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루가 11,5-13)
I tell you, ask and you will receive;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the one who seeks, find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사람들에게,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는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는지 묻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냐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눈앞이 캄캄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일이 잘되지 않을 때 사용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커다란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극장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야 어둠에 조금씩 적응할 수 있습니다. 눈의 조리개가 더 열리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꽤 많은 부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면서 잠시 눈을 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가 바로 기도하는 시간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눈을 뜬다면 어떨까요? 그때 비로소 고통과 시련이 그렇게 크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쁘면 ‘기도할 시간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유가 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삶과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도끼질을 잘하기 위해 미리 도끼날을 가는 것처럼,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줘서 삶을 잘 살도록 해 줄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느님 나라를 여셨고 모든 사람을 교화시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당연히 악인과 선인을 가리는 심판이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이 나라 백성이 될 자격을 주시지요. 더군다나 아들에게 빵 대신 돌덩이를 줄 아버지 어머니가 없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빵과 돌, 생선과 뱀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대조하는 유다의 고유 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저자라 할 수 있는 루카는 전혀 비슷하지 않은 달걀과 전갈을 비교합니다. 아마도 루카가 의사였기 때문에, 몸에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대조한 것일 것입니다.
악에 기우는 사람들이어도 부모로서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압니다. 하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나쁘게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하느님께 청원하도록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부탁을 들으면서 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이것'이 없으면 '성령'도 없는 것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CfVvi_DkTs4
영화 ‘케빈에 대하여 ’(2012)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에바는 자유로운 여행가입니다. 그러다 프랭클린을 만나 아이를 갖게 됩니다. 아직 아이를 원치 않았던 에바는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에바는 케빈에게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케빈은 엄마의 감정을 봅니다. 케빈은 엄마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합니다. 엄마는 결국 자신 안에 있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맙니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엄마의 감정을 먹지 못했던 케빈은 성장하면서 계속 타인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되어갑니다. 어느 날 가정에 너무도 소홀한 프랭클린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에바와 이혼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케빈은 엄마를 놓아줄 마음이 없습니다. 케빈은 자신의 아버지 프랭클린과 여동생 실리아를 활로 쏴 죽인 후 학교 체육관의 문을 자물쇠로 잠그고 활로 학교 친구들을 대량 살해하고 체포됩니다.
재판 동안 에바는 모든 재산을 뺏기고 폐인처럼 생활합니다. 과거 사건을 아는 남자에게 협박당하기도 하고 피해자 유족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2년이 지나 케빈의 나이가 18세가 가까워져 소년교도소에서 성인 교도소로 이송될 케빈을 만나게 됩니다. 에바는 케빈에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왜 그랬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르겠어.”
에바는 원하지 않게 어머니가 되었지만, 케빈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주지 못했습니다.
“감정!”
사랑은 감정입니다. 격리 원숭이가 젖병을 단 차가운 철사 원숭이보다는 젖병이 없어도 수건이 감긴 원숭이 모형을 어미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젖을 주는 일은 희생입니다. 하지만 새끼는 따듯한 감정을 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친구가 밤에 찾아와 빵 세 개만 꾸어달라고 친구를 괴롭힙니다. 그 빵 세 덩이는 세속-육신-마귀가 죽는 것을 통해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좋은 감정은 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질 때, 육체에 대한 욕망이 사라질 때, 교만이 꺾일 때 생겨납니다.
에바는 아이에게 무언가는 주고 싶은데 세속-육신-마귀를 꺾을 무언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무언가를 우리는 “성령”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와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것은 “사랑, 기쁨, 평화”(갈라 5,22)의 열매를 맺는 성령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루카 11,13)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상대에게 희생해도 상대는 내가 사랑한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내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원인인 삼구를 없애시고 좋은 감정이 생겨나게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친구에게 줄 빵 세 덩이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가 아버지에게 한 이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듯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자녀들은 부모의 따듯하고 다정한 감정을 원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차갑게 젖병만 물려주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감정 없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그 대가는 부모와 함께 치러야 합니다.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만나고 친구를 만날 때 내가 건네줄 따듯한 빵 세 개가 준비되었는지 살펴봅시다. 다정할 수 없다면 안 만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 감정은 성령에 의해 생깁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때 오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축복 신앙과 수도 신앙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QhHAeWWdyA4
-조재형신부-
영화 ‘반지의 제왕’이 있습니다. 영화는 3부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편은 ‘반지원정대’ 2편은 ‘두개의 탑’ 3편은 ‘왕의 귀환’입니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과 주제가 비슷합니다. 영신수련의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 ‘두개의 깃발’,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를 향한 주인공 ‘호빗’의 긴 여정입니다. 영신수련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절대반지는 ‘성공, 명예, 권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헌신, 겸손, 나눔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의 탑을 멀리하고 선의 탑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은 선과 악의 대결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악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왕의 귀환으로 결국 선이 승리합니다.
신앙의 여정도 그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처절한 실패이고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났습니다. 원망에서 감사함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
보다 큰 기도, 보다 성숙한 기도,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칩시다!
-양승국신부-
청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깊이 있게 묵상하고, 그 진의(眞意)를 명확하게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작정 글자 그대로 믿고 죽기 살기로 청원 기도에만 전념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큰 실망과 좌절을 맛보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청원 기도와 관련된 예수님의 권고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제댈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떼쓰고 어거지 쓰고, 떼써봤지만,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나 효험도 없이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아버지께 간절히 청한 것은 시시한 것, 가벼운 것, 들어주셔도 좋고 안 들어주셔도 좋은 그런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정말 중요한 것들, 때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잠까지 설쳐가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간절히 매달렸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끝까지 붙들어보려던 관계는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매달렸으며, 청하여라, 주실 것이라는 청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목숨을 다해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무자비하다 못해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며, 하느님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시라며 어찌 이리 끔찍한 현실에 맞닥트리게 하시는지, 정말이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의도는 사실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기적의 요술방망이를 지닌 마술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닌 끝도 없는 이기적 욕구들을 끝없이 채워주시는 해결사도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청하는 참으로 사소한 바램들도 즐겨 들어주시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그릇들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신앙을 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한도 끝도 없는 이기적인 기도들을 들어 주시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들이 청하는 것이 위험하고 해로운 것, 죽음으로 가는 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인 성령을 청할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사실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안에 벌어지는 모든 희로애락, 흥망성쇠를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공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실패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젊음에 행복해하지만 언젠가 주실 병고와 죽음도 기꺼이 수용합니다.
오늘 내가 진정으로 청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기도의 대상이 너무 허무맹랑하거나 얼토당토않은 것, 이 지상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면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보다는 불완전한 이 지상에 완전하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더 큰 선을 위해, 더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을 위해, 더 참된 가치의 추구와 실현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이타적인 삶, 좀 더 내어주는 삶, 좀 더 인내하며 함께 가는 삶을 살도록 청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보다 큰 기도, 보다 성숙한 기도, 보다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덤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수많은 작은 청들도 곁들여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10)
‘청하라’는 것은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자신이 아닌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찾는 일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르려라”는 것은 가슴으로, 곧 사랑으로 두드리라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과 몸(행동)과 가슴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일치와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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