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가 12,49-53)
Do you think that I have come
to establish peace on the earth?
No, I tell you, but rather divis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시며,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하루에 14시간씩 공부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자네는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 계발을 하다 보면 뭐든 될 수 있겠죠.”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도 없다.’
어떤 목표 없이 그냥 무작정 공부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공부하는 내용과 자기 계발의 방향이 제대로 설 수 있게 됩니다. 막연하게 아무거나 공부한다는 것만큼 무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열심히 중국어 공부를 했는데 일본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떨까요? ‘일본어 필수’인데, 이제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다면서 계속 중국어만 공부하겠습니까?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 편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준비는 스스로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 없이 사는 우리는 아닐까요? 잘못된 목표를 세워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 힘든 것은 아닐까요?
구원은 편하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고난의 시대가 오고 그 시대를 겪어낸 다음 구원이 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물었을 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고통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내가 너에게 고통을 줄 거야.”라고 말하면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아닌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악을 철저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악과 함께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 안에서 평화가 아닌 분열이 가져올 수밖에 없고,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대충대충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소극적인 사랑도 있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Avmyro6TTg
어느 아담한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어난 이야깁니다. 그 가게엔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가게 사장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클래식을 사랑하는 아주 멋진 청년입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가게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옵니다. 물론 아가씨의 목적은 레코드가 아닌 청년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찾으시는 판이라도…?”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아가씨의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옵니다.
“이 판 얼마예요?”
“5달럽니다”
아무 말도 못 한 체 레코드판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레코드판만 사고 문을 나섭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가씨의 사랑은 깊어만 가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 가족도 없이 혼자 살던 아가씨는 유일한 친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장례를 치르고 아가씨의 집을 정리하던 친구는 굳게 닫힌 작은 방문을 열게 됩니다. 이 방엔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곳엔 포장도 뜯지 않은 레코드판 수백 장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 왜? 아가씨는 레코드판을 뜯어보지도 않고 쌓아만 뒀을까요? 안타깝게도 아가씨에겐 전축이 없었습니다. 단지 청년을 보기 위해 레코드판을 사러 갔기 때문입니다.
‘얘는 듣지도 않는 레코드판을 왜 이렇게 사 모은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는 무심결에 포장을 뜯어봅니다. 그 속에서 쪽지 하나가 떨어집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p.s. 제 이름은 존이라고 합니다.”
친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다른 판을 뜯어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8시 가게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오늘 안 나오시면 내일 그리고 모레 언제까지고 기다릴 겁니다.”
이렇게 모든 판에 존이 쓴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친구는 존이라는 청년을 찾아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년은 이야기를 듣고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사랑한 것이 맞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가로놓여 남자는 3년 동안 반응이 없는 노력만 했고, 여자는 말도 못 하고 기대도 못 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수줍음은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모습입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용당하고 버려지기 싫으면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을 받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소극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매우 적극적인 분이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에게 먼저 방문하셨습니다. 사랑은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적극적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은 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불은 붙이지 않으면 꺼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불이 붙지 않은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세상과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않으려면 붙여야만 하기에 사랑이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다가가는 사랑만이 사랑일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세상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적극적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불을 붙이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적극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들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먼저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 믿는 자신입니다. 자신이 내향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건너기 무서워도 자꾸 건너다보면 안 무너진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외향적인 경험을 하다 보면 자신이 외향적인 사람이라 믿어가고 그러면 진짜 외향적인 사람이 됩니다.
부탁하면 상대방이 불편해할까 봐, 무시할까 봐 주저하는 사람, 거절당하는 상황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고 하는 간단한 일조차 어려운 사람 등 우리 주변에는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 『거절당하기 연습』의 저자 지아 장 또한 수줍음과 내성적인 성격으로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꿈이었던 사업을 시작하면서 더는 거절 때문에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거절당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거절을 수치스럽고 개인적인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한 번 더 시도해봤다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거절에 내성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는 훈련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100일 거절 프로젝트. 100일 동안 황당한 부탁을 해서 일부러 거절당하고 무뎌져 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도전을 통해 저자는 세상은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 훨씬 친절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다 내향적으로 시작합니다.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모든 동물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려면 외향적인 성격이 요구됩니다. 내가 외향적인 성격이 되더라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향적인 성격,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외향적인 성격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하는데 소극적이면서 사람들이 다가와 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사랑의 본성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입니다. 사람을 적극적으로 만듭니다. 내향적인 성격에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화됩니다. 외향적으로 되고 싶을 때는 언제든 외향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자아가 성령의 불로 타버려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이웃에게 사랑의 불을 옮겨붙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나에게서 나가 상대를 방문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불은 태우지 않으면 스스로 꺼집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1uTi1kb0ZzE
-조재형신부-
예전에는 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편지의 머리글이 유난히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봉사활동을 가서 만났던 학생입니다. 신학교에 있을 때도 가끔 편지를 보내주었고, 군대에 있을 때에도 위문편지를 보내주곤 했습니다. 정갈한 글씨의 편지를 읽을 때면 군 생활의 어려움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언제나 첫 문장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머리글입니다. 지금은 손 편지를 쓸 필요가 거의 없지만 가끔은 정성어린 손 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수도자가 되어서 사랑하는 마음을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전하는 수녀님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고인이 되신 어머니께서 제게 당부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를 삼가라고 하였습니다. 어른들에게 공손하라고 하였습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부족한 것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영성지도를 받았던 신학생들이 찾아 올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3가지 덕담을 해 주곤 했습니다. 늘 건강하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를 기원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분명 아플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지나 가는 것이니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지내기를 바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 한다면 이 세상의 시련과 고통을 겨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부침주(破釜沈舟)’라는 말이 있습니다. 항우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하고, 그 군대가 막 장하를 건넜을 때입니다. 항우는 갑자기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라고 명령을 내리고, 뒤이어 싣고 온 솥마저도 깨뜨려 버리고 주위의 집들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했습니다. 이제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마저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 말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을 구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파부침주와 사즉생 생즉사’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가정도, 이웃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도, 친구도, 이웃도 갈라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갈라서는 사람들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장애인인 자녀를,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른 척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욕망과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단체들이 있고, 세례를 받은 신앙 공동체이지만 때로 분열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이 ‘새롭게 부임하는 본당에서는 적어도 6개월은 그냥 지켜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6개월만 지켜보면 자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재물, 명예, 욕심’이 앞서면 가족이라 해도, 친구라 해도, 이웃이라 해도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아무리 성격이 달라도, 오랜 갈등이 있었다 해도, 원한과 미움이 가득했다 해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가가 중요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성체성사는 천국으로 가는 나의 고속도로입니다!
-양승국신부-
교회 안에서 점점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해봅니다.
방한 중인 벨기에 출신 윤루카 주교님 말씀에 따르면, 벨기에는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이런 현실을 겪었고, 현재진행형이랍니다.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교우들은 거의 대부분 70대 이상이랍니다. 참석자가 전무하므로 아예 평일 미사 자체가 사라지고 있답니다. 80 전후의 사제가 대여섯 군데 성당을 홀로 책임지고 있습니다.
마치 머지 않은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보는 듯 해서 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성세대가 거처하는 대륙과는 전혀 다른 대륙인 디지털 대륙, 온라인의 바다에 깊이 빠져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낡은 교회, 노령화된 사목자가 따라잡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암울한 시기라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냥 포기하고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처한 어려운 순간, 그 시기에 걸맞은 특별한 사람을 선물로 보내주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1991~2006)입니다.
카를로는 인터넷에 깊이 심취해 살아가던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체의 기적을 사랑했습니다. 겨우 열네 살 되던 무렵, 그는 성체 기적을 주된 콘텐츠로 하는 웹 사이트(www.miracolieucaristici.org)를 만들었고, 아직까지 유지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
카를로는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굳게 믿었습니다. 온라인 작업을 통해 자신의 성체성사에 대한 확고한 사랑을 드러냈고, 예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꼬마 시절부터 카를로는 남다른 성체 신심을 드러냈습니다. 일곱 살에 첫영성체를 했고, 열 두살부터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였으며,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또한 자주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조배를 하겠다고 주님께 약속드렸습니다.
그러한 약속으로 인해 카를로가 세상이나 친구들로부터 멀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래들과 함께 공부하고 축구 시합에 열중했습니다. 비디오 게임도 하고 색소폰도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따로 내서 정기적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작지만 친절을 베풀고 도와주었습니다. 옷과 음식도 나누어주며 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카를로는 백혈병으로 인해 2006년 10월 12일 열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병을 교회와 교황님을 위한 희생 제물로 여겼습니다.
카를로가 남긴 명언입니다. “성체성사는 천국으로 가는 나의 고속도로입니다.”
에페소 교회에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글 안에 카를로의 성화(聖化) 비결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소년 카를로 안에서 당신의 충만하심을 세상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으로 인해 카를로 역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작고 병약한 소년 카를로를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시고, 카를로 안에 머무시고 활동하심을 통해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영근신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세상이 거짓 평화에 물들어 있고, 그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분열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이요, 어둠으로부터 오는 분열이 아니라 빛으로부터 오는 분열입니다.
그렇습니다.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 1,2)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했던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자신들의 어둠이 들통 나는 것을 막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일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루카 12,50)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의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희에게 ‘피의 세례’를 베푸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과 ‘피의 세례’는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불로 어둠을 태우고 자신을 분열시켜야 하는 일이요,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진실 되게 마주하고, 거짓된 자신과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불안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말씀의 영’께서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하오니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이제는 제게서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가 중병에 걸린 까닭입니다.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평화를 누리려면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모두를 하나로 만듭니다.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분열을 거쳐 불순물을 제거하고 가슴과 가슴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원하는 것과 천상의 바람이 충돌하게 되고 마음의 분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하늘을 희망하기 때문에 고단한 과정을 감당하면서 쌓아 올립니다. 사랑은 끊이지 않는 길입니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분심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행복해지리라고 기대했는데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니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분심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집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번거로워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토마스 머튼). 사실 진정한 평화를 얻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평화는 단순히 외적인 안정상태와는 다릅니다. 죄악의 더러움을 깨끗이 태워버려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집안 식구라 하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평화를 찾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의 의견을 달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셈을 가려내어 거짓 평화를 무너뜨립니다. 결국, 각자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져야 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온 백성의 타락을 슬퍼하며 말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 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이제 그들에게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 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내 구원의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내 하느님께서 내 청을 들어주시리라”(미카7,1-7). 사실 하느님 평화 안에 머무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의 시대를 기대하는 만큼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하는 갈등의 시기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 하더라도 영혼이 세속이라는 습기에 젖어 들면 영혼의 불이 타오를 수 없습니다. 열정의 불이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평화를 구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의 평화를 깬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 평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고, 다른 사람의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있는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토마스머튼).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참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을 두려워 마십시오. 오히려 내 마음의 악을 떨쳐버리고 사랑함으로써 평화를 누리십시오. 예수님은 평화를 넘치도록 주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령과의 내통-김찬선신부-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에 의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방도로 우리 인간을 움직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그렇게 우리의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면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시고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삼아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령과 우리의 믿음의 합작 또는 합력인 셈인데
이렇게 합작하고 합력하면 최강일 것입니다.
그 사랑이 최강일 것입니다.
우리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될 것이기에 최강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쓰지 않기에 그렇게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이 노상 실패로 끝나기 일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되는 것, 곧 성령을 통하여 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내적 인간이 하느님의 힘으로 굳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내적 인간이란 허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내적 인간이 굳세어지는 것도 떡대가 크고 힘세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내면이 옹골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가 옹골차게 되는 데에
한몫을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 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우리 내면을 여는 또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이란, 말하자면, 논에 물꼬를 트고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꼬를 트면 그 물꼬가 비록 작아도 도랑의 물이 우리 논으로 콸콸 들어오듯
우리 믿음이 성령과 내통하면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으로 콸콸 들어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과의 내통이 믿음이고,
우리 믿음이 성령과 내통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뿌리내리게 되며 그리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초로 삼아 무엇이든 사랑으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면 우리가 그리 원하는 사랑을 실패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끝맺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끝맺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바자회를, 우리의 오래된 기도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성무일도 본기도에 있는 기도입니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희가 할 일을 일러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어,
오늘 모든 일을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시작한 것을 당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끝마치게 하소서.”
오늘 강론은 바자회 개막 미사 강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눔을 한 것에 대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합니다.
봉사자 특히 남자 봉사자의 도움을 청합니다.
아침 바자회를 열고 저녁 바자회를 닫을 때
힘쓸 남자 분, 한두 분이라도 계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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