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 13,31-35)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라며,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한다(제1독서). 헤로데가 죽이려 한다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며,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남들은 군대에 가면 고생해서 몸무게가 쫙 빠진다고 하는데, 저의 경우 신병교육대를 마치고서 10킬로 이상 살이 쪘습니다. 그래서 50킬로대의 몸무게가 거의 70킬로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게 군대 체질이 아니냐고 묻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밥 먹고 뒤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무조건 빨리, 또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있더군요. 똑같이 먹고 똑같이 생활하는데도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먹지 않아도 될까요? 먹어도 안 먹어도 체중의 변화가 없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화장실 가서 다 뺄 것이라면서 밥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어차피 옷이 더러워질 것이라며 빨래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차피 지저분해질 방이라면서 청소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어차피 화장실을 가도, 어차피 더러워져도, 또 지저분해지더라도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특히 이 해야 할 것을 규칙적으로 할 때, 화장실 가는 것도 또 빨래나 청소하는 것 역시 쉬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만 알아듣고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린다는 분이 계십니다. 이렇게 잘 잊어버리는데 성경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하십니다. 매일 화장실 간다고 밥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주님 말씀이 전혀 이해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쓸모없다며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더 규칙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읽고 새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 몇 사람이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으려고 합니다.”(루카 13,31)라고 말합니다. 바리사이는 늘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늘 불안에 싸여 있었습니다(루카 9,7-9). 그래서 이제 자기 영지 안에 어떤 소요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리사이를 부추긴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죽음의 때가 오지 않았고, 아직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그 모든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뜻이라면 세상의 위협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반대되는 모든 세력에 동참하고 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만을 바라보며 힘차게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인생은 나를 향한 누구의 믿음을 받아들이는 자에 달렸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A7-lJHK_-O0
복음화의 전략과 전술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eEiArArA3M
-조재형신부-
신문 홍보를 위해 출장을 다니면서 준비물을 챙기게 됩니다. 신분증, 핸드폰, 지갑, 옷, 상비약, 노트북, 책, 제의, 충전기, 구독신청서, 신문, 필기구를 준비합니다. 신분증은 비행기 탑승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핸드폰은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친구와 같습니다. 정보를 검색하고, 표를 예약하고, 송금도 하고,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갑은 필요한 것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옷과 상비약은 약방의 감초와 같습니다. 노트북은 강론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책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제의는 미사 때 필요합니다. 특히 저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서 저의 제의가 더 필요합니다. 구독신청서와 신문은 제가 출장을 가는 이유이기에 꼭 챙겨야 합니다. 출장을 다니면서 재미있는 경험과 뜻하지 않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연결고리가 있어서 아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가끔 비행기가 연착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경험이지만 종종 있습니다.
한번은 아침 7시 40분 비행기가 오후 6시 40분으로 연착된 적이 있습니다. 혹시 빠른 비행기가 있을지 몰라서 예정대로 공항으로 갔습니다. 다행히 오전 11시 40분 비행기가 있어서 4시간만 공항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항공사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쿠폰을 문자로 보내 주었습니다. 아쉬운 것은 맥주와 같은 주류는 안 되고 음식만 주문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깜빡하고 맥주를 시켰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공항에서 주어진 4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갑니다. 2시간은 산보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1시간은 강론을 준비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1시간은 책을 읽고, 쿠폰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서 집에도 늦게 도착하고, 일정이 차질되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날 수 있지만, 어차피 연착되었으니 시간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책도 읽고, 산보도 하고, 강론도 준비하니 ‘1석 3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돌아갈 비행기를 구하였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박해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준비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2000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준비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준비물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진리, 의로움,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이런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준비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권력 앞에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십자가를 남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외로움도, 고통도, 죽음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들 또한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주님 성령의 능력 없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단 몇 개월 만에 국격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도자로서의 덕성이나 품격은 둘째 치고, 이건 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나 상식을 찾아볼 수 없으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실망을 넘어 포기, 좌절을 넘어 회피가 정답인 이 시대, 바오로 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따라가 보니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십시오.
의로움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십시오.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갈등과 혼돈의 시대, 우리는 더 깨어있어야겠습니다.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 굳건히 현존하심을 의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매일 매일 사랑의 기적을 연출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몇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일들을 아무것도 아닌 듯 태연한 얼굴로 매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오실 때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안갯속 같았던 우리의 시야를 환하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만사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꽃이 피는 시절에도 기뻐하지만, 꽃이 지는 시절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에도 감사하지만, 노후된 중고차처럼 여기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감사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지만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를 큰마음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활동하실 때 인생사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
주님 성령의 능력이 없이
저는 아무런 기도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제 안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며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소서.
주님, 기다립니다.
주님, 고대합니다.
주님, 소망합니다.
언제나 하나 되게 하시고
따뜻이 위로하시는
주님의 영을 제게 주소서.
(하레사쿠 마사히데,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77가지 기도, 생활성서 참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에 직면하신 장면과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신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루카 13,31)
바리사이들의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예수님께 호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여행을 방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떠한 인간적 장애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관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루카 13,32)
(최초의 불교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라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소티세나 왕자와 왕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수행을 확실히 하십니다.
곧 당신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카 13,33)
'가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것을,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말씀은 그분의 뜻에 따라 당신의 삶을 완성하시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자진하여 당신의 길을 가심을 밝히십니다.
곧 담대하고 의연하고 결연한 의지로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실 것을 밝히십니다.
그것은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면서도 이루지 못했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어도 이루지 못했던, 그 죽음을 이제는 당신께서 스스로 이루시러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제시하고 있는 길은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었던 것입니다.
곧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는 길입니다.’ (에페 6,13-17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명수행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에페 6,13)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속 가야겠습니다.' (루카 13,3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루카 13,33)
주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가야할 길을 계속 가게 하소서.
자신이 죽어 타인을 살리는 길을!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평화의 복음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쥐고,
담대하게 가야 할 길을 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순종의 길을 가게 하시고, 당신이 하고자 하신 바를 이루소서.
당신 안에서 제 삶이 완성되게 하소서.
아멘.
「한 마리 여우」
-반영억신부-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기에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카 9,7이하).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견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간교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랍비문학에서 여우는 간교함의 상징입니다.
어째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카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시련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포기에 직면하게 될 때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나를 연장으로 삼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가야 할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지라도 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13,34).하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계시냐? 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이요,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은 아닌지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 33)
-한상우신부-
엄청난
하느님의 계획을
만납니다.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삶이 다름아닌
예루살렘임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구원의 여정을
충실하게
걸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실행에 옮기시는
예수님을 통해
길을 찾아
열실히 걸어가는
많은 신앙인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만남이
됩니다.
삶의 소중한 가치는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한 내용의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임의 삶을
온 몸으로
보여주십니다.
갈릴래아도
예루살렘도
모두 스승으로
다가옵니다.
필요한 것은
포용의
마음입니다.
사랑과 인내가
필요한 길입니다.
포용과 설득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십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여정을
받아들이십니다.
목숨을 건
구원의 여정에서
사랑의 열정을
만납니다.
복음도 열정이며
십자가도
열정입니다.
구원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행복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열정을
불태우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열정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열정의 시작이
십자가이며
용기임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청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0주 목요일-정신 무장, 성령 무장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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