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루가 17,1-6)
If your brother sins, rebuke him;
and if he repents, forgive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원로들을 임명하라며,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조심하고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요즘 군대에서는 사병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평일 일과 후와 휴일에는 휴대전화 소지와 사용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고, 올해 말까지 시범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군 생활할 때는 소위 휴대전화 전에 많이 사용했던 삐삐도 있기 전이어서 무조건 공중전화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중전화비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수신자 부담 통화’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집에 전화 한번 하고 싶어서 공중전화 앞에서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편하게 휴대전화로 통화할 수 있습니다.
신부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려고….”라면서 군대 다녀온 거의 모든 신부가 휴대전화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군대에만 충실해야지, 휴대전화가 있으면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한 뒤에 탈영과 자살이 급격하게 줄었데.”
저 때의 군대 생활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군대는 옛날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휴대전화가 사람을 살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경험이 무조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또 환경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강조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의 사람은 무조건 율법 중심이었지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세세한 규정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탈리오 법칙으로, 피해자가 받은 피해 정도와 동일한 손해를 가해자에게 내리는 보복 법칙이 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하지 말고 그 대신 용서하라는 새 윤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용서는 한계가 없는 것으로, 회개하거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먼저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사랑을 통해서 더욱 굳건해집니다.
별처럼 빛나도록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tpdA4NUjqc
-조재형신부-
뉴욕에 있는 신문사는 교구 신부님들의 ‘사랑방’과 같습니다. 안식년으로 여행을 오신 신부님, 유학 온 신부님, 한국에서 휴가 온 신부님들이 잠시 머물다 가곤합니다. 안식년 중인 신부님이 며칠 머물다 갔습니다. 신부님은 27년 전에 보좌신부님으로 퀸즈의 한인성당에 3년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본당 청년들과의 모임에 잠시 함께 하였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2번 놀랐습니다. 하나는 기억력입니다. 저도 나름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데 신부님의 기억력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했습니다. 27년 전의 청년들 이름과 세례명을 거의 기억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름은 생각나지만 세례명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얼굴은 생각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이름은 생각나는데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심한 배려입니다. 서울 간 오빠가 동생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듯이 신부님은 오랜만에 만나는 청년들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받는데 익숙해 있던 제게는 다소 생소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그렇게 반가운 것은 신부님과 청년들이 좋은 추억을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시 만나도 반가운 인연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처와 아픔이 남는 만남도 있습니다. 기억력이 좋아도, 물질적인 보상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만남입니다. 그 이유는 품격과 자질의 문제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셨습니다. 왜 아팠는지, 언제부터 아팠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작은 약점을 들춰내려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세리를 낮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는 바리사이들의 행동을 나무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비난하고 평가하기 보다는 먼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인연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그는 마침내 평생토록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사도로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나 다른 사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고, 함께 생활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살아생전 직접 자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목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 질 때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사도로서의 신원, 사명, 의무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티토서에서 어떤 사람이 사도요 참 목자인지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교우들의 신앙을 성장시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
거만하지 않은 사람
쉽사리 화내지 않고 자제력을 갖춘 사람
과음하지 않고 난폭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
손님을 환대하는 사람
선을 사랑하는 사람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
하나하나 점검해보니 저는 사도요 목자로서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과음하지 않는 사람’이란 대목에서 크게 마음이 걸립니다. 환골탈태해야 할 부분입니다. ‘신중한 사람’이란 표현 앞에서도 많이 송구스럽습니다. 매사에 더 진지해지고 신중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쉽사리 화내지 않고 자제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대목에서는 부끄러움이 참으로 큽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심하게 화를 냈던지, 얼마나 많은 경우 이성과 자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지...
한 사목자가 쉽사리 화내고 자제력을 상실할 때, 그가 담당하고 있는 공동체가 얼마나 힘들게 되는지를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지도자가 수시로 분노를 터트릴 때, 그를 따르는 양들은 얼마나 불안해지고 당혹스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사랑과 온유의 박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입니다. 그 역시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한 성격하셨더군요.
젊은 사제 시절 그는 개신교도들이 활개를 치던 샤블레 지방으로 선교를 떠납니다. 뜻하는 대로 되지 않자 크게 분노를 합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싹 쓸어버릴까 고민도 했습니다.
그렇게 산전수전 다 겪고, 연세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젊은 시절의 혈기로 저질렀던 과오를 크게 참회합니다. 동시에 열렬한 기도 생활과 더불어 비약적인 영적 성장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어느날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외풍에도 깊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일 년, 이 년, 십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였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토록 그를 흠모했고 존경했고 추종했습니다.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반영억신부-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유혹은 나 자신의 연약함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2주 월요일-제자답게 사랑하기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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