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2-14)
When you hold a banquet,
invite the poor, the crippled, the lame, the blind;
blessed indeed will you be
because of their inability to repay you.
For you will be repaid
at the resurrection of the righteo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 것만 아니라 남의 것도 돌보아 주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에는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14년 소치 동계 패럴림픽 폐회식과 2018년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 선포인 힘찬 크로키 퍼포먼스를 기억하십니까? 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인 화가는 그림을 다 그린 후 발로 낙관을 찍었지요. 바로 수묵 크로키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한 의수 화가 석창우입니다.
그는 1984년 29,000볼트 고압 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을 잃었습니다. 이때의 나이는 29세. 너무 젊은 나이에 소중한 두 팔을 잃은 것입니다. 이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4살인 자녀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라서 참새를 그려줬다고 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의수 화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하늘에서 건강한 두 팔을 다시 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특유의 담담한 어투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안 받아요. 내가 양팔과 헤어진 것이 운명이라면 의수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바로 숙명입니다.”
그러면서 팔이 있었던 29년보다 팔 없는 30년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의 이유를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행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실천도 가능하게 됩니다.
보답을 기대하지 말고 초대하라는 내용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초청받고 초청하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초상이 나면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장례식장을 찾아가 문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보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어떨까요? 즉, 초청하는 이유가 초대받기 위한 것이고, 문상가는 것도 나중에 초상났을 때 문상하러 올 것을 대비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은 선행의 장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보상’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보상받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진정한 선행이고 자선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 나라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혹시 이것들을 나눌 때,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감사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면, 이를 나누는 것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선물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지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F5AYF9tj5w
-조재형신부-
10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선악과와 십자가’의 이야기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알았고 하느님과 같아질 것 같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류 역사에 드러나는 폭력, 전쟁, 살인, 갈등과 분열은 ‘선악과’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자신의 입장에서 드러냈기에 그와 같은 고통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선악과를 몰라서 예수님께 비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자신들의 기준에서 받아들였고, 선악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이 지켜보는 국정감사의 현장에서 낯부끄럽게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는 것은 선악과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당의 공동체가 서로 갈라져서 다투는 것도 선악과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자신들의 입장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장의 슬픈 독백입니다. “저는 가족을 위해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도 안 돌보고 열심히 일 했습니다. 그러난 어느 날, 제 아이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대들면서 말하였습니다. ‘아빠!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 해 준 것이 뭐가 있어요? 덩달아 제 아내도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욱하는 성격에 한바탕 싸움하고 이혼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집에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해 준 말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야! 공부나 잘해!’ 그리고 제 아내에게 해 준 말은 ‘밥 줘! 나 피곤해! 당신이 알아서 해!’ 이 세 가지 말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가정에 선악과는 있었지만 십자가는 없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그 십자가를 다르게 해석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백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까지 데리고 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진 재물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4배고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본인도 걸인이면서 더 어려운 걸인들에게 밥을 나누어 준 최귀동 할아버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꽃동네’로 열매 맺었습니다.
우리를 매일 천상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또다시 미처 피어나지도 못한 꽃 같은 청춘들이 우수수 낙화(落花)했습니다. 간다 온다, 작별의 말 한마디 할 겨를없이 저리도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찌 살라는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를 잃고 애통해하고 계시는 희생자 부모님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니, 하루 온 종일 찹찹한 마음이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희생자들을 당신 품에 따뜻이 안아주시고, 슬퍼 울부짖고 있는 희생자 부모님들과 가족들을 친히 위로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여러 이미지 가운데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이미지 하나는 잔치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잔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참된 잔치는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와서 마음껏 먹고 마시는 무상의 잔치,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넉넉한 잔치입니다.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수시로 저를 당신 잔치에 초대해주셨더군요. 다른 무엇에 앞서 아무것도 아닌 나, 티끌이었던 나, 그야말로 무(無)였던 나였는데, 과분하고 이런 나에게 숨결과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에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아름답고 황홀한 세상, 그 세상에 차려진 축복된 잔치를 마음껏 만끽하고 즐기라고 이 세상에 불러주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매일의 삶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차려주신 잔칫상입니다. 잔치를 준비한 주인 입장에서 볼 때 손님들이 어떻게 처신하면 가장 기분이 좋겠습니까?
우울한 얼굴로, 무덤덤한 얼굴로, 마지못해 잔뜩 인상을 구기면서 잔칫상 앞에 앉아있으면 주인 마음이 얼마나 상하겠습니까? 최대한 밝고 환한 얼굴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잔치를 즐겨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입니다.
제대로 된 잔칫상 위에는 무엇이 올라옵니까?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산해진미는 무엇입니까? 그 산해진미는 우리 인생 여정에서 만나는 여러 인연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맺는 다양한 인연들, 특히 가까이서 살아가기에 때로 의기투합하다가도 때로 티격태격하기도 밥 먹듯이 하는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 공동체 구성원들이 바로 잔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여러 인연들과 더불어 함께 축복의 꽃밭인 이 세상을 만끽하는 것,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협력하여 잔칫집이 이 세상을 더 흥겹게 만드는 일,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잔칫집에 또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술입니다. 음료입니다. 기분 좋게 한 잔 해야 축제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그 음료는 다름 아닌 이 세상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음껏 감상하고 찬탄하라고 지어주신 이 아름다운 자연, 특히 요즘 같은 시기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아름다운 광경들, 그윽이 바라보면서 그 자태를 한껏 만끽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잔치에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후식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디저트는 가끔 불어오는 역풍이 아닐까요? 원치 않은 고통과 십자가일 것입니다.
늘 좋은 날만 계속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가끔 인생의 바다 밑바닥까지 뒤집는 폭풍이 다가옵니다. 물론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가 크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또다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표현으로 주신 이 하루를 허무하게, 우울하게, 불행한 얼굴로 보낼 것이 아니라 축제의 손님으로 온 이상 때로 왕비처럼 우아하게, 때로 최대한 행복하게 잔치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
-반영억신부-
이태원 참사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며 유족들에게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치료를 받는 분들의 빠른 쾌유를 희망합니다.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리웠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나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아무런 손해도 볼 수 없고, 또 남을 위해 치른 수고는 언제나 한결 좋게 하느님께서 내게 갚아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이고 그들을 위한 행동은 보속이고 회개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삶에로 나설 때입니다.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것보다 전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환히 꿰뚫고 계십니다. 드리고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1주 월요일-이 참사에 우리가 건네야 할 위로와 격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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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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