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ㄴ)
마태오 25,1-13
마태 11,25-30.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욥은, 구원자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백곰 효과’라고 있습니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도 불리는 이 심리학 현상은 하버드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가 진행한 실험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라고 하고, 두 번째 그룹에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다음 백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습니다. 어느 그룹에서 종을 더 많이 쳤을까요?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던 두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이처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은 더 많이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뇌는 느낌이나 생각을 잘 지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해하고 걱정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방법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불편한 느낌이나 생각의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되는 분이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서 계속해서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그 강도가 약해지며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죽음도 그렇습니다. 죽음도 ‘생각하지 말아야 해.’라면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죽음을 오히려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죽은 모든 이, 그들 가운데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죽음’을 떠올리고 또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십자가 죽음을 직접 몸으로 받아들이셨지요. 그러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긴 유일한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힘센 분이 하늘 나라의 주인으로 계십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커다란 힘을 주시는 말씀을 이렇게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큰 힘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연옥의 존재 이유: 우리 안에 다 자라지 못한 십자가가 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ZsN-m2iEHA0
영화 ‘사일런스’(2017)는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선교하러 갔던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듣고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도 일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카오에서 그들을 안내해 줄 기치치로라는 일본인을 만납니다. 그도 천주교 신자였지만, 가족이 다 화형당하는 것을 보고는 배교하고 마카오로 피신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을 안내합니다. 그런데 배로 일본에 도착하자 그는 도망쳐버립니다. 다시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행히도 로드리게스 신부 일행은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 보호를 받게 되고 그들에게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줍니다.
다른 마을에 갔을 때 기치치로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 마을에서 종교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믿음이 육체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순사들이 와서 로드리게스 신부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기치치로는 순교의 고통을 피하고자 예수님 십자가상에 침을 뱉고 후미에(예수님 모습이 새겨진 동판)를 발로 밟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피신을 하다가 산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이때 기치치로가 그를 도와줍니다. 그리고 배교를 한 것에 대해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진심이 묻어납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사제는 정말 꼴도 보기 싫은 기치치로에게 또 고해성사를 줍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모릅니다. 기치치로가 바로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다만 자신은 절대 배교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치치로는 다시 약해집니다.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많은 현상금이 걸렸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는 돈 때문에 마치 유다 이스가리옷처럼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아넘깁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배교를 강요받습니다. 한 사제의 배교가 많은 신자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치치로는 감옥까지 와서 또 고해성사를 달라고 합니다. 만약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꾸준히 고해성사를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한데 작은 것입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자신 때문에 무참히 순교의 고통을 겪는 신자들을 더는 지켜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결국엔 예수님의 얼굴을 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고 공직자로 선교사 색출을 도와주며 평생을 삽니다. 그가 죽어 화장할 때 그의 손에는 아주 작은 십자가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마치 기치치로처럼.
오늘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의 본격적인 시작인 위령의 날입니다. 오직 가톨릭 교회만 연옥이란 교리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연옥이 있어야만 하고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가 기도하면 그 고통이 감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해 주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 성녀를 통해 주시는 기도문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오랜 시간 바쳐오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신앙의 완성은 내 안에 떨어진 믿음의 씨앗을 얼마만큼 키우느냐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씨앗은 마치 겨자씨처럼 작은 십자가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나를 완전히 매달아 죽일 정도로 성장합니다. 그렇게 커졌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나 기치치로처럼 작은 믿음으로 작은 십자가만 지닌 채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손에 들어올 작은 십자가의 크기로는 나를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옥에 가야 할까요? 하지만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믿음을 저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십자가를 키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작은 십자가만 가지고 있는 신자를 하느님 나라에 들여보내면 어떨까요? 그는 죄를 지을 것이고 다른 이는 피해를 당할 것입니다. 다시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강의에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성추행한 아버지를 신앙을 가지고 용서하였다고 합니다. 딸 아이를 낳고 큰맘 먹고 아버지를 집에 초대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자신의 딸도 추행했다는 것입니다. 딸의 상처를 아는 아버지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육체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은 아버지가 뉘우친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안에는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 커다란 십자가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작은 믿음만을 지닌 사람을 천국에 보내면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딸은 아버지가 아버지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모습이 보일 때까지 조금 더 고통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의 요셉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형들에 의해 팔려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이집트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재상이 됩니다. 이제 형들이 요셉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청해야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계속 괴롭힙니다. 몇 번이나 그렇게 합니다. 결국 유다가 요셉이 잡아놓겠다던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갇히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을 용서해 줍니다. 남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때까지 용서를 보류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그들에게 자신들 안에 자라나는 십자가를 완전하게 성장시킬 시간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못된 장난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연옥은 이런 자비의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기도하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굳이 그러한 고통으로 나아가지 않고 수련의 시간을 충실히 받게 됩니다. 연옥이 우리를 더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지옥의 존재는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하지만, 연옥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그 믿음의 성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이 쳇바퀴 도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연옥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이 지상에서의 상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소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rMt1Fq5f0U
-조재형신부-
1997년 폴란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물이 범람하면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홍수’가 예측되었습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줄이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강에 쌓아 놓은 둑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범람하는 물의 피해를 줄이고 도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둑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 이 사실을 방송을 통해서 미리 알았습니다. 책임을 모면하려는 장관이 언론에 사실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수 없다며 둑으로 오는 공무원들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혼신을 다해서 둑 위에 모래주머니를 높이 쌓았습니다. 결국 둑을 여는 일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도시는 물에 잠기는 커다란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둑에 쌓았던 모래주머니로는 범람하는 물을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둑을 열지 않았지만 둑은 범람하는 물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전문가의 말을 듣고 둑을 열었다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물에 잠겼겠지만 도시의 피해는 줄일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정부의 약속대로 피해보상을 받고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결정이 최선인 것 같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먼저 성찰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한 ‘바벨탑’이야기입니다. 바벨탑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우상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이웃의 희생으로 쌓아올리는 욕심의 탑이었습니다. 바벨탑은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어리석음의 탑이었습니다. 줄을 세워야 하는 바벨탑은 앞에 있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있는 사람은 밀쳐버리는 경쟁의 탑이었습니다. 그런 바벨탑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바벨탑을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탑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겸손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강도당한 사람을 기꺼이 치료해주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대와 화합의 탑입니다. 십자가는 모세가 구리뱀을 세워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부활의 탑입니다.
서산대사는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이라는 시를 남겨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면 발걸음을 신중히 하여라. 오늘 내가 가는 길은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에 묻혀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영혼들의 전구를 구하며 우리들 또한 부활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위령의 달입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욕망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었다면 내려와서 부활의 십자가를 지고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온 나의 발걸음이 뒷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의 발걸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위령 감사송’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내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줍시다!
-양승국신부-
위령의 날을 맞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죽음에 대해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솔직히 아직 저도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제게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떨리기도 하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게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지평을 열어주신 분이 계시는데, 헨리 나웬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꿈꾸고 희망했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밀함의 대상으로서의 죽음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죽음
세심하게 준비하는 죽음
반가운 친구 같은 죽음
상실이 아니라 성취로서의 죽음
가장 인간다운 행위로서의 죽음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 가르침을 이어갑니다.
죽는다는 것은
나를 붙잡아주실 존재,
아버지에게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일생 전체를 아버지께
송두리째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결국
내 손을 아버지 손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올 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갈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곧 당신이 죽음을 향해서 점프할 때,
저 건너편에는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이 도착할 그 자리에
딱 지키고 서 계실 것입니다.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손과 팔을 펼치기만 하십시오.
반드시 그분께서 당신을
꼭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믿으십시오.”
헨리 나웬 신부님의 또 다른 한 말씀이 너무나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내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가장 큰 증거요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섬광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을 보다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꾸준한 기도와 함께 죽음에 대한 부단한 연구, 죽음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 부여 그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마십시오.」
-반영억신부-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냐’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어느 인디언의 기도를 옮겨 봅니다.
해 지는 곳과 해 뜨는 곳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며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숨죽인 듯
고요한 아침에 깨면
나는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말 없는 새이며
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내리사랑을 넘어 치사랑을
-김찬선신부-
아시다시피 위령의 날에는 세 차례 미사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두 번째 미사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핼로윈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 모두에게 주님께서 안식을 주십사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는 마음이기에 두 번째 미사의 복음을 택한 겁니다.
지난 월요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들에게 줘야 할 위로는
우리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주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이들은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신 대로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것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직접 건네는 위로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위로는 한계가 있기에,
특히 이 세상을 떠난 분들에게는 우리의 위로가 직접 전달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은 오직 하느님 손에 있기에 그들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저는 요즘 추세를 걱정스러워합니다.
위령미사를 드리는 것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 말입니다.
제가 사제로 서품된 30여 년 전만 해도 생미사보다 연미사가 많았는데
요즘은 생미사가 훨씬 더 많고, 생미사도 자녀들을 위한 미사가 대부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런 가운데서 효도는 구닥다리로 치부되고,
치사랑은 실종되고 내리사랑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는 입 싹 닦고 되돌릴 줄 모르고,
손주는 봐주면서도 부모는 노인 요양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똑같은 현상이 우리 신앙에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자녀를 위한 생미사는 자주 바치면서,
부모를 위한 연미사를 자주 봉헌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요양원에 맡기고 자주 찾아가지 않는 것처럼,
부모를 하느님께 맡기고 돌아가신 날 한 번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의 문제는 하느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부모를 향하지 않는 사랑은 하느님께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로만 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기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줄은 모릅니다.
이것은 기우제를 드려 하늘이 비를 내려줬는데 감사제를 올리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는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치사랑은 없고 내리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의 영원한 미성숙입니다.
나의 사랑이 성숙해지면 이제 받기만 하지 않고 사랑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어린애처럼 그저 받기만 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령의 날과 위령의 달에 우리의 성숙한 사랑과 성숙한 신앙은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사랑에
산이와 죽은 이의 영혼을 맡기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사랑,
곧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봉헌하는 사랑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0) | 2022.11.04 |
---|---|
2022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0) | 2022.11.03 |
2022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0) | 2022.11.01 |
2022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0) | 2022.10.31 |
2022년 10월 30일 연중 제31주일 (0) | 2022.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