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0월 4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10. 4. 06:00

2022 10 4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마르타야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가 10,38-42)

 

 Martha, Martha, you are anxious 
and worried about many things. 
There is need of only one thing. 
Mary has chosen the better par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자신 안에 계시해 주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때문에 커다란 트라우마를 안고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이니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줄 것 같지만, ‘너를 잘 알고 있다’라는 단정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 부모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트라우마로 힘든 삶을 살았던 아주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독특한 그의 그림에 세상은 ‘창조적’이라고 했지만, 그의 부모는 이 그림을 보면서 고흐가 ‘미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라면서 화를 내곤 했다고 합니다.

만약 고흐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어여쁜 그림, 그리고 사실적이고 바람직한 그림만 그렸다면 어떠했을까요? 부모에게 인정받고 특별한 사랑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흐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는 작품보다 자신이 생각했던 궁극의 아름다움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을 찌르는 듯한 ‘해바라기’가 탄생했고, 마음속의 불꽃놀이를 떠올리게 하는 ‘별이 빛나는 밤에’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부모 자녀 간의 간격이 세상에서 가장 먼 사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그런데, 나의 이웃들과는 어떨까요? 나의 편견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또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관계도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가장 먼 사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분주하게 예수님 시중을 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마르타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주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마리아처럼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집중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라면서, 자기의 방법만 맞는 것으로 주님께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고 하십니다. 마리아의 선택만 옳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법이 다 틀리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지요.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방법도 틀리지 않다는 원칙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다양한 길을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생텍쥐페리).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그것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gMJQFNbdaY

디저트 브랜드 라라브레드의 ‘강호동’ 대표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15년 동안 기초생활 수급자였고 학력은 중졸입니다. 그리고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혈우병을 치료하기 위해 한 달에 150만 원이 필요했지만, 어머니는 분식집 일로 90만 원밖에 벌어오시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도 “너 혈우병 있다며? 1년 동안 가만히 있어”, 친구들도 “넌 우리랑 다른 괴물이야”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이끌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죽을 생각만 했습니다. 

  

    그를 절망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나의 앞길을 밝혀줄 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인생에서 『헬렌 켈러』라는 책을 읽은 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길은 책에 있다라는 생각으로 2,000권의 책을 더 읽고 100억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17세 되었을 때 정주영 회장의 책을 읽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집에서 소를 판 돈을 훔쳐서 서울로 상경한 이야기를 읽고는 그도 집에 있는 돈을 훔쳐서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재혼하였지만, 이복형제들이 매일 구타하여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일할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노숙 생활을 하며 접시를 닦아야 했습니다.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모으면서도 책을 읽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으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해. 그냥 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야!”라며 길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강 대표는 8년 동안 1억 이상을 모은 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호프집을 열었습니다. 물론 잘 안되었습니다. 아무리 전단을 뿌려도 안 되었습니다. 그는 또 책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당시 인터넷 블로그가 활성화될 때라 그것을 통해 홍보하기로 한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 홍보 방법을 터득하고 이웃 가게를 먼저 무료로 홍보해주고 거기서 생긴 비법으로 그는 직원이 20명이 넘는 홍보회사를 만듭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사업이 잘되어갈 때 아내와 함께 홍콩에서 먹었던 에그타르트 맛이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역시 책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당시 디저트 사업이 매년 25%씩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디저트 사업에 투자하였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기는 것 같아서 자신이 건물을 사들여 그곳에 자기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러자 부동산 수입이 더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책에서 길을 찾은 덕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책이 아니면 나는 성공 못하고 가난은 평생 대물림되고 죽거나, 결혼도 못 하고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호동 대표는 누구에게도 자기 앞길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일하기 바쁘셨고 선생님은 환자 취급했고 친구들은 괴물 취급하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그에게 길을 알려준 것은 책입니다. 그는 책에서 주는 영감으로 움직였습니다. 만약 그전에 움직였다면 어땠을까요? 실패만 계속 연속으로 거듭하다 안 좋은 결과를 맞았을 것입니다. 

  

    책은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보고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나쁘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책 속에서 영감을 받는다면 그 길이 대부분은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습니다. 이것이 겸손함입니다.  

 

    우리 앞길을 밝혀주는 책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성체로 우리 안에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길을 알려주려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갈 곳을 모르면서도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모습으로 마르타가 나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지 않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십니다. 자기 집을 봉헌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체를 영하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응답이 없으면 긍정으로 보아야 할까요? 어떤 종이 그렇게 행동할까요? 종은 주인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주인 없는 집이 되어 강도들에게 약탈당하고 맙니다.  

 

    1사무 13,1-14에 ‘사울의 제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 필리스티아 군대를 건듭니다. 그래서 필리스티아 군대가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사울 앞으로 옵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자신이 7일 내로 와서 제사를 지내고 주님의 뜻을 묻겠다고 전갈을 보냅니다. 하지만 사울의 군사들은 적수가 되지 않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에 떱니다. 바위 뒤에 숨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심지어 탈영하는 군사까지 생깁니다. 마지막 일곱째 날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지내고 하느님의 뜻을 묻습니다. 제사가 끝났을 때 사무엘이 옵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주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른 이에게 왕권을 주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사울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줄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응답이 없다면 그냥 있어야 합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아무것도 안 해야 합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주님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는지. 끝까지 참고 주님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주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이 좋은 사례가 판관기 6장에 나옵니다. 바로 기드온 판관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미디안 압제로부터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믿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시험합니다.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게 해 달라고 하고 다른 날은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온에게 하느님은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어차피 하느님 뜻은 아주 명확하게 오는 일은 거의 드뭅니다. 어떤 확신이 오면 행동해야 합니다. 다만 그 확신이 찰 때까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필요한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가 있었습니다. 차라리 자녀를 낳아 신학교에 보내겠다고 말씀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원한다!”

어쩔 수 없이 본당 신부님께 사제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빨리 예비신학생에 등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가 5월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적어도 1년은 예비신학생을 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확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뜻에 주님 목소리를 묻히게 하지 맙시다. 마리아처럼 항상 듣는 마음으로 내 안에 계신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복음의 기쁨으로 선교하기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Dwm_S3Ss9g

 -조재형신부-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신학생 때입니다본당 신부님께서는 방학이 되어 본당으로 돌아오면 신학생들에게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동창 신학생에게는 성당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하였고첫영성체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제게는 주일학교 여름행사를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저는 답사를 다녀왔고여름행사에 함께 했습니다처음에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여름에도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귀여운 초등학생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저는 땀을 흘리면서 산을 오르기도 했고캠프파이어를 위해서 장작을 쌓기도 했고텐트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나중에 생각하니 저와 동창 신학생의 성격을 아셨던 본당 신부님의 배려였습니다저는 활동적이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본당 여름행사를 도와주도록 배려하셨습니다동창 신학생은 과묵하고술도 잘 마시지 않고차분하기 때문에 사무실 업무를 맡겨 주셨습니다제가 사무실 업무를 맡았다면 저는 실수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동창 신학생이 여름행사를 도와주었다면 저보다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고서 저는 주로 강북에서만 지냈습니다중곡동용산세검정제기동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이 많았던 본당이었습니다강남 본당에서 지내는 동창 신부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보좌신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돼서 간 곳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성 성당이었습니다당시에는 의정부교구가 분할되기 전이었기에 경기도 지역의 본당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처음 부임해서 미사를 봉헌 할 때는 신자들이 5명 나왔습니다주일에도 100여명이 나왔습니다헌금도 300,000원 정도 나왔습니다서울의 본당에서 사목하는 동창신부들과는 사목의 환경이 많이 달랐습니다그러나 제가 있던 적성 성당에는 서울의 본당에는 없던 것들이 있었습니다조금만 나가면 임진강이 있었습니다농사를 짓는 교우들은 싱싱하고 신선한 농산물을 가져왔습니다양계장목장인삼밭이 있었습니다임진강의 매운탕도 쉽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지만 저는 그래도 100명이 넘는 신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저는 적성 성당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돌아보면 감사했던 시간들입니다.

 

시골의 맑은 공기신선한 먹거리가족과 같은 본당 공동체는 저의 건강을 위한 삼위일체였습니다혈압이 있었지만 그곳에 있으면서 혈압도 정상이 되었습니다도시에서는 하기 힘든 일들도 재미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도시본당에서 여름 농촌 봉사활동을 오면 기꺼이 성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마당이 넓었기 때문입니다전신자가 매년 가족 수련회를 다녔습니다그래도 버스 2대면 충분했습니다농산물 직거래도 했었고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31년 사제생활 중에 가장 보람 있고행복했던 시간입니다주교님께서는 저의 건강과 성격을 배려해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보내셨습니다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닙니다어떻게 사느냐 입니다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로 하느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지금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했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남의 떡은 단지 커 보일 뿐입니다마르타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불평하기 보다는지금 내가 하는 일에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크고 맛있는 떡이 될 것입니다구상 시인의 꽃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굴레에서 벗어났을 때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프란치스코의 그 가난, 그 겸손, 그 단순함의 영성이 교회를 살릴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은 작고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을 더욱 애지중지하신다는 진리라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오직 작음과 가난과 겸손만은 찾았던 프란치스코였습니다. 한평생 가난한 자, 작은 자, 겸손한 자가 되기 위해 그리도 기를 썼던 프란치스코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후배 프란치스칸들이 모두 순례자, 여행자, 다시 말해서 노숙인처럼 생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정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순례자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프란치스코였기에, 추종자들이 고정적인 거주지를 소유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형제들을 위해 지은 성당이나 초라한 집이나 다른 건물들이 프란치스칸 회칙에 따라 거룩한 가난에 어울리지 않으면 형제들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항상 나그네나 순례자같이 거주하십시오.”

  

뿐만아니라 프란치스코는 자유로운 순례자의 길을 가로막는 가장 위험한 요소가 ‘돈’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하늘나라를 잃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지칭’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본인은...’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랫사람’, ‘보잘것없고 약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 등으로 자신을 칭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프란치스코였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금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생애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제2의 그리스도’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그 가난, 그 겸손, 그 단순함의 영성이 오늘 다시 한번 우리 교회를 쇄신시키는 지렛대가 되길 바랍니다. 복음적 가난으로 방향을 되돌리는 길만이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며, 교회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며, 구원되는 길임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명확히 인지하고 계셨기에, 교황명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 정하셨으며, 그가 선택한 노선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굳건히 추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신부-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변화입니다.

가난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인
성 프란치스코의
맑은 삶이 우리의
오늘을 비춰줍니다.

복음적 가난을
선택한 삶은
하느님과
이웃을 속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참된 회개는
가난을
가난은
정신을 만들며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기쁨을
보여줍니다.

가난은 온전한
생명이며
온전한 성장이
됩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가난의 삶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참된
행복입니다.

참된 가난은
양극단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모든 것과의
소통이었습니다.

소통은 생명의
참모습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깨우쳐줍니다.

삶의 질적인
변화는 마음의
참된
변화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자체에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소유가 아닌
사랑을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이
가난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가난은
계산할 것이 없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삶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가난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맛은
맑은 가난의 맛
청빈입니다.

오늘도
작은 빵으로
부유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가난이십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