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6일 연중 제32주일

Margaret K 2022. 11. 6. 08:55

2022 11 6일 연중 제32주일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27-38)

 

'Lord, '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and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지만, 다들 거부하고 죽는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힘을 북돋우시고 악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신다(복음).

회생

-키앳 대주교-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뿐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도, 잠시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데 다음 생애는 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삶입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사람만이 더 이상 시집과 장가갈 일도 없으며, 천사들처럼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세상의 한계를 알고, 다음 생을 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마치 신이라고 생각하며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사람을 죽이던 안티오코스 4세도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였지만 세상을 압도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야 후회합니다. 침략과 탐욕에 젖어 살았기에 희망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합니다.“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무죄한 유다 민족을 괴롭힌 죄의 대가로 고통 속에 죽어간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 땅에서 죽어가네.” 불의와 욕심은 결국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바뀌는 것일 뿐,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죽은 후에 다시 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기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이런 믿음은 하느님의 교리와도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날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의 힘들고 어려움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의 질문에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선택된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 세상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고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산상설교의 ‘여덟 가지 참 행복’을 믿는 사람들로 첫째는 박애와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 나라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천사와 같아질 것이다.’

하늘 나라의 생활은 인간의 삶과 달라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 마르지도 않으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도 필요없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때문에 대를 잇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 있는 나는 여전히 나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까? 네, 나는 여전히 ‘나’ 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고 예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이던 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였던 태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0세의 늙은 할머니도 70년 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늙어 옛날 모습과 다르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땅속에서 묻혀있던 못 생긴 애벌레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꽃 주위를 맴도는 나비가 되었지만 그 둘은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전혀 다른 생활, 먹고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입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진리는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부모에게 돌아가는 자식과 같습니다. 무한한 갈망을 찾아 헤맸던 갈증들을 주님께서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당신을 위해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에 갈 때까지 제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근심스러웠습니다.”

주님의 자녀이기에 삼위일체의 삶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삼위일체 삶의 행복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훗날 우리가 얻을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며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희망입니다. 더 이상 속절없이 흔들리고 헛되지 않는 삶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근원이신 아버지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자녀가 된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비록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코린 15,43-44)

주님! 다음 생애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2.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우리 모두의 꿈은 다음 세상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마지막은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뜻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마지막과 하늘나라의 삶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마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15년째 쓰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묵상 글 댓글로 누군가가 제 글에 대한 비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글쎄 제가 자기 핸드폰을 해킹해서 자신의 글을 저의 글인 것처럼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니 그냥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사이버 수사대에까지 신고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좋은 소리만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신고까지 당하니 묵상 글 쓰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인데, 이러면서까지 글을 써야 할까?’, ‘처음부터 묵상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더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등등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머물면서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났습니다.

‘언제까지 묵상 글을 써야 하지?’, ‘잠도 잘 못 자면서 묵상 글을 쓰는데, 혹시 건강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또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어떻게 하지?’ 등등 이렇게 미래에 시선에 머무니 역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고, 편안하면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노자)

묵상 글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나의 성장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과의 마음을 글로 정리하면서 주님께 조금씩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신부님 대단하세요. 저희 신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묵상 글을 써주시다니요.”라고 말씀하시면 얼른 고쳐드립니다.

“신자가 아니라 저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닌 또 미래도 아닌 이 순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와의 논쟁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들의 존재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뜻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결혼으로 자손을 낳아 대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기에 사두가이의 말은 모두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또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며 따라서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하느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잘못 해석하고, 오지 않는 미래를 떠올리면서 ‘이럴 것이다’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약점을 안고서 연결되어 있다(로라 판 더누트 립스키).

 부활을 안 믿는 자에겐 부활이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eh4tyaaJIU8 

영화 ‘47m’ (2017)는 상어가 가득 찬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진 두 영국 여성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케이트와 리사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7m나 되는 상어들을 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합니다. 리사는 들어가기 전까지 겁을 먹었지만,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신나서 감탄합니다. 한창 재밌던 중 케이지를 매달고 있던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미터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떨고 있는 리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무전을 하기 위해서 수심 4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무전에 성공합니다. 케이지에 다시 매달아 들어 올릴 고리를 가지고 구조하러 온 사람은 리사의 눈앞에서 상어에게 잡아 먹힙니다. 리사는 상어를 피해 하비에르의 가방에서 작살과 케이지에 매달 인양용 줄을 가져옵니다. 리사는 무전으로 구조 대원의 사망과 인양 줄 확보를 알려주고 케이지에 줄을 묶고 케이지에서 기다리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0미터 지점도 넘어 둘은 구조되는 듯했지만, 줄이 가늘어서 또 끊어져 다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리사의 다리가 케이지의 철근에 깔려 리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위에서 공기탱크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동안 질소중독에 걸릴까 봐 내려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케이트는 산소통을 집어 케이지로 잽싸게 이동하려 하는데 순간 상어에게 물립니다.  

 

    리사는 케이트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케이지 바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새 공기탱크를 가져오기 위해 케이지에 걸려있던 작살총을 쓰기로 하는데 작살은 억지로 안으로 가져오려다 방아쇠가 바깥 나사에 걸려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왼손을 찌르고 맙니다. 피가 나고 공기 게이지는 0바입니다. 겨우 공기탱크를 작살로 가져오는 데 성공해서 교체합니다.

  

    그때 무전으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어에게 공격받아 상처는 입었지만 살아있었습니다. 리사는 자기 조끼를 낀 곳에 넣어 부풀려 다리를 빼내고 케이트를 구하러 갑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다리가 심하게 물려 피가 흐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더 꼬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30미터 위치에서 잠수병 예방을 위해서 5분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신호탄을 키는데 사방에 상어가 천지입니다. 그리고 이 신호탄도 얼마 못 가서 꺼지고 둘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구명 링에 매달려 둘은 사는 듯했지만 리사가 상어에 물려 수면 밑으로 사라집니다. 리사는 상어의 입을 꽉 막고 상어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풀려나서 다시 구조됩니다. 이렇게 둘은 구조되어 배 위에서 상어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안도하고 있던 리사의 다친 손이 피가 흐르지 않고 물속인 듯 공기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리사가 물속에서 공기탱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질소중독으로 환각이 나타났고 그 영향으로 혼자 남은 리사가 겨우 공기통을 건져 다리가 아직 케이지에 낀 채로 케이트가 죽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구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무장한 멕시코 해양 구조대가 도착해서 리사를 구조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닷속과 같습니다. 우리 생명은 각자의 산소통에 든 산소의 양에 달려있습니다. 산소가 충분한 바다 위로 올라가면 더는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산소가 다 떨어져 가는 것만 겁낸다면 바닷속은 지옥이 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누군가가 계속 산소통을 내려줄 수 있고 언젠가는 구조대가 와서 바깥세상으로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현세주의자들입니다. 마치 바닷속이 전부이고 산소,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서로 산소를 빼앗으려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서로 살려고 남을 해치는 지옥이 됩니다. 사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리사는 서로 돕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이 가득 차서 이 지상에서는 각자의 산소통 하나로 살지만 굳이 산소통이 없어도 영원히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으로서는 인간들이 각자의 산소통으로 바닷속에 있어도 곧 죽을 인간들이 아닌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든 산소통을 넣어줄 수 있고 또 질소중독에 걸리기 전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산소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이는 그래서 산 이들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는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산소통이 고갈되면 언제나 끌어올려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이들만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들은 상어에게 물립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리사는 다행히 케이지에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서 살았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제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우리를 구하라고 구세주를 보내주실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실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사랑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도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상이심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믿어서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이 표징입니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누군가를 보낸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지 안에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케이지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 타냐가 자기 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꼬마로프라는 사람이 타냐의 어머니인 라라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타냐를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우리에겐 하늘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산소통도 보내고 양식도 보내고 상어에게 물릴 것을 알면서도 아드님까지 보내신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안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허둥대다 상어에게 결국 먹힙니다. 믿으면 케이지 안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산소가 떨어져 가더라도 케이지에 안에서 기다립시다. 예수님께서 케이지에 줄을 연결하셨고 산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끌어올려 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하는 이유는 그래야 안전한 케이지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무위자연으로 부활을 살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1QHbeDao1I

 -조재형신부-

 

가톨릭교회에서 꼭 믿어야 하는 4가지의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삼위일체상선벌악강생구속입니다천주존재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자연 속에예언자들의 말에성경에인간의 마음에 담아 두셨습니다예술가들은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였습니다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정과 정의입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비와 연민입니다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불의와 억압입니다하느님께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독선과 교만입니다성경은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의 영혼에 하느님의 모상을 담아 두셨습니다그래서 인간은 배우지 않았어도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알게 됩니다마치 새가 배우지 않았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는 3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믿음입니다시간과 공간에서 3가지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물리적으로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본질이 같다는 믿음입니다같은 본질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우리는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물은 얼음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강물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구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물의 본질은 같습니다나비는 애벌레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고치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하늘을 나는 나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모습일 때도 있고사람이 되시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일 때도 있고성령이 되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현대의 물리학은 같은 존재가 각기 다른 모습을 같은 공간에서 보여준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빛은 파동과 물질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양자역학에서 물질은 관찰자의 시각에서 존재하기도 하고사라지기도 합니다.

 

상선벌악은 인과응보회자정리사필귀정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선을 베풀면 축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다는 이치입니다모든 일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다만 우리의 인생이 유한하기에 자연의 섭리를 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그래서 우리 눈에는 선을 베푸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악을 행하는 사람이 풍족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노력하지 않고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합니다하루살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상선벌악이 있음을 믿습니다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그 믿음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순교자들 역시 죽음으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오늘 독서에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우리 신앙의 상선벌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집니다.

 

강생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복음이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고통과 수난가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입니다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목숨까지 바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그 사랑에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징입니다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큰 표징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입니다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 바로 강생구속의 믿음입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양승국신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즉시 마음이 훈훈해지는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늘 그립고 존경하는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1945~2008)께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이어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인 평신도로 선정되셔서, 기림 미사가 봉헌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셉 원장님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탓에, 2005년 위암이 발병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는 병세가 깊어가면서, 극심한 통증으로 힘드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평생 해오시던 무료 진료를 계속해나가셨습니다. 2008년 4월 15일(화)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후, 4월 18일(금) 선종하셨는데, 쓰러지시기 불과 나흘 전까지 미사에 참석하시고, 진료를 하셨습니다. 

 

요셉 원장님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결혼까지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저희 수도자들이 크게 부끄러울 정도로 영적 생활, 기도 생활, 청빈 생활, 나눔 생활에 투철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숙인, 부랑인 환자들의 육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 자활, 특히 영적인 치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대형 종합병원에서, 아니면 개원의로서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을 사실 수도 있었는데, 요셉 원장님께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변방, 가장 낮은 곳에 병원을 세우셨습니다. 다른 종합병원에서는 우리 사회 거물급 인사, 갑부들을 VIP 고객으로 모시려고 다들 혈안인데, 그에게 VIP 고객들은 노숙인들, 외국인 근로자들, 가출 청소년들,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업적을 남기신 요셉 원장님이셨지만, 말년에 늘 이런 고백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그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요셉 원장님은 피를 흘린 순교자는 아니지만, 땀의 순교자, 일의 순교자임을 확신합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는 피를 흘린 순교 성인들은 흘러넘칩니다. 이제는 그분처럼 사랑의 순교자, 즉 삶을 통한 증거자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살아생전 평생토록 지상의 빵, 세상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추구하셨던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께서는 분명히 지금 이 순간, 그토록 그리던 천국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품안에 안겨, 그분께서 나눠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원없이 드시고 계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또 다시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며 요셉 원장님을 기억합니다. 그는 평신도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인가를, 온 몸과 마음으로 증거하셨던 좋은 모델이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의 말씀전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곧 율법으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게 맞서서 일곱 형제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며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요.”

(2마카 7,9)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있었던 ‘반대자들과의 논쟁’(20,1-21,4)의 일부입니다.

여기에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먼저 사두가이파의 질문(루카 20,28-33)은 한 부인이 과부가 되어 다른 시동생 여섯 명과 차례대로 결혼하여 살다가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을 경우에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가상적인 예를 듭니다.

 

이는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숙혼’의 율법,(“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야 하고. 그래서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에 따른 주장인데, 사실 이 질문은 그들이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부활한 사람들의 삶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지상 삶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20,34-36)에서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답변(20,37-38)은 사두가이파들이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서인 탈출기 3장 6절을 통한 대답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이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삭은 씨앗이 죽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발전한 것이듯이,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주는 몸은 주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1코린 15,51-53)

 

그러니 오늘 우리는 파스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두가이가 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사두가이는 누구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니고 있는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만 할 일입니다.

과감하게 바리사이적인 고착과 완고함을 깨고,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 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희망하며 삽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고 우리도 영원에로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소중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상의 삶,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성경의 인물을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늘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고 옛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쓴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도 정말 용서를 받았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죄책감에 묶여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마침표를 찍어 주셨는데도 자꾸 물음표를 던지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미래의 약속된 천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듯 살아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입니다. 사두가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허영에 빠져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는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성공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너무 짜게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오늘 1독서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이야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지상논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상을 넘어 천상의 새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지상은 중간역이고 천상이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잘 지으려면 지금 수확을 하고서 농토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밭을 갈아엎으며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력이 떨어져 다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농사를 계속하려면 힘들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이 세속적인 삶과는 다르게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하더라도 풍요로운 결실을 희망한다면 해야 합니다. 영적인 거름을 주는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시간을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살아계시고 나도 영적인 사람으로 항상 그분 앞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새 생명에로 초대하셨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 땅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 된 새 삶이 펼쳐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지옥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지옥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죽은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늘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희망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보냅니다. 우리 교회는 “평신도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인 우리 생명

 -김찬선신부-

 

저는 지금 특강을 하기 위해 전남 장성에 와 있는데 오랜만에 선배 형제를 만나서
코로나를 앓고 난 뒤 건강은 어떠신지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주 유쾌한 그러나 의미 있는 말을 듣고는 서로 웃었습니다.

 

그 형제께서 ‘살 때까지 살아야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에 제가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고요?’라고 되받은 겁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의미 있는 말을 주고받고 어제오늘 저는

이 말들을 되새김질하게 되었는데 마침 오늘 주제도 죽음과 부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건가요?

죽을 때까지 사는 건가요?

아니면 살 때까지 사는 건가요?

 

제 생각에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그 선배 형제처럼 살 때까지 살려는,

곧 부활의 의지와 희망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죽을 때까지만 살 수 있고,

그래서 부활의 의지와 희망은 도무지 있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기에 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의지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늘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겁니다.

 

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 사람에게 저는 안 믿으면 어쩔 거냐고,

그것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 거냐고 되받아칠 겁니다.

 

저는 믿는 쪽을 선택하고,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저의 생명은 우연이 아니고,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이라고.

 

그리고 내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존재라면

죽음으로 끝나도록 나를 있게 하셨을 리 없다고.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유한한 생명의 존재인 우리도 자식이 죽는 것을 원치 않고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살게 되기를 원하고

죽었더라도 부활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우리는 내 자식이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시고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들이 죽음으로 끝나길 원하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런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믿지 않고 저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27-38)

 

'Lord, '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and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지만, 다들 거부하고 죽는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힘을 북돋우시고 악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신다(복음).

회생

-키앳 대주교-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뿐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도, 잠시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데 다음 생애는 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삶입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사람만이 더 이상 시집과 장가갈 일도 없으며, 천사들처럼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세상의 한계를 알고, 다음 생을 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마치 신이라고 생각하며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사람을 죽이던 안티오코스 4세도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였지만 세상을 압도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야 후회합니다. 침략과 탐욕에 젖어 살았기에 희망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합니다.“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무죄한 유다 민족을 괴롭힌 죄의 대가로 고통 속에 죽어간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 땅에서 죽어가네.” 불의와 욕심은 결국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바뀌는 것일 뿐,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죽은 후에 다시 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기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이런 믿음은 하느님의 교리와도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날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의 힘들고 어려움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의 질문에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선택된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 세상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고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산상설교의 ‘여덟 가지 참 행복’을 믿는 사람들로 첫째는 박애와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 나라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천사와 같아질 것이다.’

하늘 나라의 생활은 인간의 삶과 달라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 마르지도 않으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도 필요없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때문에 대를 잇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 있는 나는 여전히 나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까? 네, 나는 여전히 ‘나’ 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고 예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이던 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였던 태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0세의 늙은 할머니도 70년 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늙어 옛날 모습과 다르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땅속에서 묻혀있던 못 생긴 애벌레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꽃 주위를 맴도는 나비가 되었지만 그 둘은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전혀 다른 생활, 먹고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입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진리는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부모에게 돌아가는 자식과 같습니다. 무한한 갈망을 찾아 헤맸던 갈증들을 주님께서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당신을 위해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에 갈 때까지 제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근심스러웠습니다.”

주님의 자녀이기에 삼위일체의 삶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삼위일체 삶의 행복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훗날 우리가 얻을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며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희망입니다. 더 이상 속절없이 흔들리고 헛되지 않는 삶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근원이신 아버지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자녀가 된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비록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코린 15,43-44)

주님! 다음 생애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2.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우리 모두의 꿈은 다음 세상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마지막은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뜻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마지막과 하늘나라의 삶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마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15년째 쓰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묵상 글 댓글로 누군가가 제 글에 대한 비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글쎄 제가 자기 핸드폰을 해킹해서 자신의 글을 저의 글인 것처럼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니 그냥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사이버 수사대에까지 신고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좋은 소리만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신고까지 당하니 묵상 글 쓰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인데, 이러면서까지 글을 써야 할까?’, ‘처음부터 묵상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더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등등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머물면서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났습니다.

‘언제까지 묵상 글을 써야 하지?’, ‘잠도 잘 못 자면서 묵상 글을 쓰는데, 혹시 건강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또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어떻게 하지?’ 등등 이렇게 미래에 시선에 머무니 역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고, 편안하면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노자)

묵상 글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나의 성장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과의 마음을 글로 정리하면서 주님께 조금씩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신부님 대단하세요. 저희 신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묵상 글을 써주시다니요.”라고 말씀하시면 얼른 고쳐드립니다.

“신자가 아니라 저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닌 또 미래도 아닌 이 순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와의 논쟁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들의 존재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뜻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결혼으로 자손을 낳아 대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기에 사두가이의 말은 모두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또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며 따라서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하느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잘못 해석하고, 오지 않는 미래를 떠올리면서 ‘이럴 것이다’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약점을 안고서 연결되어 있다(로라 판 더누트 립스키).

 부활을 안 믿는 자에겐 부활이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eh4tyaaJIU8 

영화 ‘47m’ (2017)는 상어가 가득 찬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진 두 영국 여성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케이트와 리사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7m나 되는 상어들을 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합니다. 리사는 들어가기 전까지 겁을 먹었지만,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신나서 감탄합니다. 한창 재밌던 중 케이지를 매달고 있던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미터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떨고 있는 리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무전을 하기 위해서 수심 4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무전에 성공합니다. 케이지에 다시 매달아 들어 올릴 고리를 가지고 구조하러 온 사람은 리사의 눈앞에서 상어에게 잡아 먹힙니다. 리사는 상어를 피해 하비에르의 가방에서 작살과 케이지에 매달 인양용 줄을 가져옵니다. 리사는 무전으로 구조 대원의 사망과 인양 줄 확보를 알려주고 케이지에 줄을 묶고 케이지에서 기다리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0미터 지점도 넘어 둘은 구조되는 듯했지만, 줄이 가늘어서 또 끊어져 다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리사의 다리가 케이지의 철근에 깔려 리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위에서 공기탱크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동안 질소중독에 걸릴까 봐 내려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케이트는 산소통을 집어 케이지로 잽싸게 이동하려 하는데 순간 상어에게 물립니다.  

 

    리사는 케이트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케이지 바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새 공기탱크를 가져오기 위해 케이지에 걸려있던 작살총을 쓰기로 하는데 작살은 억지로 안으로 가져오려다 방아쇠가 바깥 나사에 걸려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왼손을 찌르고 맙니다. 피가 나고 공기 게이지는 0바입니다. 겨우 공기탱크를 작살로 가져오는 데 성공해서 교체합니다.

  

    그때 무전으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어에게 공격받아 상처는 입었지만 살아있었습니다. 리사는 자기 조끼를 낀 곳에 넣어 부풀려 다리를 빼내고 케이트를 구하러 갑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다리가 심하게 물려 피가 흐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더 꼬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30미터 위치에서 잠수병 예방을 위해서 5분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신호탄을 키는데 사방에 상어가 천지입니다. 그리고 이 신호탄도 얼마 못 가서 꺼지고 둘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구명 링에 매달려 둘은 사는 듯했지만 리사가 상어에 물려 수면 밑으로 사라집니다. 리사는 상어의 입을 꽉 막고 상어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풀려나서 다시 구조됩니다. 이렇게 둘은 구조되어 배 위에서 상어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안도하고 있던 리사의 다친 손이 피가 흐르지 않고 물속인 듯 공기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리사가 물속에서 공기탱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질소중독으로 환각이 나타났고 그 영향으로 혼자 남은 리사가 겨우 공기통을 건져 다리가 아직 케이지에 낀 채로 케이트가 죽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구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무장한 멕시코 해양 구조대가 도착해서 리사를 구조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닷속과 같습니다. 우리 생명은 각자의 산소통에 든 산소의 양에 달려있습니다. 산소가 충분한 바다 위로 올라가면 더는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산소가 다 떨어져 가는 것만 겁낸다면 바닷속은 지옥이 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누군가가 계속 산소통을 내려줄 수 있고 언젠가는 구조대가 와서 바깥세상으로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현세주의자들입니다. 마치 바닷속이 전부이고 산소,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서로 산소를 빼앗으려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서로 살려고 남을 해치는 지옥이 됩니다. 사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리사는 서로 돕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이 가득 차서 이 지상에서는 각자의 산소통 하나로 살지만 굳이 산소통이 없어도 영원히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으로서는 인간들이 각자의 산소통으로 바닷속에 있어도 곧 죽을 인간들이 아닌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든 산소통을 넣어줄 수 있고 또 질소중독에 걸리기 전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산소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이는 그래서 산 이들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는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산소통이 고갈되면 언제나 끌어올려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이들만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들은 상어에게 물립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리사는 다행히 케이지에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서 살았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제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우리를 구하라고 구세주를 보내주실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실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사랑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도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상이심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믿어서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이 표징입니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누군가를 보낸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지 안에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케이지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 타냐가 자기 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꼬마로프라는 사람이 타냐의 어머니인 라라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타냐를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우리에겐 하늘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산소통도 보내고 양식도 보내고 상어에게 물릴 것을 알면서도 아드님까지 보내신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안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허둥대다 상어에게 결국 먹힙니다. 믿으면 케이지 안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산소가 떨어져 가더라도 케이지에 안에서 기다립시다. 예수님께서 케이지에 줄을 연결하셨고 산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끌어올려 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하는 이유는 그래야 안전한 케이지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무위자연으로 부활을 살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1QHbeDao1I

 -조재형신부-

 

가톨릭교회에서 꼭 믿어야 하는 4가지의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삼위일체상선벌악강생구속입니다천주존재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자연 속에예언자들의 말에성경에인간의 마음에 담아 두셨습니다예술가들은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였습니다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정과 정의입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비와 연민입니다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불의와 억압입니다하느님께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독선과 교만입니다성경은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의 영혼에 하느님의 모상을 담아 두셨습니다그래서 인간은 배우지 않았어도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알게 됩니다마치 새가 배우지 않았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는 3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믿음입니다시간과 공간에서 3가지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물리적으로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본질이 같다는 믿음입니다같은 본질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우리는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물은 얼음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강물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구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물의 본질은 같습니다나비는 애벌레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고치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하늘을 나는 나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모습일 때도 있고사람이 되시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일 때도 있고성령이 되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현대의 물리학은 같은 존재가 각기 다른 모습을 같은 공간에서 보여준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빛은 파동과 물질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양자역학에서 물질은 관찰자의 시각에서 존재하기도 하고사라지기도 합니다.

 

상선벌악은 인과응보회자정리사필귀정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선을 베풀면 축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다는 이치입니다모든 일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다만 우리의 인생이 유한하기에 자연의 섭리를 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그래서 우리 눈에는 선을 베푸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악을 행하는 사람이 풍족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노력하지 않고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합니다하루살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상선벌악이 있음을 믿습니다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그 믿음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순교자들 역시 죽음으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오늘 독서에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우리 신앙의 상선벌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집니다.

 

강생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복음이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고통과 수난가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입니다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목숨까지 바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그 사랑에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징입니다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큰 표징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입니다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 바로 강생구속의 믿음입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양승국신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즉시 마음이 훈훈해지는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늘 그립고 존경하는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1945~2008)께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이어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인 평신도로 선정되셔서, 기림 미사가 봉헌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셉 원장님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탓에, 2005년 위암이 발병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는 병세가 깊어가면서, 극심한 통증으로 힘드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평생 해오시던 무료 진료를 계속해나가셨습니다. 2008년 4월 15일(화)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후, 4월 18일(금) 선종하셨는데, 쓰러지시기 불과 나흘 전까지 미사에 참석하시고, 진료를 하셨습니다. 

 

요셉 원장님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결혼까지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저희 수도자들이 크게 부끄러울 정도로 영적 생활, 기도 생활, 청빈 생활, 나눔 생활에 투철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숙인, 부랑인 환자들의 육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 자활, 특히 영적인 치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대형 종합병원에서, 아니면 개원의로서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을 사실 수도 있었는데, 요셉 원장님께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변방, 가장 낮은 곳에 병원을 세우셨습니다. 다른 종합병원에서는 우리 사회 거물급 인사, 갑부들을 VIP 고객으로 모시려고 다들 혈안인데, 그에게 VIP 고객들은 노숙인들, 외국인 근로자들, 가출 청소년들,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업적을 남기신 요셉 원장님이셨지만, 말년에 늘 이런 고백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그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요셉 원장님은 피를 흘린 순교자는 아니지만, 땀의 순교자, 일의 순교자임을 확신합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는 피를 흘린 순교 성인들은 흘러넘칩니다. 이제는 그분처럼 사랑의 순교자, 즉 삶을 통한 증거자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살아생전 평생토록 지상의 빵, 세상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추구하셨던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께서는 분명히 지금 이 순간, 그토록 그리던 천국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품안에 안겨, 그분께서 나눠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원없이 드시고 계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또 다시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며 요셉 원장님을 기억합니다. 그는 평신도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인가를, 온 몸과 마음으로 증거하셨던 좋은 모델이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의 말씀전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곧 율법으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게 맞서서 일곱 형제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며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요.”

(2마카 7,9)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있었던 ‘반대자들과의 논쟁’(20,1-21,4)의 일부입니다.

여기에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먼저 사두가이파의 질문(루카 20,28-33)은 한 부인이 과부가 되어 다른 시동생 여섯 명과 차례대로 결혼하여 살다가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을 경우에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가상적인 예를 듭니다.

 

이는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숙혼’의 율법,(“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야 하고. 그래서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에 따른 주장인데, 사실 이 질문은 그들이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부활한 사람들의 삶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지상 삶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20,34-36)에서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답변(20,37-38)은 사두가이파들이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서인 탈출기 3장 6절을 통한 대답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이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삭은 씨앗이 죽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발전한 것이듯이,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주는 몸은 주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1코린 15,51-53)

 

그러니 오늘 우리는 파스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두가이가 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사두가이는 누구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니고 있는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만 할 일입니다.

과감하게 바리사이적인 고착과 완고함을 깨고,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 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희망하며 삽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고 우리도 영원에로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소중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상의 삶,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성경의 인물을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늘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고 옛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쓴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도 정말 용서를 받았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죄책감에 묶여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마침표를 찍어 주셨는데도 자꾸 물음표를 던지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미래의 약속된 천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듯 살아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입니다. 사두가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허영에 빠져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는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성공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너무 짜게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오늘 1독서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이야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지상논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상을 넘어 천상의 새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지상은 중간역이고 천상이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잘 지으려면 지금 수확을 하고서 농토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밭을 갈아엎으며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력이 떨어져 다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농사를 계속하려면 힘들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이 세속적인 삶과는 다르게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하더라도 풍요로운 결실을 희망한다면 해야 합니다. 영적인 거름을 주는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시간을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살아계시고 나도 영적인 사람으로 항상 그분 앞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새 생명에로 초대하셨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 땅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 된 새 삶이 펼쳐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지옥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지옥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죽은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늘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희망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보냅니다. 우리 교회는 “평신도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인 우리 생명

 -김찬선신부-

 

저는 지금 특강을 하기 위해 전남 장성에 와 있는데 오랜만에 선배 형제를 만나서
코로나를 앓고 난 뒤 건강은 어떠신지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주 유쾌한 그러나 의미 있는 말을 듣고는 서로 웃었습니다.

 

그 형제께서 ‘살 때까지 살아야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에 제가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고요?’라고 되받은 겁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의미 있는 말을 주고받고 어제오늘 저는

이 말들을 되새김질하게 되었는데 마침 오늘 주제도 죽음과 부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건가요?

죽을 때까지 사는 건가요?

아니면 살 때까지 사는 건가요?

 

제 생각에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그 선배 형제처럼 살 때까지 살려는,

곧 부활의 의지와 희망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죽을 때까지만 살 수 있고,

그래서 부활의 의지와 희망은 도무지 있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기에 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의지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늘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겁니다.

 

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 사람에게 저는 안 믿으면 어쩔 거냐고,

그것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 거냐고 되받아칠 겁니다.

 

저는 믿는 쪽을 선택하고,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저의 생명은 우연이 아니고,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이라고.

 

그리고 내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존재라면

죽음으로 끝나도록 나를 있게 하셨을 리 없다고.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유한한 생명의 존재인 우리도 자식이 죽는 것을 원치 않고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살게 되기를 원하고

죽었더라도 부활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우리는 내 자식이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시고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들이 죽음으로 끝나길 원하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런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믿지 않고 저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루카 20,27-38)

 

'Lord, '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and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지만, 다들 거부하고 죽는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힘을 북돋우시고 악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하신다(복음).

회생

-키앳 대주교-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 내가 존재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뿐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도, 잠시 후에 일어날 일도 모르는데 다음 생애는 더욱 알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삶입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 사람만이 더 이상 시집과 장가갈 일도 없으며, 천사들처럼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세상의 한계를 알고, 다음 생을 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마치 신이라고 생각하며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사람을 죽이던 안티오코스 4세도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였지만 세상을 압도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야 후회합니다. 침략과 탐욕에 젖어 살았기에 희망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었고 온갖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합니다.“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 무죄한 유다 민족을 괴롭힌 죄의 대가로 고통 속에 죽어간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 땅에서 죽어가네.” 불의와 욕심은 결국 불행을 낳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바뀌는 것일 뿐,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죽은 후에 다시 저 세상에서 살거라고 믿기 때문에 조상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이런 믿음은 하느님의 교리와도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날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의 힘들고 어려움을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의 질문에 진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선택된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음 세상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고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산상설교의 ‘여덟 가지 참 행복’을 믿는 사람들로 첫째는 박애와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하늘 나라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천사와 같아질 것이다.’

하늘 나라의 생활은 인간의 삶과 달라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 마르지도 않으니 먹고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시집이나 장가도 필요없습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때문에 대를 잇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 있는 나는 여전히 나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까? 네, 나는 여전히 ‘나’ 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고 예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이던 태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움직였던 태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90세의 늙은 할머니도 70년 전에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늙어 옛날 모습과 다르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땅속에서 묻혀있던 못 생긴 애벌레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꽃 주위를 맴도는 나비가 되었지만 그 둘은 하나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전혀 다른 생활, 먹고 마시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입니다. 비록 다른 점이 있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세상입니다.

세 번째 진리는 ‘나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오랜 방황을 끝내고 부모에게 돌아가는 자식과 같습니다. 무한한 갈망을 찾아 헤맸던 갈증들을 주님께서는 행복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당신을 위해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에 갈 때까지 제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근심스러웠습니다.”

주님의 자녀이기에 삼위일체의 삶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삼위일체 삶의 행복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훗날 우리가 얻을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며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희망입니다. 더 이상 속절없이 흔들리고 헛되지 않는 삶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근원이신 아버지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자녀가 된다면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비록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코린 15,43-44)

주님! 다음 생애의 자격을 얻을 수 있도록 오늘 하루를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2.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3. 우리 모두의 꿈은 다음 세상에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지금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말씀의 실천

1. 우리의 마지막은 스스로 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뜻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마지막과 하늘나라의 삶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마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15년째 쓰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묵상 글 댓글로 누군가가 제 글에 대한 비판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글쎄 제가 자기 핸드폰을 해킹해서 자신의 글을 저의 글인 것처럼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니 그냥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사이버 수사대에까지 신고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좋은 소리만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신고까지 당하니 묵상 글 쓰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쓰고 있는 것인데, 이러면서까지 글을 써야 할까?’, ‘처음부터 묵상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더 편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 등등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머물면서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났습니다.

‘언제까지 묵상 글을 써야 하지?’, ‘잠도 잘 못 자면서 묵상 글을 쓰는데, 혹시 건강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또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어떻게 하지?’ 등등 이렇게 미래에 시선에 머무니 역시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울하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면 미래에 사는 것이고, 편안하면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노자)

묵상 글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나의 성장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과의 마음을 글로 정리하면서 주님께 조금씩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신부님 대단하세요. 저희 신자를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묵상 글을 써주시다니요.”라고 말씀하시면 얼른 고쳐드립니다.

“신자가 아니라 저를 위해 쓰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닌 또 미래도 아닌 이 순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와의 논쟁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들의 존재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뜻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결혼으로 자손을 낳아 대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기에 사두가이의 말은 모두 잘못된 말이었습니다. 또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며 따라서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하느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잘못 해석하고, 오지 않는 미래를 떠올리면서 ‘이럴 것이다’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을 위해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약점을 안고서 연결되어 있다(로라 판 더누트 립스키).

 부활을 안 믿는 자에겐 부활이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eh4tyaaJIU8 

영화 ‘47m’ (2017)는 상어가 가득 찬 멕시코 바닷속에 떨어진 두 영국 여성의 탈출 이야기입니다. 케이트와 리사는 케이지 안에 들어가 7m나 되는 상어들을 보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합니다. 리사는 들어가기 전까지 겁을 먹었지만, 바닷속의 환상적인 풍경을 보고 신나서 감탄합니다. 한창 재밌던 중 케이지를 매달고 있던 줄이 끊어져서 엄청난 속도로 물속 47미터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떨고 있는 리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무전을 하기 위해서 수심 40미터 지점까지 올라가 무전에 성공합니다. 케이지에 다시 매달아 들어 올릴 고리를 가지고 구조하러 온 사람은 리사의 눈앞에서 상어에게 잡아 먹힙니다. 리사는 상어를 피해 하비에르의 가방에서 작살과 케이지에 매달 인양용 줄을 가져옵니다. 리사는 무전으로 구조 대원의 사망과 인양 줄 확보를 알려주고 케이지에 줄을 묶고 케이지에서 기다리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30미터 지점도 넘어 둘은 구조되는 듯했지만, 줄이 가늘어서 또 끊어져 다시 떨어집니다. 떨어지면서 리사의 다리가 케이지의 철근에 깔려 리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위에서 공기탱크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동안 질소중독에 걸릴까 봐 내려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케이트는 산소통을 집어 케이지로 잽싸게 이동하려 하는데 순간 상어에게 물립니다.  

 

    리사는 케이트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케이지 바깥 가까운 곳에 떨어진 새 공기탱크를 가져오기 위해 케이지에 걸려있던 작살총을 쓰기로 하는데 작살은 억지로 안으로 가져오려다 방아쇠가 바깥 나사에 걸려 발사되는 바람에 자기 왼손을 찌르고 맙니다. 피가 나고 공기 게이지는 0바입니다. 겨우 공기탱크를 작살로 가져오는 데 성공해서 교체합니다.

  

    그때 무전으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상어에게 공격받아 상처는 입었지만 살아있었습니다. 리사는 자기 조끼를 낀 곳에 넣어 부풀려 다리를 빼내고 케이트를 구하러 갑니다. 그러나 케이트의 다리가 심하게 물려 피가 흐르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더 꼬이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죽기 살기로 위로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30미터 위치에서 잠수병 예방을 위해서 5분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마지막 신호탄을 키는데 사방에 상어가 천지입니다. 그리고 이 신호탄도 얼마 못 가서 꺼지고 둘은 전속력으로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구명 링에 매달려 둘은 사는 듯했지만 리사가 상어에 물려 수면 밑으로 사라집니다. 리사는 상어의 입을 꽉 막고 상어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 풀려나서 다시 구조됩니다. 이렇게 둘은 구조되어 배 위에서 상어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안도하고 있던 리사의 다친 손이 피가 흐르지 않고 물속인 듯 공기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리사가 물속에서 공기탱크를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질소중독으로 환각이 나타났고 그 영향으로 혼자 남은 리사가 겨우 공기통을 건져 다리가 아직 케이지에 낀 채로 케이트가 죽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구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무장한 멕시코 해양 구조대가 도착해서 리사를 구조해서 수면으로 올라오고 영화는 끝납니다.

  

    이 세상은 마치 바닷속과 같습니다. 우리 생명은 각자의 산소통에 든 산소의 양에 달려있습니다. 산소가 충분한 바다 위로 올라가면 더는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산소가 다 떨어져 가는 것만 겁낸다면 바닷속은 지옥이 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누군가가 계속 산소통을 내려줄 수 있고 언젠가는 구조대가 와서 바깥세상으로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현세주의자들입니다. 마치 바닷속이 전부이고 산소,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서로 산소를 빼앗으려 아비규환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서로 살려고 남을 해치는 지옥이 됩니다. 사실 지금 세상이 그렇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이트와 리사는 서로 돕습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 곧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생명이 가득 차서 이 지상에서는 각자의 산소통 하나로 살지만 굳이 산소통이 없어도 영원히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상의 삶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시선으로서는 인간들이 각자의 산소통으로 바닷속에 있어도 곧 죽을 인간들이 아닌 영원히 사는 인간으로 보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든 산소통을 넣어줄 수 있고 또 질소중독에 걸리기 전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로 끌어올려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산소 게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이는 그래서 산 이들이고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는 죽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산소통이 고갈되면 언제나 끌어올려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이들만을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이들은 상어에게 물립니다. 그냥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리사는 다행히 케이지에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서 살았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이제 부활에 대해 더 확실한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우리를 구하라고 구세주를 보내주실 하느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거실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사랑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도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하느님이 사상이심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믿어서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을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이 표징입니다. 위에서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누군가를 보낸 것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케이지 안에서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 케이지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징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전해지는 교회입니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 타냐가 자기 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꼬마로프라는 사람이 타냐의 어머니인 라라를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타냐를 키운 것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우리에겐 하늘에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산소통도 보내고 양식도 보내고 상어에게 물릴 것을 알면서도 아드님까지 보내신 분이 계심을 믿습니다. 안 믿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허둥대다 상어에게 결국 먹힙니다. 믿으면 케이지 안에서 바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산소가 떨어져 가더라도 케이지에 안에서 기다립시다. 예수님께서 케이지에 줄을 연결하셨고 산소가 다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끌어올려 주실 것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부활하는 이유는 그래야 안전한 케이지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무위자연으로 부활을 살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1QHbeDao1I

 -조재형신부-

 

가톨릭교회에서 꼭 믿어야 하는 4가지의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삼위일체상선벌악강생구속입니다천주존재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자연 속에예언자들의 말에성경에인간의 마음에 담아 두셨습니다예술가들은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였습니다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였습니다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습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정과 정의입니다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비와 연민입니다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불의와 억압입니다하느님께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독선과 교만입니다성경은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인간의 영혼에 하느님의 모상을 담아 두셨습니다그래서 인간은 배우지 않았어도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알게 됩니다마치 새가 배우지 않았어도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는 3가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신다는 믿음입니다시간과 공간에서 3가지의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 물리적으로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본질이 같다는 믿음입니다같은 본질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우리는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물은 얼음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강물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구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물의 본질은 같습니다나비는 애벌레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고치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고하늘을 나는 나비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모습일 때도 있고사람이 되시어 복음을 전하는 모습일 때도 있고성령이 되시어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본질은 같습니다현대의 물리학은 같은 존재가 각기 다른 모습을 같은 공간에서 보여준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빛은 파동과 물질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양자역학에서 물질은 관찰자의 시각에서 존재하기도 하고사라지기도 합니다.

 

상선벌악은 인과응보회자정리사필귀정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선을 베풀면 축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다는 이치입니다모든 일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다만 우리의 인생이 유한하기에 자연의 섭리를 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그래서 우리 눈에는 선을 베푸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악을 행하는 사람이 풍족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노력하지 않고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합니다하루살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상선벌악이 있음을 믿습니다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그 믿음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기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순교자들 역시 죽음으로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오늘 독서에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우리 신앙의 상선벌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집니다.

 

강생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복음이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고통과 수난가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입니다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목숨까지 바치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그 사랑에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징입니다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고병자들을 치유해 주셨고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가장 큰 표징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것입니다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다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 바로 강생구속의 믿음입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양승국신부-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즉시 마음이 훈훈해지는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늘 그립고 존경하는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1945~2008)께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에 이어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인 평신도로 선정되셔서, 기림 미사가 봉헌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셉 원장님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은 무료로 치료해 주셨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탓에, 2005년 위암이 발병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는 병세가 깊어가면서, 극심한 통증으로 힘드셨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평생 해오시던 무료 진료를 계속해나가셨습니다. 2008년 4월 15일(화)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후, 4월 18일(금) 선종하셨는데, 쓰러지시기 불과 나흘 전까지 미사에 참석하시고, 진료를 하셨습니다. 

 

요셉 원장님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결혼까지 포기하셨습니다. 그분은 저희 수도자들이 크게 부끄러울 정도로 영적 생활, 기도 생활, 청빈 생활, 나눔 생활에 투철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숙인, 부랑인 환자들의 육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 자활, 특히 영적인 치료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대형 종합병원에서, 아니면 개원의로서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을 사실 수도 있었는데, 요셉 원장님께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변방, 가장 낮은 곳에 병원을 세우셨습니다. 다른 종합병원에서는 우리 사회 거물급 인사, 갑부들을 VIP 고객으로 모시려고 다들 혈안인데, 그에게 VIP 고객들은 노숙인들, 외국인 근로자들, 가출 청소년들,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업적을 남기신 요셉 원장님이셨지만, 말년에 늘 이런 고백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그분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입니다. “환자들에게 좀 더 잘 해주었더라면...”

  

요셉 원장님은 피를 흘린 순교자는 아니지만, 땀의 순교자, 일의 순교자임을 확신합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는 피를 흘린 순교 성인들은 흘러넘칩니다. 이제는 그분처럼 사랑의 순교자, 즉 삶을 통한 증거자가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살아생전 평생토록 지상의 빵, 세상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추구하셨던 선우 경식 요셉 원장님께서는 분명히 지금 이 순간, 그토록 그리던 천국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 품안에 안겨, 그분께서 나눠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원없이 드시고 계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또 다시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며 요셉 원장님을 기억합니다. 그는 평신도로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인가를, 온 몸과 마음으로 증거하셨던 좋은 모델이었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의 말씀전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곧 율법으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게 맞서서 일곱 형제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며 죽어가면서 말합니다.

“온 세상의 임금께서는 ~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요.”

(2마카 7,9)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있었던 ‘반대자들과의 논쟁’(20,1-21,4)의 일부입니다.

여기에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먼저 사두가이파의 질문(루카 20,28-33)은 한 부인이 과부가 되어 다른 시동생 여섯 명과 차례대로 결혼하여 살다가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을 경우에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가상적인 예를 듭니다.

 

이는 <신명기> 25장 5-6절에 나오는 ‘수숙혼’의 율법,(“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야 하고. 그래서 낳은 첫 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에 따른 주장인데, 사실 이 질문은 그들이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부활한 사람들의 삶을 장가가고 시집가는 등 지상 삶의 연장이라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답변(20,34-36)에서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답변(20,37-38)은 사두가이파들이 존중하는 모세의 율법서인 탈출기 3장 6절을 통한 대답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성조들이 부활하여 하느님 가까이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이는 하느님께서 성조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음은 결정적 단절이요 파괴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죽음은 우리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죽음으로 인생이 허무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삭은 씨앗이 죽은 것이 아니라, 씨앗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발전한 것이듯이,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주는 몸은 주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1코린 15,51-53)

 

그러니 오늘 우리는 파스카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두가이가 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사두가이는 누구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갇혀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지니고 있는 현재의 틀(패러다임)을 과감히 깨야만 할 일입니다.

과감하게 바리사이적인 고착과 완고함을 깨고,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 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희망하며 삽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고 우리도 영원에로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소중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천상의 삶,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성경의 인물을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늘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고 옛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쓴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허물에 대해서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도 정말 용서를 받았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죄책감에 묶여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마침표를 찍어 주셨는데도 자꾸 물음표를 던지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미래의 약속된 천상이 없기 때문에 지금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듯 살아갑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입니다. 사두가이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삶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사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허영에 빠져 오늘도 여전히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의 부와 명예를 추구하며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는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의 성공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일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그야말로 너무 짜게 살아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살았습니다.

 

오늘 1독서의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이야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지상논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지상을 넘어 천상의 새 삶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지상은 중간역이고 천상이 종착역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잘 지으려면 지금 수확을 하고서 농토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름을 주고 밭을 갈아엎으며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력이 떨어져 다음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고달프고 힘들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농사를 계속하려면 힘들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이 세속적인 삶과는 다르게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하더라도 풍요로운 결실을 희망한다면 해야 합니다. 영적인 거름을 주는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며 기도시간을 반드시 챙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천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언제나 살아계시고 나도 영적인 사람으로 항상 그분 앞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새 생명에로 초대하셨고,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은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 땅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믿고,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고 또한, 거기에는 축복 된 새 삶이 펼쳐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지옥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지옥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죽은 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오늘을 천국으로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늘 살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영원을’ 즐겁게, 희망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보냅니다. 우리 교회는 “평신도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닌 사명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인 우리 생명

 -김찬선신부-

 

저는 지금 특강을 하기 위해 전남 장성에 와 있는데 오랜만에 선배 형제를 만나서
코로나를 앓고 난 뒤 건강은 어떠신지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주 유쾌한 그러나 의미 있는 말을 듣고는 서로 웃었습니다.

 

그 형제께서 ‘살 때까지 살아야지’라고 하신 겁니다.

이에 제가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아니고요?’라고 되받은 겁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의미 있는 말을 주고받고 어제오늘 저는

이 말들을 되새김질하게 되었는데 마침 오늘 주제도 죽음과 부활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건가요?

죽을 때까지 사는 건가요?

아니면 살 때까지 사는 건가요?

 

제 생각에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삶과 죽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그 선배 형제처럼 살 때까지 살려는,

곧 부활의 의지와 희망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믿음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죽을 때까지만 살 수 있고,

그래서 부활의 의지와 희망은 도무지 있을 수 없지만,

하느님께는 죽음이 없기에 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의지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오늘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믿는 겁니다.

 

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는 사람에게 저는 안 믿으면 어쩔 거냐고,

그것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을 거냐고 되받아칠 겁니다.

 

저는 믿는 쪽을 선택하고,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저의 생명은 우연이 아니고,

생명이신 하느님 사랑의 필연이라고.

 

그리고 내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이 사랑으로 창조하신 존재라면

죽음으로 끝나도록 나를 있게 하셨을 리 없다고.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유한한 생명의 존재인 우리도 자식이 죽는 것을 원치 않고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살게 되기를 원하고

죽었더라도 부활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우리의 사랑이 그리 크지 않아도

우리는 내 자식이 죽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시고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들이 죽음으로 끝나길 원하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런 하느님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을 믿지 않고 저의 부활을 믿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