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2-46)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성령을 따라가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의 잘난 체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나무라시며 그들을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할까?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을 할까요? 많은 학자의 의견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바로 생존 능력 때문입니다.
원시시대의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하늘 위로 날 수도 없고,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도 없었습니다. 또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서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날카로운 이빨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덩치도 초식동물보다도 작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앞에 사나운 맹수가 다가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긍정적인 생각으로, ‘저 맹수는 나와 친구가 될 거야.’하며 다가갔을까요?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힘차게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부정 편향성이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잘 보이고, 상대방이 잘해준 것보다 못 해준 것이 더 생각나는 것입니다. 칭찬의 말보다 비난의 말이 더 오래 기억나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존의 문제로 부정 편향성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적들을 만들어 피곤해지고, 혼자 살기에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전히 부정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진화가 덜 된 것이 아닐까요? 진화가 잘 된 사람은 현대에 맞게 긍정 편향성을 더 많이 지니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 편향성을 이제는 긍정 편향성으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나를 지켜주시는 함께해주신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세상을 더 쉽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를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왜 불행하여라 라고 선언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긍정 편향성이 아닌, 부정 편향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는 허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율법 교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를 자세히 규정합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 규정을 면밀하게 지켜야 했고, 그것을 지키려면 몹시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규정을 제정한 율법 교사는 그 규정들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켰다 하더라도 불필요한 규정들을 만들어 일반 백성에게 강요하곤 했지요. 진정한 사랑의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이웃을 부정 편향으로 이끈다면 우리에게도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긍정 편향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를 낮추시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XUdCCJQaPKM
‘가을동화’ (2000)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린 준서가 태어난 동생을 보기 위해 신생아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후 신생아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동생과 다른 아이의 이름표를 바꿔 놓습니다. 다른 아이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 후 14년, 은서는 중학교 1년생 준서는 3학년이 되었습니다. 윤 교수 부부의 사랑을 받으며 두 아이는 남매로서 행복하게 생활합니다. 둘은 정말 행복한 남매입니다. 그러나 서툰 자전거 솜씨로 준서를 쫓아가던 은서가 차에 치이면서 준서와 은서의 행복은 깨지고 맙니다. 부모의 혈액형이 둘 다 O형인데 은서는 B형인 것입니다. 추적해 본 결과 은서는 작은 식당을 하는 순임네 딸이었습니다.
은서는 그동안 순임네 딸인 줄로만 알았던 신애와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신애는 14년 동안 가난하게 산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은서를 따돌립니다. 은서는 생일에 외톨이가 되어 홀로 바닷가에 갑니다. 그런데 오빠는 신애의 생일에 있지 않고 홀로 있을 은서를 찾으러 바닷가에 온 것입니다.
남매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어쨌거나 한 명은 그 집에서 나가야 합니다. 가을동화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사랑 이야기가 되기 위해 은서는 몹시 가난하고 험한 곳으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들은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1,45)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욕’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라는 신랑 앞에서 그들이 신부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신부가 될 수 없다면 창조자의 본성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창조자만 영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드님을 지옥까지 낮추셨습니다.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으려면 하느님께서 한 분은 남자가 한 분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의 역할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여자의 역할은 한없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 낮아짐이 없이는 창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창조는 양과 음, 하늘과 땅이 만나 역동적인 힘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임신하기 위한 부부의 관계와 같습니다. 여기서 여성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녀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왜 아드님을 지옥의 고통까지 떨어뜨려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과 극이 만나지 않으면 창조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앞에서 낮아지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당연하다 여겨야 합니다. 그분이 진리이시면 우리는 거짓이고 그분이 빛이시면 우리는 어둠입니다. 그분이 선이시면 우리는 악입니다. 이것이 거북하면 그분과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창조자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루르드의 샘물은 수많은 병자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기적의 물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샘물이 어떻게 솟아나게 되었는지 알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욕당하는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성모님께서 베르나데트에게 아홉 번째 발현하셨을 때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딸아, 지금 샘으로 가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어라. 그 가까이에서 자라는 풀을 먹도록 해라.”
베르나데트는 성모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당시 그곳은 시체를 태우기까지 하는 매우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그 흙탕물을 먹고 거기에 난 풀을 먹고 그 물로 자기 얼굴과 손을 씻는 일은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아이가 되는 모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지만, 그 자리에서 샘물이 솟았습니다. 지금도 하루에 120,000만 톤이 솟습니다. 그 물을 마시고 베르나데트는 천식이 치유됩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과 멸시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당신 창조자의 본성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고통과 멸시와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 앞에서 고통과 낮아짐은 창조와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C5G-iezCp8
-조재형신부-
며칠 전부터 이가 시리는 증상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셔도 이가 시리고, 가만히 있어도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치과엘 갔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이의 뿌리가 약했습니다. 미세하게 금이 갔습니다.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뿌리가 약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잘 견뎌준 이가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수고 했으니 이제 치과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문득 나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합니다. 기초가 약한 곳이 아팠던 것처럼 악의 세력은 영적으로 부족한 부분으로 들어옵니다. 저의 부족함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함에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장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은 단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부족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우유부단과 반대되는 말로는 ‘직정경행(直情徑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정의 충동대로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행한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이러한 성격을 받아들여서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에겐 '직정경행'은 긍정적으로 사용되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목을 베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 사고방식이 면면히 흐르다 보니 저울질도 해 보지 않고 미국과 싸움을 꺼린다는 것은 악으로 보고 하와이의 진주만(灣)을 선전포고도 없이 비굴하게 공습해 멸망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앞과 뒤를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신다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대로 예수님께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우유부단한 것도 고칠 필요가 있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중용(Indifferentia)'을 강조하였습니다. 우유부단과 직정경행의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점과 단점의 중간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용이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한 것보다 가난한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에 응답을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진다.” 결정했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같이 기도 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한 것이 불행의 씨앗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직정경행한 것이 불행의 씨앗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우유부단할지라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직정경행할지라도 신속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올 것을 대비해서 겸손해져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죽기 전에 반드시 이루면 좋을 삶의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니 가난한 사람들, 절박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어린이들, 작은 이들, 낮은 이들은 대체로 위선적이지도 않고 위선적이지도 않더군요. 그들의 삶을 그저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기대치가 크지 않으니, 삶이 소박하고 겸손합니다.
반면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 지도자들, 고위층 인사들의 언행을 보니 엄청나게 위선적으로 이중적인 경향이 컸습니다.
예수님 시대 위선과 이중성의 끝판왕이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인 행태가 얼마나 눈꼴 사나운 것이었으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되었습니다.
이중적인 모습을 죽어도 싫어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즉시 그들을 향한 강력한 펀치를 미련없이 날리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복음 11장 43절, 46절)
따라서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올 것을 대비해서 겸손해져야겠습니다. 많은 것을 쥐고 있을수록,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그 날을 생각해서 작아져 있어야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서를 통해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을 위한 좋은 비결을 하나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러 비결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비결은 매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언제나 육의 통제를 벗어나게 됩니다. 인간적 욕망을 다스리기가 어려워집니다. 자연스럽게 일탈과 방종의 길을 걷게 됩니다.
“육의 행실을 자명합니다. 그것은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티아서 5장 19~20절)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신 악의 세력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도께서 제시한 여러 가지 악의 세력 가운데 하나에 함몰되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악덕들이 하나하나 추가됩니다. 그 악덕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우리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집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자유와 은총, 그리고 축복이 우리를 휘감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티아서 5장 22절)
꾸중을 감당하라
-반영억신부-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는 이에게는 불행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카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카11,46) 라는 예수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의인처럼 보인 죄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죄인처럼 보인 의인이 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회개로 이끌기 위한 예수님의 표현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예수님의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달게 받아들이십시오.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루카 11, 44)
-한상우신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무덤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해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어두워지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불행하다는
사실도 모른 체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불행의 씨앗이
우리자신의
거짓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습니다.
대체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무덤같이
우리자신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과 아집의
모순덩어리만
키울 뿐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멋진
시작입니다.
사랑은
삶의 모순을
멈추고 새로워지는
실천의 기쁨입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느님과 우리의
정직한 관계입니다.
참된 종교는
정직한 관계와
올바른 실천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신앙인이
올바른 실천을
잃어버리면
이기적이 되고
아집에 빠지게
됩니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다.
건강한 일치는
무덤같이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모순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임없이 바로잡아
가는 여정입니다.
이 섬과 저 섬을
이어주는 다리를
볼 때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삶으로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결심합니다.
누군가에게
불행의
무덤이 아닌
행복의 다리가
되는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바로잡아야 할 대상은
언제나 먼저 제자신이며
바람직한 길은
교만과 아집이 아닌
사랑의 실천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6주 수요일-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말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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