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성녀가 선종한 뒤에 나온 그의 병상 저서들은 세계 각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그를 시성하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소화(小花)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루가 10,17-24)
“I give you praise,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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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고 욥이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오자,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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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주 산업의 경제 가치는 대단하다고 합니다. 2040년에는 1천조 원이 넘는 시장으로 성장하리라 예측합니다. 우리가 운전 때마다 쓰는 내비게이션, 인터넷, 위성 TV 등도 모두 우주 경제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경제 가치는 계속 늘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나라가 우주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 대한민국 소유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되었습니다. 개발에 투입된 비용이 31억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인공위성과 같은 쓸데없는 사업에 국비를 낭비한다는 질타가 심했습니다. 여기에 소비되는 국비로 수십만 명은 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말의 설득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주 산업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지금 우리나라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힙니다. 소위 IT라고 하는 것도 모두 우주 산업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기에 의미 운운하는 것이며,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남을 누르는 잘못된 힘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중요하다고 판단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 아니지요. 바로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귀환 보고를 통해, 제자들의 전교 활동은 주님의 지시를 따랐고 자기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귀들까지도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흥분하여 호들갑 떠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태도는 태연하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 말씀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귀를 이겨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진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실까요? 단순히 세상 안에서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누르면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말과 행동으로 알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라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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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를 사랑한 성녀 데레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E6dle-r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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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엄동화 선생님의 ‘진리 치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예전에는 사느냐 죽느냐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적자생존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생명체는 위기의 순간에 ‘호르몬’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런 호르몬은 순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켜 주기고 하고,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보존하고 보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먹고 먹히는 삶의 스트레스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욕망, 성공, 명예, 재물에 대한 스트레스를 늘 받고 살아갑니다.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호르몬은 우리의 몸을 지켜주지만 늘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의 몸에 나오는 호르몬은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원형탈모, 소화불량과 같은 증세는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마치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에 계엄령은 필요한 조치이지만 매일 계엄령 속에 산다면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발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방법에는 ‘반응과 감응’이 있습니다. 반응은 효과는 있겠지만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흔히 하는 말싸움은 ‘반응’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따르면 은총과 축복이 주어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면 심판과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도 ‘반응’을 강조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에 따는 처벌을 받습니다. 성과를 내고 이익을 내면 그에 따른 포상이 있습니다. 감정에 따른 반응은 때로는 큰 사고가 되기도 합니다. ‘홧김’에 큰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만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저도 ‘욱’하는 성격 때문에 큰 상처를 준적도 있었고,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반응’을 유보하거나 끊어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반응’을 하지 말고 ‘감응’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응의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응이 유리판에 물이 튀는 것과 같다면 감응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기며 감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땅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 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 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땅을 축복해 주셨고,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제1독서로 묵상하는 욥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신다 할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나는 알몸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알몸으로 간다 해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재물과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요즘 나의 삶이 즐겁지 않다면, 감사할 일이 없다면 내가 주어지는 시련에 감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내가 주어지는 삶에 감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많은 아픔이 있었고, 이른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지만 반응하는 삶이 아니라 감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수도원 밖을 나와 보지도 않았던 데레사 성녀를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감응하는 삶이 선교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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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으니 사랑받습니다!
-양승국신부-
운전 중에 작고 하얀 잡견 하룻강아지를 만났습니다.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서 뭔가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차를 멈추고 기다리고 있던 저는 안 되겠다 싶어 갓길에 차를 주차 시켰습니다. 녀석에게 다가갔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녀석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야! 너 이름은 모르지만, 여기 도로 한가운데서 이러고 있다가 큰일 난다. 앞으로 절대로 도로 한가운데로 나오면 안 된다. 알았지?”
그러면서 녀석을 덥석 품에 안고 걱정스런 눈빛의 어미 개에게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작고 귀여운 강아지, 눈에 쌍꺼풀까지 있는 강아지를 바라보면서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으니 사랑받는구나!’
아마도 이런 공식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분 품에 푹 잠기고 싶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작은 야생화처럼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요? 탄탄대로가 아니라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좁은 길의 성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입니다. 그녀의 삶이 마치 깊은 산속 외딴곳에 홀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작은 꽃 같다고 해서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불립니다.
언뜻 보기에 그녀의 생애는 성인(聖人)이 되기에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1873년에 태어나셨다가 1897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24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성덕을 쌓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그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 바라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짧디짧은 수도 생활의 연륜, 그것도 봉쇄수녀원 안에서, 그마저도 지병으로 골골하면서...도무지 대단한 뭔가를 해낼 조건이 아닌 그녀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웬걸, 데레사는 자신의 탁월한 봉헌 생활을 통해 나이와 연륜이 성덕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그녀를 그 어떤 성인보다 크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빛나는 성덕은 온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는 봉쇄 수녀회 수도자였던 그녀를 전 세계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겸손, 복음적 단순함,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 이 세 가지 요소는 결국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마치 사랑하는 연인(戀人)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녀가 하느님과 주고받은 대화 곧 기도는 마치도 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하는 연인들끼리 주고받은 연서(戀書)같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한 송이 작은 숨은 꽃이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개척한 성덕의 길은 ‘작은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작은 오솔길만을 걸었던 그녀를 구원의 빛나는 대로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리고 작디작은 그녀를 당신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꼭 안아주셨습니다. 숨은 것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녀 특유의 빛나는 작은 길을 온 세상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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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 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10,22)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10,22).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에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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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 21)
-한상우신부-
구절초 향기
그윽한 시월의
첫날입니다.
행복의 시작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작은 사랑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채워지는
사랑의
나날들입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우리의 생활이
감사를 통하여
가장 큰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떼어낼 수 없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통하여
무가치하다고
내버려진 것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을 통하여
새롭게 발견되는
작은 것의
기쁨입니다.
너무 큰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왔습니다.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면
새로운 찬미가 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기쁨이 됩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삶의 기쁨입니다.
삶의 기쁨은
매우 간단합니다.
선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의 생활을
기쁘게 나누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오늘이며
사랑의 기쁜
하루입니다.
좀더
사랑하기 위해
좀더
작아지는
사랑의 따뜻한
시선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우리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에
감사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은총입니다.
생활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은 것들이
모여 사랑을
이루는
생활의
찬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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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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