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루가 12,1-7)
I shall show you whom to fear.
Be afraid of the one who after killing
has the power to cast into Gehenna;.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며,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작가,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생각을 먼저 지배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그다음에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내 생각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지배하느냐에 따라 성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국민화가 모지스는 75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10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일본의 시바타 토요 할머니는 자기 장례비를 헐어 98세에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판해서 150만 부를 판매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김두엽 할머니는 83세에 그림을 처음 배워 94세에 전시회도 열고 책도 썼습니다.
못할 수 있는 이유가 더 많은 상황을 극복하신 분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못한다는 생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에 실제로도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해서 실제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세상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상처를 당할까 봐, 거짓된 말과 행동으로 큰 손해를 입을까 봐, 그 잘못된 말과 행동을 또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서 나를 따돌릴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5)
그렇다면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우리 육신을 죽이고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 잘못된 우리의 생각까지도 빠짐없이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분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힘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세상의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보다 세상의 뜻을 더 먼저 실천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던 우리입니다. 이제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리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몫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의 다락방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두려워진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6pa9m4cIs5E
테일 오브 테일즈’ (2015)의 ‘젊음의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인’의 줄거리입니다. 어떤 왕국에 여색을 지나치게 탐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창문을 내다보는데 아랫동네에서 여인의 매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왕은 그 여인을 불렀지만, 여인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왕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신하를 시켜 보석 목걸이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뜻밖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인 언니와 동생, 자매사이인 두 노파가 살고 있었습니다. 목소리만 예뻤던 것입니다. 그날 밤 왕은 참지 못하고 그 집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언니는 문을 열어줄 수 없습니다. 다만 일주일 뒤에 오면 신체 일부는 보여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왕의 선물과 사랑을 얻기 위해 진짜 모습을 감추려고 열심히 손을 문지르고 초에 넣어보는 등 큰 노력을 합니다. 어찌하여 일주일 뒤에 손가락 하나를 문밖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왕은 그 손가락을 보고 더욱 안달이 납니다. 왕궁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언니는 왕궁의 모든 불을 꺼 달라고 청합니다. 왕은 그러겠다고 합니다.
아침에 왕은 궁금하여 침대에 있는 여인의 실제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이불 채 집어 던집니다. 다행히 이불이 나무에 걸려 죽지 않습니다. 지나가던 마녀가 그녀를 정말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여인은 그것이 저주인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습니다. 왕이 지나가다가 그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같은 사람인 줄 모르고 한눈에 반해 바로 결혼을 제안하고 언니는 자신의 결혼식에 동생을 초대합니다.
결혼식에 온 동생은 언니가 어떻게 예뻐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말해줄 수 없습니다. 자신도 어떻게 예뻐졌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생이 하도 졸라대자 “몰라, 누가 내 껍질을 벗겨냈나 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곧이 들은 동생은 고통스럽게 피부 껍질을 벗깁니다. 그렇게 죽어갑니다.
이것이 마녀의 첫 번째 저주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도록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언니도 이 저주에서 풀려나지 못합니다. 언니는 급격하게 자신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더 있다가는 또 왕에게 내던져질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게 두려워 밤을 틈타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미 자신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었어도 그 매력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그 매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하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도 늘 불안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어두운 데서 들은 것을 밝은 데서, 골방에서 들은 것을 지붕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로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붕 위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역사에 기록된 교회는 가톨릭교회밖에 없습니다.
첫 복음을 선포할 때 그들이 힘을 얻은 곳은 ‘다락방’입니다. 다락방은 산짐승들에게는 ‘옹달샘’과 같이 언제든 와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곳입니다.
위 영화에서 마녀는 한 번 매력을 주고는 더는 자신을 찾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락방이 있습니다. 성령이 내리는 곳입니다. 저로서는 처음엔 하.사.시.였고 나중엔 성체조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미워해도 그곳에 앉아 있으면 다시 에너지가 충전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의 다락방이 있을 때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전에 선교 왕으로 뽑힌 한 분이 자신은 길거리 선교를 나가기 전에 항상 성체조배를 했다고 합니다. 세 시간 선교할 것이면 세 시간 성체조배를 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야 실패해도 또 돌아갈 곳이 있기에 담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어린 문근영에게 다락방이요 옹달샘은 바닷가였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오빠가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도 인생을 살아갈 때 힘이 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힘을 회복할 자리, 곧 기도로 에너지를 회복하는 장소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면 하느님도 우리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두렵지 않아야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나에게 성령께서 내리는 다락방이 꼭 필요함을 잊지 말고 나만의 다락방을 꼭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생명의 두 차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Gq2H1wZ3aQg
-조재형신부-
제가 속한 서울교구는 공문에 따라서 본당신부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본당신부 임명미사에 함께하였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서울교구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공문에 따라서 본당신부의 직무를 수행하지만 1년 정도 지나면 교구장님이나 보좌주교님이 본당에 와서 본당신부 임명미사를 주례합니다. 그 미사 중에 본당신부 임명예식을 함께합니다. 본당신부도 1년 정도 교우들과 함께 사목을 해 보고, 공동체도 본당신부와 1년 정도 함께 지내보고 큰 무리가 없으면 교구장님이나 보좌주교님이 임명미사를 통해서 본당신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본당신부에게는 교구장을 대신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할 것을 당부합니다. 공동체에게는 본당신부와 함께 하느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당부합니다. 임명미사는 본당신부에게도, 공동체에게도 한바탕 축제가 되었습니다. 분향에 대해서도 약간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보통은 주례자가 제단에 분향을 한 후에 부제가 주교님에게 분향을 하고, 사제에게 분향을 하고, 공동체에 분향을 하였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는 주교님이 제단에 분향을 한 후에 먼저 공동체를 향해 분향을 하고, 사제에게 분향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제가 주교님께 분향하였습니다. 분향의 우선순위가 달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인사이동 공문이라는 형식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1년 정도 시간을 주고 공동체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내용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분향이라는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향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내용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본은 독특한 ‘도장문화’가 있습니다. 직책에 따라서 정해진 형식의 칸에 도장을 찍습니다. 이런 문화가 철저하고,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식은 긴급한 사항에 대해서 대처하기는 어렵습니다. 디지털 공간에서 모두가 함께 결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직책에 따라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 할 수 있습니다. 관습과 형식은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습과 형식에 매몰되면 참된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는 굴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새로 이사한 집을 축복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습니다. 보통은 먼저 축복예절을 하고 식사를 하게 됩니다. 집에 도착하니 먼저 온 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한 것도 있지만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을 축복하는 내용이지 식사라는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점심시간이 한 참 지나서 배가 고프니 먼저 식사할 수도 있습니다. 집 축복을 마치고 함께 식사를 맛있게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잠시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던 바리사이의 허위와 위선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형식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먼저 보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참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전도여행 중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하여 교육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 입니다.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루카 12,1)는 것과 그들로부터 장차 어떤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12,2-7)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만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루카 12,5)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죽은 뒤의 권한까지 가지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코로나 상황을 격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실 당신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만을 진정 사랑으로 두려워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두려움을 히브리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히브 5,7)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 대한 두려움은 순결하고 영원히 남는다.”
(시편 18,10)
그래서 집회서와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
(집회 25,12)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
(시편 111,10)
이처럼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루카 12,5)고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7)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참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루카 12,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핍박이 닥친다 하더라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되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되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루카 12,1)
주님!
위선의 누룩이 아니라 믿음의 누룩을 지니게 하소서.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의 누룩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말씀의 누룩을 지니게 하소서.
그릇된 생각과 의혹과 불신을 부풀리는 누룩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부풀리는 생명의 누룩을 지니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8주 금요일-누가 두려워하고,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나? (ofmkorea.org)
-전삼용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0월 16일 연중 제29주일 (0) | 2022.10.17 |
---|---|
2022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0) | 2022.10.15 |
2022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0) | 2022.10.13 |
2022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0) | 2022.10.12 |
2022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0) | 2022.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