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11. 4. 06:29

2022 11 4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1538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오 4세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
루가 16 1-8)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the children of ligh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하늘의 시민답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영리한 처사에 관한 비유를 드시며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울증으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지요. 처음 상당하면서 참 많은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으려고 책상 위에 놓인 휴지를 뽑는데, 상담 선생님이 자기보다 더 많이 울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자매는 ‘남의 이야기에 왜 우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몇 차례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는 울면서 말하고, 상담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울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온종일 내담자들을 대하실 텐데 그때마다 저렇게 울면 힘들어서 어쩌시지?”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남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을 걱정하는 마음을 통해 이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내담자의 이야기에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담자는 울고 있는 상담 선생님을 걱정하면서 치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하는 마음이 치유의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점에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자가 집사를 해고합니다. 이유는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 16,3)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재산을 횡령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보다는 그의 능력 부족으로 부자의 재산을 낭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다가 부자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서 빚문서를 고칩니다. 기름 백 항아리는 쉰 항아리로, 밀 백 섬은 여든으로 고칩니다.

어떻게 보면 간교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른 집사입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면 깜빵에 가야 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집사의 주인인 부자는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합니다.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주님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당해 보이는 수단까지 동원하는 약삭빠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의도가 어떻든 결국 자기를 위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울 것이니까요(드라마 ‘스토브 리그’ 중).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VRculcZvjUg

조우성 변호사의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이긴다』에서 “아버지고 동생이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세요” 내용입니다. 조 변호사는 좀 특이한 소송을 맡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자신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건물에서 나가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소송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동산 소유주는 누나이며 현재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서울에 있는 자기 건물 2층에서 아버지와 남동생이 살 수 있도록 별도의 보증금이나 월세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10년째 그 건물에서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고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누나가 갑자기 돌변하여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합당한 보증금과 월세를 내라는 새로운 임대차 계약 체결을 요구했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누나는 기존의 무상 임대차 계약을 해지한다는 통보를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을 나가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소장 내용만 보면 아버지와 남동생은 6개월 이내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나가면 마땅히 잠잘 곳도 없는 상황인데 누나가 이렇게 갑자기 매몰차게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데 대해 아버지와 남동생은 누나에게 크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누나는 돈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엄동설한에 바깥으로 내몰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오갈 데도 없는 아버지를 추운 겨울에 내쫓는다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법은 천륜만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조 변호사가 더 깊은 내막을 알고서는 누나가 아닌 천륜만 고집하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누나와 형욱 씨는 10살 터울입니다. 아버지는 외항선을 타는 뱃사람이라 집에서 자녀들과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더는 배를 타지 못하고 노름과 술에 빠져 어머니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을 참다못한 어머니는 누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가출했고 이후 누나는 아버지와 형욱 씨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동생 형욱 씨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덕분에 형욱 씨는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누나는 악착같이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고 형편이 조금 안정이 되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어 의정부에 두 채의 건물 소유주가 됩니다. 누나는 사업을 해보겠다는 형욱 씨를 위해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조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형욱 씨는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누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자신을 처음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누나의 결혼을 아버지와 동생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남자의 학력이 고졸이고 분명 누나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려는 속셈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보면 달라질 줄 알아서 남자 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면전에서 면박까지 주었습니다. 

  

    조 변호사는 변호를 의뢰한 형욱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욱 씨, 제가 하자는 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제가 이 사건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형욱 씨에게 이러한 글을 재판할 때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소송을 진행하다가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에게 누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 컸습니다. 특히 매형 될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마음으로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받지 못한 따뜻함을 그분에게서 느꼈을 텐데 이를 헤아려주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나는 평생 누나에게 짐만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번 사건의 결과에 상관없이 더 이상 누나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초안을 읽어본 형욱 씨는 난처해 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소송은 지게 되어 있고 방법은 이것 뿐이었습니다. 형욱 씨는 못내 불안해하면서도 이 준비서면을 제출했습니다. 3주 뒤 재판 당일, 누나 측 변호사는 “재판장님, 원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아예 영구적인 무상사용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한답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누나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돈을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아버지와 동생의 마음이 야속했던 것입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살고 있던 건물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가족 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 비유입니다. 결론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입니다. 나를 맞아들일 친구를 불의한 재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의롭지 않은 재물이란 나의 것이 아닌 재물을 의미합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여긴 데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핑계로 누나의 재산을 당연히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책과 같은 것에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처럼 누나의 재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것입니다. 누가 나의 것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다고 해 봅시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가족도 필요 없습니다. 

  

    고아로 자라난 아버지가 아이가 드라이버로 자기 스포츠카에 낙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쳤습니다. 아이의 손이 부러졌고 아버지는 아이를 병원에 입원시키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무슨 낙서를 했나 보았습니다. 

    “LOVE U DAD”(아버지 사랑해요)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어떤 물건에 ‘나의 것’이란 표를 해 놓으면 나는 가족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의 것’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맞아들일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형욱 씨와 아버지는 ‘나의 것’을 포기함으로써 평생 거처를 다시 얻었습니다. 나의 것이란 생각만 없애도 그 사람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스님은 자신이 아끼던 난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니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소유의 자유를 말하며 가진 것을 최소한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무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의 난을 선물하였다면 그 난에는 아직도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미련이 남거나 상대에게 보답을 기대합니다. 불교에서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주인이 안 계시는 것이니 가지면 나의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주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무소유는 가진 것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가지고 있어도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면 많이 갖건 적게 갖건 내 모든 것은 불의한 재물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내가 가졌지만, 나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모든 것들입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의한 재물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 위에 ‘주님 것’이란 이름을 써 놓아야 합니다.  

 

    유학시절 함께 방을 쓰던 아프리카 친구가 저의 것을 자꾸 자기 것처럼 쓸 때 짜증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어떤 분이 “내 것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내 것이라는 말을 안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자꾸 “내 것”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외톨이가 됩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어주면서도 “어차피 내 거 아냐!”라고 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의롭지 못한 것”, 곧 주님의 것을 내가 유용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나의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소유이지 나의 것을 다 내어주는 것이 무소유가 아닙니다. 나의 것이 애초에 있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그러니 가진 것은 다 주님 것을 맡겨 놓은 것으로 여기고 가지고 계십시오. 그래도 무소유입니다.욥의 이 말을 새깁시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욥 1,21)

 천국의 시민권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zhs7c9TPmw

 -조재형신부-

 

성사와 사도적 실천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여러 성사가 있었지만 제게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신품성사였습니다사제에게 술을 사드리고음식을 사드리는 것이 사제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가끔은 사제를 핑계로 대고 늦은 시간까지 유흥을 즐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사제가 사제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사제에게 쓴 소리를 하는 것도 신앙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성사를 집전하고사목하는 것이 사제 본연의 사명이기에 사제가 놀 수 있도록 배려하기 보다는 사제가 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신앙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성소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기도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돌아보니 저는 제게 도전을 주고사제 직무를 수행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신앙인 보다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신앙인을 더 가까이 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을 성당으로 인도하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견진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성령의 은사를 생각하고 그 중에서 특히 용기와 지혜의 영을 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병자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숙지하고 전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고백성사에 대한 가르침으로는 나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고나의 잘못도 용서를 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혼인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배우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혼자된 사람이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부부는 가정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이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자녀들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좋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성체성사의 신앙실천으로는 미사참례를 성실하게 준비하고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성사생활을 충실히 하고그 의미를 삶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교회에는 성사와 준성사가 있습니다성사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입니다성사는 그에 따른 은총이 주어집니다성사의 은총은 집전자와 참여자의 인품이나 신앙에 상관없이 주어집니다햇빛이 골고루 비추듯이비가 골고루 내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은 성사를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준성사는 교회에서 만들었습니다준성사는 그 자체로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그러기에 준성사는 집전자나 참여자의 정성과 갈망이 필요합니다안수축복성호경과 같은 것들이 준성사입니다폐차장의 주인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축복을 받은 차들은 사고가 났어도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성호경을 정성껏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전교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안수기도는 위로를 주고용기를 줍니다밀림이 우거지고 물이 많은 것은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사막이 메마르고 삭막한 것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의 의미를 삶으로 실천하고교회가 세운 준성사를 가까이 하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 영적으로 풍요로운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리한 집사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맞습니다저는 증권부동산은행업무와 같은 것을 잘 모릅니다저는 음악미술건축 분야도 잘 모릅니다저는 성사와 사목 분야에서는 세상 사람들보다는 잘 할 수 있습니다우리 신앙인들 또한 세상의 것들로 경쟁하기 보다는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와 준성사의 삶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 기쁨이요 화관, 너는 내 삶의 의미요 존재의 이유!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부끄럽게도 스승님을 세 번이나 배신한 일로 인해 자주 눈물을 흘렸답니다. 하도 눈물을 흘려서 눈가가 짓무를 지경이었고, 수시로 흐르는 눈물을 위해 과거 ‘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처럼 가슴팍에 손수건을 하나 달고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집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게 눈물을 자주 흘렸습니다. 한때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지난 일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눈물을 흘린 또 다른 이유 하나가 있었으니,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처럼 나약하고 흔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안쓰러운 마음에 그렇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교회 신자들로 인해 눈물을 흘린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네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수치스러운 일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 천상의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오로지 땅의 것들,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가엾고 안타까웠던 바오로 사도는 눈물로 간곡히 호소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지상의 시민이 아니라 천상의 시민임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 모두 당신의 영광에 깊숙이 참여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피서 3장 20~21절) 

 

마무리 말씀은 또 어떤가요? 매일 매 순간 수시로 흔들리고 방황하는 오늘 우리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틋하고 다정다감한 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피서 4장 1절)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보십시오. 그는 오늘 우리를 향해 "나의 기쁨이며 화관."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쁨이요 화관으로 여겨진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제자 베드로 사도 못지 않은 바오로 사도께서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너는 내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말씀하시니, 참으로 은헤롭습니다.

  

주님의 종들의 종인 바오로 사도께서도 우리를 향해 이런 표현을 쓰시는데, 자비와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의미있고, 사랑 가득 담긴 표현을 쓰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너는 내 삶의 의미란다." "너는 존재의 이유란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단다." "너는 내 행복의 원천이란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영근신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루카 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

(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하오나 주님!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저를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영리한 선택」

 -반영억신부-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 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의 혜택이 돌아갔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아파트 청약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소문난 좋은 유치원에 등록하기 위해 길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우던 부모의 모습을 보면 정말 감동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는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하늘과는 멀어집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적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한상우신부-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관계안에서
함께하십니다.

우리들 삶 또한
관계로부터
태어나
관계 속에
살다가 관계로
마무리하는
관계의 삶을
살다 갑니다.

현실적 관계처럼
한순간에
아무 것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들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존의 욕구처럼
절박한 것이
우리들
신앙입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의 돌파구는
삶의 대처방식처럼
막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우리들
삶의 자세입니다.

주지 않고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약은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관계의
선물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지혜로운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칭찬은
끊임없이 관계를
이어가는
집사의
관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관계맺는 방식이
외적인 욕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내적의미를 찾는
기쁨의 방식이길
기도드립니다.

건강한
관계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다시 깨닫는
오늘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1주 금요일-한 때는 불의했지만, 이젠 사랑하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