움을 느낍니다. 가장 큰 불편함과 껄끄러움을 느꼈던 사람들의 대표 인물이 바로 위선자 율법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속은 텅 비었으면서 겉치레는 대단했습니다. 가르침은 그럴 듯 했지만, 삶이 조금도 뒷받침되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나 윗자리, 물 좋은 자리를 찾았고 인사받기, 스승 소리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런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기만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11장 52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등장으로 솔직히 껄끄러운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 교회 지도자들 삶도 많이 팍팍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요구와 기대치 앞에 은근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통해서 우리 사회 전반,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 전체의 쇄신과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제 독재의 시대, 군림의 시대, 목에 힘주는 시대,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섬김과 봉사의 시대, 겸손과 헌신의 시대가 펼쳐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또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

(루카 11,53)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불행하여라. ~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고,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시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수용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교훈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비와 사랑을 놓쳤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예수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불행하리라는 경고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행복의 길이 시작됩니다.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8주 목요일-하느님 사랑의 가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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