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0월 2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Margaret K 2022. 10. 2. 06:16

2022 10 2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그때에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5-10)

 

The apostles said to the Lord,

"Increase our faith." 
The Lord replied,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ould say to this mulberry tree,
'Be uprooted and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불의와 재난을 보아야 하냐고 하바쿡 예언자가 하소연하자,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한다(제2독서).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고 해도 복종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자매님께서 성당 교우분으로부터 “** 자매와 사이가 좋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관계도 아니었지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니, 지난번에 모임이 있었는데 안 좋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서 계속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특별한 만남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신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며칠 뒤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서먹했지만, 이대로는 계속 불편할 것 같아서 상대편 자매님께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상대편 자매님은 깜짝 놀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화하면서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불편한 마음은 빨리 해소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끌어도 풀리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빨리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편하고 기쁜 관계가 되도록 불편한 마음은 얼른 풀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주인과 종의 관계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수고했다. 어서 식탁에 앉아 밥부터 먹어라.”라고 말할 것 같은데,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라고 명령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자연스러운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그래도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이신데, 왜 이런 말씀을 비유로 매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온종일 일했다고 해도, 종에게 일의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인이신 주님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왜 보답해주지 않으시냐는 식으로 불평합니다. 주님과 불편한 관계를 계속 만듭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을 우리의 공로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무슨 선행을 했다고 해서 하느님께 그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역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1독서의 하바꾹 예언서가 말하는 성실함이었고, 성실한 사람이 의인으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대단한 일을 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었습니다.
타인과 당신의 삶을 비교하지 마라. 해와 달은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시간에 빛을 비춘다(호다 코트비).

 고통 극복의 열쇠: "나는 누구인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BggqjitqGn0 

 전에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욕을 하는 아이들이 욕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욕을 하는 대가로 많은 돈을 주다가 점점 돈을 줄여가니까 아이들이 그 적은 돈을 받으며 욕을 하지는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보상을 붙이면 보상이 작아짐에 따라 그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삶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에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이 고통을 넘어설 보상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힘차게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한다면 무엇을 주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갓피플’이란 채널에 한창수 목사가 ‘고난을 절대 해석하지 마세요’란 제목으로 자기 삶에 비추어 고난 극복법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한창수 목사의 어머니는 한 목사를 출산한 직후 치료 불가 상태의 암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랜 투병 끝에 모르핀 중독으로 인한 쇼크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간다는 명목으로 삼 남매를 두고 사라졌습니다. 형은 공부를 핑계로, 누나는 시집을 핑계로 도망갔습니다.

  

    한 목사가 살았던 동네는 조폭들의 본거지인 대구 향촌동이었습니다. 버림받고 가난했던 소년이 가졌던 세상에 대한 분노는 그를 뒷골목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년이 조폭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이 당연한 절차처럼 여겨지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에 의해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교회에 나오면 필통을 준다는 것에 혹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면 똑같이 내 아들이라며 창수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따듯한 밥을 얻어먹고 틈틈이 용돈도 받았습니다. 

  

    한 목사는 난생처음 받아보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위험한 동네에서 온 소년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한 목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권사님이 마태오 복음 6장을 읽어주었습니다. 6장 30절을 읽을 때였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부분이 갑작스레 한 목사의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버림받은 줄로만 알았던 소년은 자신의 인생을 돌보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벅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한 목사에게 있던 어둠이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교실에서 자며 신문 배달, 붕어빵 장사, 방범대원 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렇지만 한 목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 목사는 이상하리만치 행복했습니다. 비참한 환경이나 처절한 생활은 결코 한 목사에게 있는 빛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으로 뜨거워진 고등학생이 된 한 목사는 친구들과 길거리 찬양을 하며 뜨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한 목사의 친구들은 새벽에 일어나 그의 신문 배달을 도와주었고, 친구들의 어머니는 그의 도시락을 틈틈이 챙겨주시며 그의 어머니가 되어주셨습니다. 그 친구 중 한 명은 후에 한 목사의 아내가 되었고, 친구들 대부분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소년 역시 목사가 되어 뜨겁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고난은 내가 해석하고 보상을 준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하고 중독됩니다. 먼저 우리가 왜 고통스러워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안다면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내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알면 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목적은 바로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 (2007)에서 보면 윌 스미스는 지구상에 퍼진 치명적 바이러스로 좀비들 속에서 자신 혼자 남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줄 유일한 존재는 개 한 마리입니다. 이 개는 이미 죽은 가족과 함께 키우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입니다. 하지만 좀비들에게 개까지 죽게 되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다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는 생존자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싸웁니다. 

     

    결국 고통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힘은 내가 속하고자 하는 공동체가 주는 정체성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에 대해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믿음이란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듯이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만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겸손한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종은 온종일 일하고 주인의 저녁상까지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라 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

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만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 일. 이것이 우리가 믿음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저 사람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조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이 생겨 나쁜 생각을 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주시는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좋은 분일 수밖에 없음을 믿게 됩니다. 

  

    미국 L.A. 올리픽 때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중국 다이빙이 전 세계에서 가장 기량이 높은 수준으로 장기 집권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자들이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어떻게 그런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선수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선수가 처음에는 100미터 육상선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항상 이 선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육상을 매우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자주 넘어졌고 자주 풀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다. 네가 달리는 것만 봐도 좋다. 네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서 뛰는 것을 보면 엄마는 너무 기뻐. 1등 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아름다운 일이야.”

    늘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엄마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었습니다. 다이빙대에 설 때마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엄마가 떠오르고 그러면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 속하기 위해 이 선수는 모든 고통을 감내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는 보상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공동체는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가 천국이 됩니다. 

  

    사람이 소속감에 집착하는 이유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는 대상은 공동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주는 공동체를 위해 목숨도 바칩니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질문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만 해결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무슨 고통이든 감내합니다. 

  

    몸의 세포가 몸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의 보상은 무엇일까요? 바로 위면 위, 피부면 피부, 뇌면 뇌 일부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속하지 않으면 암세포이든가 때가 됩니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정체성을 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 자체가 바로 누군가가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드는 보상입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의 수준만큼 고통을 극복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은 내가 속하려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 공동체가 주는 정체성에 관한 믿음. 이것이 내가 어디까지 고통을 이겨내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과연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이겨낼 믿음을 주고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그 공동체는 이미 천국일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4jjiNDOvCI

 -조재형신부-

 

교구에서는 저를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로 파견하였습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신문을 통해서 미주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신문사를 운영하는 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미주지역의 한인성당을 다니면서 신문홍보를 하는 것입니다그동안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신문홍보를 거의 다니지 못하였습니다오늘은 서부에 있는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왔습니다제가 있는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데는 비행기로 6시간 걸리고시차도 3시간이 있습니다저는 2022년에 동부에서 서부로 5번째 왔습니다북미주 파견 사제 모임엠이 모임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이 있어서 LA엘 다녀왔습니다서품 31주년 동창 모임으로 타코마에 왔었고오늘은 신문 홍보 때문에 타코마엘 왔습니다주님의 도우심으로여러분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신문홍보가 잘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오늘도 신문 구독자가 많으면 좋겠습니다뉴욕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우면 좋겠습니다.

 

후배신부님이 모금강론을 다닐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성당을 신축하면서 교우들만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생겼다고 합니다그래서 큰 성당으로 모금강론을 다녔다고 합니다예전에 보좌신부로 있었던 본당으로 모금강론을 갔을 때라고 합니다강론을 준비했지만 2%로 부족했다고 합니다그래서 강론 중에 이렇게 이야기를 더했다고 합니다. “저는 10년 전에 이곳 성당에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그때의 봉사자들은 모두 다 있는데 저만 성당을 떠났고이렇게 모금 강론을 왔습니다마치 시집간 딸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친정집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그렇게 이야기하고 강론을 마쳤는데 많은 분들이 모금 강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어떤 분들은 목걸이와 반지까지 기꺼이 내 주었다고 합니다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멋진 강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간절함과 절실함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곳 타코마 성당으로 신문 홍보를 오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습니다타코마 한인 성당의 본당 신부님이 저와는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같은 서울교구 소속입니다일단 교구만 같아도 마치 가족처럼 든든합니다같은 서울교구인데 1982년도에 신학교에 함께 입학한 동창입니다같은 교구이면서 31년 동안 함께 사제생활을 한 동창이니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같은 교구이고 동창이면서 어린 시절 같은 성당에서 주일학교를 다녔습니다초등학교 때는 6학년 3반으로 같은 반이었습니다같은 교구서품 동창같은 본당초등학교 동창이니 이보다 더 큰 인연은 없을 것입니다시집간 딸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친정집에 와서 도움을 청하는 그런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제가 이곳 타코마로 오는 발걸음은 다른 본당으로 홍보 갈 때보다는 훨씬 가벼웠습니다목걸이와 반지는 아니더라도 부디 많은 분들이 신문구독과 후원금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성서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치 주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꼈습니다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그것은 오고야 만다지체하지 않는다보라뻔뻔스러운 자를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제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도움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제가 열심히 신문홍보를 다니면 주님께서는 신문을 복음의 도구로 써주시리라 믿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제가 하는 일은 저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주님께서 분부하신 일입니다그러기에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잘난 척하거나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증언하며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신문 홍보를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오히려 주님을 증언하며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오늘 이렇게 신문홍보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본당신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아울러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의 모든 교우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저와 저희 직원들은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가을이 익어갑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여물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에 대한 예언자 하바쿡의 하소연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곧 정해진 때는 늦어지는 듯해도 오고야 말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말합니다.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하바 1,4)

 

여기서 ‘성실함’으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성실함, 확고함, 믿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바꾹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로마 1,17)라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곧 믿음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2티모 1,14)

 

오늘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그런데 참으로 당혹스럽습니다.

믿음을 더해주기를 청하는 제자들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꾸짖고 질책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왜 그러실까요?

제자들이 더 믿고 싶어 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왜 제자들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책을 하실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이 청원의 배경에는 그들의 그릇된 믿음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그들은 믿음을 마치 규모나 양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 크고 더 많은 것으로 더하여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 진정한 믿음인지를 보십니다.

곧 믿음의 질적인 확실성과 순수성을 보십니다.

 

그래서 비록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순수하고 확고하면 그 믿음의 권능이 드러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믿음’을 이룰 수 있는 능력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믿는 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은 전능함이요 불신은 무능임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인이 나았을 때에도 “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8,48)라고 하시고, 예리고의 눈먼 이의 치유 장면에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고 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 없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는 이 간청에는 그들이 이미 믿음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닌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 보라.

사실 너희에게는 믿음이 없다.

만약에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돌무화나무를 한마디 말로 옮겨 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곧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믿음이 이미 있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많느냐 적느냐, 크냐 작느냐 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그 믿음이 올바른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종에 비유하여 겸손으로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종이 주인의 분부대로 다 하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듯이, 제자들이 당신의 분부를 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다 수행했다고 해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겸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늘 그분 앞에서 겸손합니다.

겸손한 섬김은 믿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

-한상우신부-


믿음의
나날들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한 고개를
넘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믿음은
생명의 올바른
방향성입니다.

믿음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향합니다.

생활에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인
질서이며
뿌리입니다.

믿음을 되찾는
여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믿음이
맺는 삶의
열매입니다.

새로운 삶을
열어놓는
믿음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열어주십니다.

믿음의 부활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믿음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우리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예수님께서
올바른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는
믿음입니다.

다시 제가
져야 할
십자가도
믿음이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간절한
기도도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믿음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은총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믿음의 길이
가장 좋은
생명의 길임을
믿고 실천합니다.

믿음의 실천은
겸손입니다.

삶의 자세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는
믿음입니다.

은총가득한
주일되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