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Margaret K 2022. 10. 28. 06:17

2022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의 유다 서간 저자인 유다 사도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로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went up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whom he also named Apostl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퉁잇돌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열둘을 뽑으시고 사도라고 부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형제님이 군대에 입대해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편지였습니다. 마음에 들던 여자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입대했는데, 여자 친구가 편지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해서 보낸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편지를 어떻게 읽었을까요?


1) 대충 읽는다.

2)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는다.

3) 안 읽는다.

당연히 정답은 2번입니다. 단어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읽으면서 ‘이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쓴 것일까?’라는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읽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 편지이기에 그 안에 써진 단어 하나도 소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보낸 ‘러브레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꼼꼼하게 성경을 읽고 있었을까요? 대충 읽거나, 전혀 읽지 않으면서도 과연 하느님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내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말합니다. 이는 시대의 차이, 삶의 자리에서 오는 차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내용을 현재로 이끌어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 공부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성경 읽는 자기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12사도를 뽑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는 매우 중요한 일이 있을 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제자들에게 사도직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2사도의 사도직 수여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2명을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면서 앞으로의 하느님 나라를 새 이스라엘로 상징하는 숫자가 됩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해서 사도가 된 제자들은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심사숙고해서 뽑았지만, 제대로 당신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주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다처럼 배신의 아이콘이 내 안에 새겨질 수 있습니다.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C.F 블렌차드),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가 필요한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때 까지만 유지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dMCZ_D9IH9k

영화 ‘넘버 3 ’(1997)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한물간 건달이었던 한석규는 위기에 처한 보스를 구한 다음 배신자를 처단하여 넘버 투로 등극합니다. 이 과정에서 행동대장인 박상면과 라이벌 구도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5년 정도가 지난 뒤 조직은 성장을 지속하고, 호텔 인수 건을 한석규가 맡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검사 최민식이 자꾸 트집을 잡습니다. 점점 일이 꼬여만 가자 보스가 한석규를 대하는 것도 시들해지는 느낌입니다. 한석규는 넘버 쓰리라고 하는 놈들을 응징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스는 한석규에게 최민식 검사를 죽이면 자신의 보스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합니다. 한석규는 최민식을 인질로 잡아 산에서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한석규의 총구 앞에서 최민식이 말하는 말이 압권입니다. 

    “너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둬라. 깃털 하나 뽑혔다고 몸통까지 작살나는 건 아니야. 대한민국에 검사가 1,100명이야. 매년 90명씩 생겨나고 또 수사는 계속될 거고. 어차피 너희들은 작살나게 돼 있어. 너도 깃털에 불과해. 조직은 키워줄 놈한테 절대로 피를 묻히게 하지 않아. 당장 깨져도 후회는 없다. 삼류 인생이지만 열심히 살았으니까.”

    “삼류?”

이때 한석규는 조직을 배신하고 최민식을 살려줍니다. 결국 최민식은 한석규의 도움으로 조직을 일망타진합니다. 

  

    왜 한석규는 최민식의 말에 마음을 바꾸었을까요? 사실 한석규는 넘버 투와 넘버 쓰리 사이에서 심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넘버 투가 되라고 아우성치고 그 요구를 따라줄 능력이 없는 자신을 보며 심하게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최민식은 자신도 삼류라고 하는데 삶에 만족합니다.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서. 

    한석규는 최민식에게서 참 평안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의 길. 그것은 바로 이류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입니다.

  

    깡패와 검사가 맺어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깡패는 검사가 감옥만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주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을 좇는 이들은 그것을 주는 사람과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더는 줄 수 없을 때면 그곳에 머물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끊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평화를 원하는 이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성령을 주려면 내게 성령을 주시는 분과 친구가 되어야만 합니다. 받아서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느냐에 따라 어떤 친구가 생기느냐가 결정됩니다. 진리와 은총이 아니면 자칫 모기들을 내 주위로 모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그래서 복음말씀도 사도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이 이런 모습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루카 6,18-19)

    예수님은 사도들이 이런 모습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이고 병을 고쳐 주는 힘은 은총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내 주위에도 좋은 친구들이 모입니다. 

  

    성인 중에 수십,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성인들이 많습니다. 성지에 가면 이런 성인들의 유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많은 사람이 모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분들에게서 진리와 은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산 이들의 표징입니다. 이들을 보며 우리는 세상의 허무와 결국 쫓아야 할 것은 주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또 그런 유해들을 통해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편지들을 그분들 주위에 놓고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돌아가셔서도 여전히 무언가 주기에 사람을 끄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내가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알려줍니다.

제자가 된 형제들 시몬과 유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beYa5x79c4

 -조재형신부-

 

동창 신부님 중에 두 명의 시몬이 있습니다두 분 모두 제가 가지지 못한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한 명은 매사에 신중합니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가는 것을 넘어서 돌다리를 직접 씹어보는 정도의 신중함입니다신학교에서 영성지도 사제로 있을 때입니다각 학년 별로 읽어야 할 신심서적을 분류하였고목록을 작성하였습니다책을 읽어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작업입니다그래서 다른 누구도 해 보지 않았던 작업입니다동창 신부는 묵묵히 그 일을 하였고 저에게도 보내 주었습니다. 30일 피정과 8일 피정의 자료를 꼼꼼하게 정리하였습니다제가 자료를 부탁하니 묻지도 않고 손때가 묻은 소중한 피정 자료를 보내 주었습니다저는 덕분에 지난여름 북미주 파견 수도자 피정을 큰 부담 없이 마칠 수 있었습니다이른 새벽 성무일도를 하면서 저의 축일을 기억하겠다고 문자를 보내 주었습니다여행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강점을 가진 동창입니다.

 

다른 한 명은 추진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습니다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위험하기도 하고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동창 신부님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전임 신부들이 하던 대로물이 흘러가듯이 임기를 보낼 수 있지만 설문 조사를 하였고직원들이 바라는 것들과 직원들이 원하지 않는 것들을 파악하였습니다할 수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시행하였고할 수 없는 것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설득하였습니다마음이 닫혀있던 직원들은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듯이사목에 대한 열정은 죽비가 되어 저의 지친 마음을 깨워 주었습니다변화와 혁신의 과정에서 뜻하지 않았던 어려움도 있었지만 물러설 때와 앞으로 나갈 때를 적절하게 선택하는 혜안도 있었습니다전임 신부님이 쓰던 비밀번호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쓰는 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강점을 가진 동창입니다.

 

저는 타대오 신부님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저는 1991년 8월 23일에 사제가 되었고첫 본당에서 본당 신부님으로 만났던 분의 세례명이 타대오입니다이민 오면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의 직업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야채가게를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야채가게에서 일 할 수 있고세탁소를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세탁소에서 일 할 수 있고식당을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식당에서 일 할 수 있습니다잘 모르기 때문에 마중 나온 사람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저는 첫 본당에서 만났던 본당 신부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신부님은 자유로운 분이셨고해야 할 일을 즐기시는 분이었습니다율법과 계명이 사제의 삶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사제의 삶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저는 그렇게 사제생활을 자유롭게 시작하였습니다신부님의 자유는 기도라는 밭에서 피는 꽃이었습니다신부님은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셨고사제관에도 기도 방이 있었습니다제 방에 있는 기도 초는 1년이 넘어도 그대로 인데신부님 방에 있는 기도 초는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오늘 하루 내 주변에 있는 분나와 함께 일하는 분나의 가족들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오늘은 시몬과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축일을 맞이하는 동창 신부님들과 제게 사제생활의 기쁨을 보여 주셨던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참된 스승과 제자」

 -반영억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굳건한 믿음과 사도적 열성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우시며 기도한 다음 뽑으셨습니다. 그 기도의 열매는 확실했습니다. 열혈당원이라 불리는 시몬과 세리 마태오를 비롯하여 배신자 유다까지도 그 대열에 속해 있었습니다. 시몬과 마태오는 서로의 위치가 대립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하고 장담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하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볼 때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이 밤새껏 기도한 결과입니다. 그냥 뽑았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뽑혔을 텐데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장차 당신을 배신할 배반자들까지도 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이것이 스승의 참 모습입니다. 그분의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그분의 품을 떠날 뿐입니다.

 

제자들은 부족함 투성이였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으뜸제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늘 투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과는 상관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살았고 또 전했습니다. 죄인 취급 받던 마태오도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생각하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은 네 곱절로 크게 갚아주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리마태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잘못은 뉘우쳤지만 죄책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면 행복이 오고, 변하지 않으면 끝이 불행합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면 미래가 열리고, 믿지 못하면 그 자체가 영벌입니다.

 

일상의 삶을 봅니다. “여자는 결혼 후 남자가 변하길 바라지만 남자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반대로 변한답니다. 또한 “남자는 결혼해도 여자가 변하지 않길 바라지만 여자는 변한답니다”. 여자도 역시 남자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한답니다. 집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그야말로 아줌마가 된답니다. 서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데 부족함에 대해 서로 잔소리만 늘어가면 불행합니다. 변하되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례전이나 세례 후나 변한 게 없으면 불행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예수님과의 만남이 깊어져야 행복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나 새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스승 앞에 참된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립3,21).

사랑합니다.

인연 바뀜

 -김찬선신부-

 

시몬과 유다 사도가 같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설과

둘이 같이 선교를 떠나 같이 순교했다는 설에 근거합니다.

 

둘 다 예수님의 친척이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의미가 남다를 것입니다.

혈연의 인연에 매이거나 가두지 않고,

혈연의 인연을 넘어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혈연의 인연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도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을 수 없다고 하신 주님 말씀대로였을 겁니다.

 

자기의 형제인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기 어려웠을 겁니다.

 

시몬이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사람임을 감안 할 때

사도가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독립투사 되거나

형제라는 연줄을 이용하여 예수가 왕이 된 이스라엘의 왕국의

일개 신하가 되려고 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유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시몬과 상의하고 같이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텐데

이러한 인간적인 연줄을 끊은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끊으신 것이고,

주님께서 그들의 바람이나 생각과 다른 길을 가심으로 끊긴 것입니다.

 

두 사도뿐이 아니겠지만,

주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심으로써 닭 쫓던 개처럼 되어 버린 것이고,

이때 두 분은 생각했을 것이고, 선택해야만 했을 겁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척들에게 예수를 따랐는데 이렇게 됐다고

패잔병의 보고를 하고 고향에 눌러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제자들처럼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두 분은 다른 제자들처럼 엉거주춤 예루살렘에 남아있었고

그다음 얘기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성령을 받고 사도로 거듭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주님의 두 형제가 같이 육신의 형제에서 주님의 사도로 바뀌고,

같이 주님의 사도로 페르시아까지 선교한 것을 보며

이런 바뀜에 대해서 묵상합니다.

 

혈연血緣에서 영연靈緣으로의 바뀜

인연人緣에서 신연神緣으로의 바뀜

 

물론 이런 말은 없고,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그 뜻은 혈족적이고 인간적인 인연因緣이

신적이고 영적인 인연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리고 두 분을 보면서

우리 인연들이 어떻게 맺어졌건 간에

우리의 인연을 모두 이렇게 바꾸는 겁니다.

 

지금까지 형제의 인연으로 살아왔다면 이제 같이 주님의 사도로 사는 것.

지금까지 부부의 인연으로 살아왔다면 이제 같이 주님 선포자가 되는 것.

지금까지 친구로 살아왔다면 같이 하느님께로 가는 도반이 되는 것.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