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10. 29. 06:25

2022 10 29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루가 14,7-11)

 

 For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but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그의 기대와 희망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남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 삶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비교하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교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처음 수영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저보다 수영 잘하는 사람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제 수영 실력이 떨어지기에 수영 잘하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 관찰하면서 저의 수영과 비교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었고, 제 실력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교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비교,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비교, 스스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고 느껴지면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비교 등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가 아닌, 자기를 성장시키는 비교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를 더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 부러워하는 대상만을 바라보면 ‘나’를 괴롭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의 성장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선 안에서만 부러움을 갖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당시의 식탁 예절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당시의 식탁 예절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특히 식탁 앉는 순서가 분명했지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맨 나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지위에 맞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과시에 신경 썼기에 윗자리를 탐냈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자기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라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의 겸손을 간직해야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품위는 하느님이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지 말고, 남과의 비교로 성장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당신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당신은 절대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넬슨 만델라).

바리사이즘의 위기가 말해 주는 징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uxsUf4Ccfo

 -조재형신부-

 

오랜 만에 신부님들 4명이 함께 캠핑을 가기로 했습니다아름다운 가을의 단풍을 보기로 했습니다캠핑에서 먹을 음식도 준비하고캠핑 장소도 예약하고준비물을 다 챙겼습니다떠나기 며칠 전에 신부님 한 분이 감기 몸살이 심하다고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습니다건강을 잘 챙기라고 인사하였습니다출발 당일에도 신부님 한 분이 몸 상태가 안 좋다고 다음 날 오겠다고 하였습니다미리 이야기를 해 주면 좋았을 텐데 약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캠핑장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모처럼 후배 신부님과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차선 도로에 4대의 차가 들어오면 병목 현상이 있어서 교통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반면에 4차선의 도로에 2대의 차가 지나가면 막힘없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4명이 함께 하기로 했지만 2명이 캠핑을 하니 그것도 좋았습니다우리 옆에는 혼자 캠핑 온 젊은 친구도 있었습니다함께하는 인원도 중요하지만 자연 속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득 미국에 와서 제가 하는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저의 주된 업무는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일입니다신문을 만들고홍보를 통해 구독자 수를 늘리고직원들이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2년 전부터 부르클린한인성당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매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장례가 나면 연도를 함께하고본당의 행사에도 참여합니다. ‘퀸즈성정하상바오로성당의 미사도 도와주고 있습니다주로 목요일 아침미사를 하고 있습니다. ‘동북부엠이대표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매달 줌 미팅이 있고엠이 주말도 있고미주지역 엠이 총회도 있습니다바쁘기는 한데 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4가지의 일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신문은 지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부르클린한인성당은 미사와 강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퀸즈성정하상바오로성당은 사제들과의 친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동북부엠이대표를 하면서 부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제가 맡은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고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고 합니다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사실 사느냐 죽느냐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우리 삶의 목적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양을 이야기 하지 않으십니다우리가 이루는 업적을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그러면 하느님께서 다른 것들은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바오로 사도의 생애 안에서 주님의 성령께서 하신 일은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서서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풍이 불어오자 박해자 사울은 애제자 중의 애제자 바오로 사도로 환골탈태했습니다. 남은 생애 내내 바오로 사도는 한때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존재였음을 크게 가슴 치며,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장이라도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유일한 의미요 희망이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완벽한 변화의 흔적이 오늘 우리가 첫 번째 독서로 봉독한 필리피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은 것이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스도를 만나뵙고자 하는 마음에 최대한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구했고, 그리스도를 사랑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을 묵상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무슨 변화?’하지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좀 더 마음을 활짝 연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대접 받길 원하는 사람」

-반영억신부-


저는 이런 저런 모임에 가면 제 자리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와서 그 자리까지 안내해 주기를 바랍니다. 더더욱 낯선 곳에 가면 저를 소개해 주기를 기대하며 한 말씀 해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본당신부 할 때입니다. 구역 모임에 가면 음식을 나누게 되는데 설거지의 어려움 때문에 일회용 접시를 많이 쓰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일반 접시를 사용하도록 해줍니다. 제일 먼저 음식을 챙기고 저만 특별대우 받는 것 같아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똑같이 일회용 그릇을 쓰게 되면 속으로는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삶은 따르지 못하면서도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하며, 누군가가 바른 소리를 하면 서운해 하고 오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대접 받기에 익숙해져 있고 또 특별한 예우를 원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루카14,11)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우리는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 켐피스는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으니 겸손의 길은 멀고도 멀게 느껴집니다.

혹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를 청하는 이가 있다면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진대 언제 겸손이 몸에 익을 수 있을까?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 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마라. “이리 올라오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낫다”(잠언25,6-7). 기회가 되면 더 낮은 자리를 잘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두 가지 부러움

 -김찬선신부-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두 가지 부러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진정한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바오로 사도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럽다는 것은 나는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저 자신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바람이 아닌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저의 바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럽고 무엇이 부러운 것입니까?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가 부럽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차원일 것이고,

제가 미련 없이 또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는지 그 차원일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사랑의 차이이고,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사랑이 부러운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에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지만

그 상황이 되면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랄까 확신이 부족한 반면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면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께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고 그래서 그 길에 두려움이나 미련은 없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면에서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데 비해

저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만큼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주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라면

또 하나의 부러움은 이웃 사랑에 대한 부러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데서도 이웃 사랑의 높은 경지를 토로한 적이 있지요.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불행,

곧 지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입니다.

 

저도 이웃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사랑과 결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의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차원,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사랑에 많이 머물면서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려고 하는 애를 쓰는 차원이고,

그래서 이웃을 위해 고통을 좀 감수할지는 몰라도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바오로 사도로부터 자극도 받고 도전도 받는 오늘 저이고

아마 여러분도 같은 자극과 도전을 받는 오늘일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