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8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전승에 따르면, 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 출신이다.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하였던 그는 주님의 복음과 복음 선포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곧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다. 루카는 다른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성모 마리아를 최초로 그린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전승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루가 10,1-9)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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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다들 떠나고 루카만 함께 있다며 마르코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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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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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부님께서 어느 자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자매님은 눈물을 흘리며 남편이 자신에게 “넌 창녀야!”라고 했다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여쭈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당신에게 ‘넌 창녀야!’라는 말 대신 ‘넌 의자야!’라고 했다면 지금처럼 화가 나고 슬펐을까요?”
“물론 아니죠.”라고 자매님께서 대답하자, “왜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나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저는 의자가 아니니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창녀가 아닌데, 왜 남편 앞에서 힘들어하죠?”
진실이 아닌 말에 흔들리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나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말은 거짓이 담긴 말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에 굳이 힘들어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진실이 아닌 말과 행동에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진실과 늘 함께하는, 그래서 주님의 뜻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둘씩 짝지어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풍족하게 해서 보내지 않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힘든 곳에 보낸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서 보낼까요?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해서 보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한없이 부족하게 해서 보내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크게 흔들릴 것 같습니다. 불평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주님 말씀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불편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 그 자체이신 주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말과 행동에 계속해서 흔들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 흔들림 앞에서 주님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뜻에 무조건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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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루가를 위하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zZ_JKXya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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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운동을 마치고 미국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입니다. 한 형제님이 다음에는 본인이 밥을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밥을 사시겠다고요?’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미국인이 우리의 테이블로 왔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밥’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아들 이름도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한국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반갑다고 우리에게 맥주를 사주었습니다. 그 형제님이 밥을 산 것은 아니지만 밥 덕분에 맥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있습니다. 배는 운송수단인 배가 있습니다. 맛있게 먹는 배도 있습니다. 우리 몸의 중심에 있는 배도 있습니다. 신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는 신도 있습니다. 영어나 한국어는 표음문자이기에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적지만 중국어는 표의 문자이기에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의 의미를 몇 가지로 해석하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두려움과 걱정 속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풍랑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듣지 못하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죽은 소녀를 살려 주셨고,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먹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큰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에 이르는 형벌입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부활에 이르는 디딤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3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카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 성모님의 신앙, 성모님의 삶을 루카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지셨고, 성모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마리아의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나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닮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 자캐오의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루카가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도 다 좋지만, 오늘은 ‘엠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년 부활이 지나면 본당에서 ‘엠마오’ 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순과 부활을 준비하면서 힘들었을 본당 식구를 위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엠마오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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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성 루카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꾼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하늘에는 영광’을 그리고 ‘땅에는 평화’를 성취하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궈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 준 평화를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10,5)
주님!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소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신뢰를 두고, 먼저 평화를 빌게 하소서.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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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 20)
-한상우신부-
삶의 참모습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모두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가야할 길을
아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아름답게
떠나는 법을
배우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삶에 대한 태도나
생각들이
바뀌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육신이 마음을
죽이는 삶에서
물질이 정신을
조종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금 무엇을
내려놓으며
살고 있는 지를
반성합니다.
목숨의 주인이
우리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남들 위에
조금 더
올라서려는
이 서글픈 현실을
바라보시는
주님이십니다.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스스로
자기 착각에
갇혀 살지 않길
기도드립니다.
소유하는
재물이 우리의
인격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재물과 지위
명예까지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이 모든 것에
묶여있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길
기도드립니다.
빈 손
빈 마음으로
떠나는
생명의
순례자들임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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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님을 기록한다면-김찬선신부-
축일을 맞아 루카 복음사가의 삶을 묵상하다 보니
나라면 주님의 복음을 어떻게 쓸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마태오 사도처럼 복음을 쓰지는 않을 것이고,
루카 복음사가처럼 복음을 쓰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것은 죄인과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신 주님을
다른 어떤 복음사가보다 따듯한 시선으로 전하기 때문이지요.
한때 저는 곡을 썼고, 소설도 쓰려고 끄적거렸는데,
곡은 성가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졌고,
소설은 성서의 인물을 제 시각으로 그리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예를 들면,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이나 키레네의 시몬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 것인데, 당연히 주님과의 만남이랄까 인연을 중심으로
소설을 엮어나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서의 인물을 소설화하는 것은 생각해봤지만
주님의 생애를 루카 복음사가처럼 기록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전한다는 것은,
사실 예술적 호기심이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영적인 사랑에서 비롯되고, 영적인 사랑으로만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베드로 사도나 사도들이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쓸 수도 있었고, 그들이 쓰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들이 쓰지 않을 것을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심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얘기했잖습니까?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아무튼,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의 생애를 기록할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추종자들인 사도들의 활약인 사도행전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제자들의 활약을 자기가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은 자기 안에서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이어지는 것이지만,
기록은 세상에 남기는 것이요, 자기 사후에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잊혀서도 안 되겠지만
사람들에게 잊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을 기록한 것은
주님뿐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만 아니라 사람들도 자기가 알고 있는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직접 들은 사람들 뿐 아니라
먼 곳에서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려는 거였으니
그는 먼 곳에 있는 사람도 사랑한 것이고, 지금의 우리까지 사랑한 셈입니다.
저도 같은 지향으로 복음 나눔이란 형식으로 많은 글을 쓰고 있고,
그래서 지구 저편에서도 제 글을 읽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책으로 내면 좋지 않겠냐는 말도 종종 듣는데
그때마다 저는 계면쩍은 일이라 그럴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길이 남을 만큼 훌륭한 기록과 글이라면
내가 남기지 않아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지녀야 할 것은 루카 복음사가처럼
주님을 진정 사랑하여 주님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과,
많은 사람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여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겠습니다.
내일 모레부터 삼일 간 저희 <여기 선교 협동조합>이 바자회를 합니다.
이번 바자회는 이주민과 취약 계층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마련이 목적입니다.
이 장학회는 한 분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야학을 했는데 그때 제자 가운데 하나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며
제가 하는 좋은 일에 써 달라고 성금을 하였습니다.
저는 제자의 이런 사랑을 한번에 써버리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의 좋은 뜻이 씨앗이 되어 더 확장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희 <여기 선교 협동조합>에서 돈을 보태고,
이번 바자회에서 이 사업을 더 알리고 기금도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바자회에 많이 들러주시고,
멀리 계셔서 오시지 못하더라도 기도로 함께해주시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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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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