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
(루가 17,11-19)
Has none but this foreigner
returned to give thanks to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하여 나병이 깨끗해진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선물을 건네자 엘리사는 거절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다(복음).
은총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키엣 대주교-
사마리아 지역은 유다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서로 왕래조차 하지 않고 지저분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자 금지된 경계를 넘어가셨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나병 환자를 만나는 것 또한 금기를 행하신 것입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죄인으로 여겨졌고 나병 환자를 만나면 자신도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숨어살았습니다. 그들은 가장 낮은 천한 계층이었고 사회에서 추방된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셨고, 자비를 청하는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사회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사람, 사회의 망각 속에 묻혀버린 사람, 따돌림을 받는 사람, 그들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주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감히 어느 누가 주님께 ‘이 땅에 내려와 주십시오’ 하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주님을 이 땅으로 내려오시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상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누구의 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 스스로 내려 오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땅을 밟으시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비참한 생활속에 미래에 대한 꿈 조차 꿀 수 없는 그들의 육체는 심판을 받고 추방된 몸이었습니다. 육체가 건강한 사람도 기적을 만나지 못하는 데, 하물며 이런 비참한 몸을 한 그들이 어떻게 감히 주님을 만나는 꿈을 꿀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극한의 고통 바로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비를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역 없는, 조건 없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믿음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주님 구원의 은총은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다고 하여 그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갖고 간구하는 사람만이 자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예수님ㄲ 자비를 청하는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소리 높여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구원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나병환자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자비를 청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둘째는, 사제에게 보여주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치료의 은총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말만으로도 그들은 믿음을 갖고 길을 떠났고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바로 자신을 구원한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주님과 만난다는 믿음의 기쁨으로 맞이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과 기쁨의 근원입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단지 병이 치유되는 기쁨만을 가졌을 뿐 주님과의 친밀한 기쁨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믿음만 있었고, 주님을 만난다는 믿음은 부족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병이 없어지자 믿음도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쁨의 원천과 새 생명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주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삶의 의미의 원천을 찾은 그의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그의 삶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감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게 하여주소서. ‘감사하는 마음’이 제 모든 삶에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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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까? 구원의 은총을 맞이하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2. 구원을 청하는 믿음과 주님을 만나는 믿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을 찾기 위해 떠나보십시오.
3. 불편한 사람, 감히 접근하지 못하거나 금기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를 살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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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 속에서 감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내가 가진 것들과 사람들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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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단체로부터 강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그날 오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이 단체 책임자 되시는 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신부님께 강의를 부탁했는데, 제가 강의하는 시간에만 가능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 강의 시간을 바꿔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하지만 저 역시 그 시간만 가능했기에, 그 신부님이 강의하시고 저는 다음에 강의하겠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곧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신부님 화나셨어요? 그러면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
강의하러 가기 바로 전날 그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제가 아닌, 다른 신부님께서 강의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황해서 그 단체장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의사 전달에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라는 답장이 오더군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강의 준비도 열심히 했고, 강의에 필요한 준비물까지도 모두 사놓은 상태였는데, 이 모든 일들이 헛일이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힘이 들어갔는지, 안경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또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계속해서 실수 연발입니다.
안 좋은 생각을 하니, 안 좋은 일만 계속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좋은 것도 많습니다. 강의하지 않아도 되니, 먼 곳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말 교통 체증에 시달릴 일도 없습니다. 또 할 일이 많았는데 여유 있게 주말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강의하지 못하게 된 것, 오히려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이르시지요.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해서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르면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어서 예수님을 보고서도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나병이라는 병으로부터 깨끗해진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아홉은 왜 감사를 드리러 오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영광이 이루어졌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깨끗해진 것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부정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순간에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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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지향은 오로지 '이것' 뿐이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OzHjqUXv8qg
김성제 선교사는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뿔로라는 필리핀 극빈자 촌에서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마약을 한다는 이곳, 살인과 강간이 판을 치고 평균 열네 살이면 아이를 낳게 된다는 이곳에서 김 선교사는 천국의 예배를 아이들과 만들고 있습니다.
150여 명의 아이와 드리는 예배는 그야말로 눈물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헌금통이 없어서 탬버린에 동전을 넣지만, 아이들은 그 헌금이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한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저도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또 다른 아이는 말합니다.
“저는 오늘 생일인데 집에 먹을 음식이 없어요. 그래도 교회에 나올 수 있어 하느님께 감사해요.”
이런 눈물의 예배는 세 시간 정도가 드려지는데 천막을 치려면 두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 시간이 짧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그 부족한 환경에서도 어째서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또 우리의 미사는 진정한 감사의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왜 감사의 눈물이 흐르지 않을까요? 이런 아이들처럼 감사하는 신자들과 미사를 하는 사제는 또 얼마나 행복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믿음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구원에 이를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았다고 하십니다. 다만 돌아와 당신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사실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의 ‘미끼’입니다. 미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잡히는 물고기가 되려면 바늘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찔려서 피가 납니다. 그 피가 감사입니다. 우리가 미끼만 원하고 낚싯바늘엔 찔리기는 원치 않으니 감사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서 나온 이야기 중 현수라는 청년이 수진이라는 아이를 유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빠 친구라고 말하여 유괴했던 수진이는 사실 그가 아빠 친구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현수를 쫓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돌아가신 아빠도 현수처럼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수는 일용 노동자였는데 손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되자 이런 안 좋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진이는 도리어 현수를 위해 대일밴드를 사 왔습니다. 현수는 이런 착한 아이를 유괴하려고 했던 자기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크게 뉘우치고 감사해합니다.
수진이의 부모가 가진 재산은 하나의 미끼입니다. 현수는 이 미끼를 덥석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독이 있음을 몰랐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 심장이 찔립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나의 처지는 바뀐 게 없는데 그 사랑이 자신과 같은 가슴에도 와 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때 자신의 처지는 낮아지고 사랑은 커집니다. 이때 나오는 감사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랑을 믿은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합니다. 이는 나병이 낫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나병이 나아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체는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이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는 그분이 나를 낚는 낚싯바늘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때 솟아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때 가지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미사의 지향은 감사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해 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이 인간을 찾아온 하느님임을 알면 그분께 치유되지 않았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미사 때 감사만 나와야 구원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감사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가 매일 영하는 성체는 악마의 섬과 같은 우리 마음에 찾아오신 하느님이십니다. 나에게 다가오신 분이 하느님이신 것 하나만으로 우리는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OuRAeJChec
-조재형신부-
대화 중에 ‘언제가 가장 행복했는지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감사할 일이고, 아직까지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주어진 일이 있는 것에도 감사를 드리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후에 행복했던 때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합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8년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작은 집을 마련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돌아보면 주로 제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였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3시간이 행복하고, 쇼핑을 하면 3일이 행복하고, 결혼하면 3년이 행복합니다.” 행복에도 유효기간이 있고, 행복에도 여운의 깊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채울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살면서 원하지 않는 것들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내의 마음과 다른 나의 행동 때문에 오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유효기간이 없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신 분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알게 되는 행복을 이야기하신 분이 있습니다. 이 행복은 누가 가져갈 수 있는 행복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있는 행복도 아닙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행복입니다. 가난해도, 병들었어도, 죽음의 강을 건널지라도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행복에 가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말씀은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습니다. 그리고 나병이 치유되어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나아만이 행복한 것은 나병이 치유된 것만은 아닙니다. 나아만의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된 것은 나병이 치유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서 자비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처럼 10명 중에 1명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깨끗하게 치유된 10명의 나병환자가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치유된 것을 감사드리면서 예수님을 찾아갔던 1명의 나병환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참된 행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박해를 받아 매를 맞을지라도, 죽음의 강을 건널지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언제가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감사의 배를 타고 기도의 노를 저어 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행복이요, 언제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일시적 행복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까지 보장받은 단 한 사람!
-양승국신부-
돌아보니 제 주위에 참으로 감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절박하던 시절, 부탁드린 것도 아닌데, 놀랍고도 관대한 손길을 그 어떤 조건도 없이 건네주신 분들...그러한 손길 내밀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나병환자들, 백번 천번 감사해도 부족한 사람들, 죽을병에서 치유된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모습에서 감사의 정이 현저히 부족한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안고 있었던 가장 치명적인 약점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속성이 결여된 믿음이었습니다. 한때 믿음을 지니기는 했었지만 그 믿음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다급할 때는 정말 대단했지만, 그들의 간절한 육체적 바람이 충족되는 순간 믿음은 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미성숙한 신앙과 성숙한 신앙이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그들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외면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일회적인 것에만 목숨을 걸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한 치 앞만 바라봤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유다인도 아닌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달려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총과 자비에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겸손이 낳은 결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책임져주실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그의 믿음은 참으로 성숙한 것이고 또한 지속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크신 은혜를 베푸시어 열사람의 나병환자를 동시에 치유시켰지만 낫게 되자마자 다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코빼기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마음이 참으로 씁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단 한 명의 이방인을 대견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돌아와 인사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육체적인 건강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았습니다. 건강만 되찾은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 건강해진 것입니다. 일시적 행복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까지 보장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닌 신앙에도 필요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흔들림 없는 견고함입니다. 일회적이거나 단속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항구한 든든한 신앙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과 순종, 그리고 감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방 민족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야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으라는 엘리야의 전달을 받았을 때 무시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 만일 엘리야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 그러니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마음을 바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치유를 입은 것은 말씀에 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돌아설 줄을 알고, 한없이 낮아질 줄 알며, 치유해주신 분께 감사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고백하던 찬미가(2티모 2,11-13)로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언하면서, 그분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찬미하면서 복음에 대한 순명과 믿음의 행동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사제들에게 가던 중에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서 나아만이 엘리야의 말을 믿고 순명하여 나병이 나았듯이, 나병환자 열 명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1독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혹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자비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아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니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곧 믿고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아홉은 비록 자비를 입고 치유는 받았을지라도 그들에게 구원이 선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비를 입고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전히 아버지의 집 문밖에 서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치유 자체가 아니라 은총을 주시는 분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입니다.
곧 치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주시는 분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리는 겸손한 자세로 감사하며 흠숭을 드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감사함이 곧 구원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오늘도 미사경문 감사송에서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의 도리요 길이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이 감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루카 17,16)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어,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제28주일-치유의 단계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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