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루가 10,25-37)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이웃이냐는 물음에,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응답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평화방송을 시작하면서 더 바빠졌습니다. 여기에 외부 강의도 늘어나면서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시간 없어.”
글도 매일 써야 하고, 방송과 외부 강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 일도 그대로 해야 하기에 매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좀 쉬고 싶더군요. 바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원고 청탁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에 홍보실장으로 있을 때, 원고 청탁의 어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다짐했었습니다. 제게 원고 청탁하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일이 많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시간’ 때문에 하나씩 포기하게 되면, 결국 내게 남는 건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공허함밖에 없다.”(정김경숙)
시간 없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이 더 컸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주를 저 편한 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단함과 공허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간 때문에’라는 핑계 만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긍정적 마음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워낙 유명한 비유인데, 이 비유에서 세상의 시선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이지요. 사실 우리 사회의 관심은 범죄자 체포 여부가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강도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또 얼마나 잔인하게 강도질했는지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관심은 피해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은 범죄자를 처벌해서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사회를 옳게 이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 레위인은 민족의 거룩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네들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율법 준수가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진짜 이웃임을 강조하십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드는 가짜 이웃은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이웃으로서 선교하기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SnJs74iZ3g
-조재형신부-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알람이 저를 깨워줍니다. 똑똑한 스마트폰은 새벽 4시를 알려주고, 오늘의 날씨도 알려주고, 뉴스도 전해줍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알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른 새벽에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서에는 잠을 깨우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호숫가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배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셨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는 미사참례를 하고, 성체를 받아 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쩌면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흔들리곤 합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오늘도 제자들처럼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번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야파, 헤로데,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받으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두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오늘은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의 복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지금 강도당한 이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끔은 외로워서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삶의 길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을 줄까지 쳐가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회칙을 통해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보편형제애, 보편인류애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보편형제애는 내 것, 내 가족, 내 지역, 내 나라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는 하나로 묶여있는 존재이니만큼,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내 형제로 여기는 복음적 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제2장 ‘길 위의 이방인’에서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소개하시면서,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관대한 마음을 지닐 것을 요청하십니다.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신분이나 국적 등 그 무엇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 세상 방방곡곡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활짝 열린 마음을 지니신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신 말씀들,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소중하며 가슴을 크게 울립니다.
“우리 각자의 존재는 다른 이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통 앞에서 무관심한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삶의 길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고통을 접하고 분노하며 우리의 안락한 고립에서 벗어날 때까지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공경하고자 합니까? 그분께서 헐벗으셨을 때에 모른 척 하지 마십시오. 바깥에서는 그분께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받으시도록 내버려 두면서 성전 안에서는 그분을 비단옷으로 공경하지 마십시오. 역설적이게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때로는 신자들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사셨던 또 한 분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였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또 한 분을 더 소개하자면 제2의 아시시 프란치스코로 살아가고 계신 교황님이십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현신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설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눈을 감으면 하느님을 바라봤습니다. 눈을 뜨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바라봤습니다. 인간의 고통, 인간의 모순, 인간의 비참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었고, 그를 자기 등에 업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따라 조건 없는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을 한평생 실천했던 프란치스코의 삶이 오늘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지속시키는 일, 바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명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사랑으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루카 10,27)이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8;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루카 10,36)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을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는데, 저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의 열차에 앉아 길을 피해 달아납니다.
강도 맞은 이를 여관으로 옮겨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부끄러움의 고개를 숙입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주님!
제 안에 사랑을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용기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제 안에, 기꺼이 손해 보는 자유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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