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루가 11,1-4)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을 만나고,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사린 케파의 위선을 꾸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대도 안 맞고 이길 수 없다.”
이 명언처럼 우리는 안 맞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삽니다. 아무런 고통과 시련 없이 편하고 쉬운 삶만 반복해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구 선수가 3할 타자만 되어도 최고의 타자 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30%의 성공, 70%의 실패를 말합니다. 분명히 실패가 더 많습니다. 그래도 30%의 성공만으로도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축구에서도 그렇습니다. 골키퍼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그런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명 골키퍼가 되려면 많은 골을 내주면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는 사람은 한 대도 안 맞고 이기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 착각 속에 사는 사람, 헛꿈 켜는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준 명언을 제가 어디서 읽었을까요? 놀라운 진리가 적혀 있는 곳은 다른 곳도 아닌 화장실 안이었습니다. 바로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붙어있는 명언이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진리는 내 삶 너머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 삶 안에서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특별한 곳에서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그때 가르쳐주신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물었던 이유는 당시에 많은 유다인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기도를 바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회당에서 18개의 축복기도를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당이 아닌 곳에서는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화를 반드시 회당에서만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즉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가까운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18개의 축복기도처럼 길지 않습니다. 꼭 성당에서만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함께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충분히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교의 첫 걸음, 기도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go0urpDh4PQ
-조재형신부-
중국의 통일을 이룬 최초의 황제는 ‘진시황제’입니다. 진시황제는 능력이 있다면, 재능이 있다면 나라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간첩’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진나라의 대신들은 이를 기회로 외국에서 온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라고 상소를 냈습니다. 진시황제는 신하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나가라는 법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진시황제의 책사였던 이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상소를 냈습니다. 상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넓은 바다는 강물을 가려서 받지 않습니다. 태산은 흙을 가려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넓은 바다는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여야 비로소 바다가 됩니다. 태산은 모든 흙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태산이 되는 겁니다.” 진시황제는 책사 이사의 상소를 받아들였고, 외국에서 온 사람은 모두 나가야 한다는 법령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나의 종교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를 배척한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는 시작은 달랐겠지만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에서 서로 석물리는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유대교는 바빌로니아 유배시대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신학과 제도는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제도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불교는 인도의 힌두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중국의 사상과 철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고,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제도를 수용했으며 이슬람 특유의 신정일치의 제도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들 종교들은 모두가 우물 밖으로 나왔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우물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에 머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메마른 대지에 골고루 내리듯이, 햇빛은 그늘진 곳에 골고루 비추듯이 복음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에게 골고루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나만의 종교에서 벗어나 이웃한 종교와 화합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욕심과 나의 뜻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는 길을 오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도’의 삶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롭고 존귀한 선물, 주님의 기도
-양승국신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 힘겨워하던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 있으니,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손수 지어 제자들에게 건네신 기도이므로, 모든 기도의 기초요 으뜸이 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기도 관습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근처 이교도들로부터 유입된 기도의 풍경은 예수님 눈에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들의 기도는 길고 장황하고 요란했습니다. 그들이 바치는 기도에는 진심, 진정성, 마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의무적, 습관적인 기도만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기도를 보신 예수님께서 기도 중의 기도, 기도의 진수(眞髓), 당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짧은 기도지만 신앙생활의 엑기스만 모은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가르침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매일 미사 영성체 예식 직전에, 아침저녁 기도를 마무리할 무렵, 묵주기도를 바칠 때...너무 자주 바치다보니 습관화되고, 이 기도가 지닌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무 생각 없이 무한 반복해서는 안 되는 기도입니다. 보물 중의 보물과도 같은 기도인 만큼 조금 더 여유를 갖고, 그 맛을 음미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무엇보다도 지극한 존경심으로 바쳐야겠습니다. 또한 기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쳐보면 좋겠습니다.
언제 시간 날 때, 많이도 말고 30분 정도만 시간을 내서, 정말 천천히 한 구절 한 구절에 멈추고 머물면서, 기도의 내용과 자신의 삶이 잘 부합하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묵상해보실 것을 권장합니다. 그렇게 바칠 때 얻게 될 기쁨과 은총이 상당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 작고 미천한 제가 거룩한 당신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허락하신 하느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세대대 길이 찬미찬양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 지난 삶을 돌아보니 부끄럽게도 언제나 제 뜻만을 추구하고, 제 뜻만을 관철시키기 위해 발버둥쳐왔습니다. 이제 남은 날들은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뜻을 찾고, 아버지의 고귀한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아버지, 오늘 주신 양식은 저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저희에게 주신 것이니, 앞으로는 혼자서만 독식(獨食)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고 공유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용서만이 제가 살길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겠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예수님 추종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 돈이 최고 가치라는 유혹, 아버지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이영근신부-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루카 11,2)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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