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Margaret K 2022. 11. 9. 06:54

2022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 2,13-22)

He was speaking about the temple of his Body.
Therefore, when he was raised from the dead,
his disciples remembered that he had said this,
and they came to believe the Scripture
and the word Jesus had spok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런 분에게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말하는 ‘사람들의 네 가지 후회’를 이야기해 드리곤 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후회하는 대표적인 네 가지 후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안정된 삶을 갖지 못한 것.

2) 용기 내지 못한 것.

3) 옳은 일을 하지 못한 것.

4) 누군가와 멀어지기 전에 연락하지 못한 것.

후회하지 않는 삶이 가장 잘살고 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이 네 가지 후회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후회를 많이 만드는 삶이 아닌, 후회를 줄여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바라보면, 가지고 있는 것을 소홀히 하며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후회 없이 잘 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삶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장면을 보여 줍니다. 파스카 축제에는 모든 사람이 사방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그들은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성전 안이 얼마나 복잡했을지가 예상됩니다. 희생제물로 사용될 동물도 사람의 수만큼 성전 안에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동물 우는 소리로 가득하고, 이 동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고함 등을 볼 때 완전히 시장터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파스카 축제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사람이 몰려듭니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키레네, 로마 등지 등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 역시 무척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돈을 환전해야 제물용 동물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 또한 들끓었습니다.

이런 환경을 기도하는 공간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성전을 지키는 대사제들은 이런 환경에서 충분히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당시에 성전은 재건 중이었습니다. 이곳저곳 공사하느라 정신없는 상황에 놓여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이렇게 시장터와 같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과연 후회하지 않을 일일까요?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성전이라면 허물라고, 그리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우리의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건하게 모시고 있을까요? 이제 더 이상 후회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깃들여 있었다. 보송한 수건, 시원하게 들이켜는 물 한 컵, 따사로운 햇볕(봉현). 

 예수님은 어떤 모습의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a0dttlZkvu0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러한 축일이 썩 기쁘지 않습니다. 라테라노 성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앞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상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나의 성전을 재건하여라!”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돌로 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다 수도회 회칙을 승인 받기 위해 라테라노 성전으로 옵니다. 그곳에 교황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당의 규모에 놀랍니다. 그런 모습이 청동으로 라테라노 성당 앞쪽에 있습니다. 교황은 거지로 지내는 탁발 수도회를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하지만 꿈에 한 거지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는 프란치스코를 다시 불러 회칙을 승인합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주님께서 교회를 재건하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다미아노 성당이 아닌 참 하느님의 성전을 의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이 가득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허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짓겠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집입니다. 첫 성전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성막을 짓기 전에 그들이 가진 성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입니다. 제단이 있으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지 않으면 새 성전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돌로 된 성전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금송아지를 섬기는 성전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커다란 성전을 지어 놓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장사꾼들을 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을 지으신 일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는 곳이 다 성전이었습니다. 사실 신약의 첫 성전은 성 목요일의 마르코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성전들이 모이는 곳에 따로 또 다른 성전이라 불리는 돌로 된 것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뜨거움이 식어가기 시작하였을 때는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는 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교황 이노첸시우스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세 때의 교회의 부와 권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고 낮은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교황청으로 돈 주머니가 수송되어 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이 말은 성전에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지나갈 때 앉은뱅이가 자선을 청하자, 베드로가 대답했던 말을 인용해 그 때처럼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성인이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어나 걸어라.’하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집중하면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세상 것에 먼저 시선을 두면 세상 것 안에 머물러 주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총은 얻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토마스가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영과 육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삶을 절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솔로몬에 커다란 성전을 지었을 때부터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성전을 재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헤로데가 리모델링 한 성전인데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장사꾼들을 들여보내 세금을 거둬내야만 했습니다. 로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종교가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뜨거움이 식어갔습니다. 바티칸 성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매우 필요하여 어쨌건 개신교가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성전의 크기는 신자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의 다른 성당과 비교해서 조금 더 크고 화려한 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냅니다. 이렇게 되면 성직자들은 그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 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돈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도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참 하느님의 성전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때가 되면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묵시 21, 22) 

 

    일본의 원폭피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한 작가가 있습니다. 나가이 다카시입니다. 의사였던 그는 본인도 원폭 피해를 입고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그 시한부 인생 동안 무려 17권의 책을 집필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습니다. 

    그는 한 평짜리 집을 마련하고 ‘여기당(여기 애인(如己愛人: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의 줄임말)’ 이란 이름을 붙여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글을 썼습니다. 여기당은 유리로 돼 있는데 옆으로 보면 성당 성모상이 보여, 그 성모님을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글을 썼습니다. 매년 20만 명 가까이 순례객이 여기당을 찾고 있습니다.  

 

    한 평짜리 집이지만 매년 20만 명이 찾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커다란 성당은 원자폭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희생이 담긴 여기당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어쩌면 외적인 성전 건물이 커지면 내적 성전은 피폐하여가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먼저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크고 화려한 건물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요? 성전이 크기 때문에 장사꾼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 관리를 위해 그들을 허락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작은 성당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전이 크면 장사꾼이 모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가 묵었던 토굴, 그리고 여기당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참 성전이 아닐까요? 

  

    성전이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징한다면 그러한 성당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유지할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긴 참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돈이 들어왔을 때 성당을 짓지 않고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러한 학교에서 하는 미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GJXclRKQN0

 -조재형신부-

 

저는 신학생 때 학생회 간부를 맞지는 않았지만 자치회장을 위한 지지연설은 2번 했습니다다행히 제가 지지했던 후보가 자치회장이 되었고저는 덕분에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그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가톨릭의 장점은 질서이고프로테스탄트의 장점은 자유입니다가톨릭의 단점은 변화에 쉽게 대응하기 힘들고프로테스탄트의 단점은 구심점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후보는 교회의 전통과 학교의 지침을 잘 따르면서 신학생들의 복지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님제가 여기 있습니다저를 보내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후보자는 학생을 위해서학교를 위해서 헌신 할 거라고 하였습니다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인용하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치회장이라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그때 자치회장을 했던 친구는 교구에서 중책을 맡아서 일하고 있습니다교회는 교계제도와 성전이 있기에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교계제도와 성전을 이끌어가는 사람입니다.

 

지난 2019년 성주간 월요일에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노트르담 성당의 화재가 있었습니다저도 몇 번 방문했었습니다유럽의 자존심이 느껴지는 성당입니다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프랑스는 교회의 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프랑스의 상징이 불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그러나 성당이 불에 타고 있는 시간에 많은 사람이 성당 주변에서 성가를 불렀습니다눈에 보이는 성당은 화재로 사라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었습니다파리의 시민은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지만식어가는 신앙을 되돌아보았습니다건물은 복원할 수 있지만 식어버린 신앙을 다시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많은 사람이 어머니와 같은 성당의 화재를 보면서 자신들의 식어버린 신앙을 뉘우쳤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황님들께서 지내시던 성전입니다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랜 박해가 끝나고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라테라노 대성전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려 주는 성전입니다성전은 기도하는 곳입니다성전은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성전은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얻는 곳입니다성전은 생명의 빵을 나누는 성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성전은 성전만으로 남으면 단순히 건물일 뿐입니다성전은 그곳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이 바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의 몸에서 가난순결순명의 물이 흘러나오면 세상에는 평화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우리 몸에서 믿음희망사랑의 물이 흘러나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베들레헴 성당 문에 있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관광객으로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여러분이 순례자로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셔서 나가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더욱 드러납니다탐욕거짓분노교만을 담으면 겉은 화려해도 속에서는 악취가 날 것입니다믿음희망사랑을 담는다면 비록 질그릇과 같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 질 것입니다.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양승국신부-

 

로마 시내 수많은 성전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성전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 지니는 가치와 의미가 상당합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00년대 건립된 성당으로, 로마 공식 주교자 성당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티칸 대성당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라테라노 대성당의 위용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가톨릭교회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으로 보고 있는 이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대성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 역시 지상 성전으로서 언젠가 반드시 허물어져 내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환전상으로 오염되고 타락한 유다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복음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확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행동 역시 과격하십니다. 채찍질을 하시며 양과 소, 환전꾼들과 장사꾼들을 성전으로부터 몰아내십니다.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십니다. 탁자들을 엎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아주 강하게 외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성전은 본질상 기도하는 집입니다. 따라서 신성한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기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 세상에 닳아빠진 모습들이 지속적으로 정화될 수 있는 회개의 분위기가 꾸며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전은 어쩌면 우리 각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머무시는 우리 각자가 대성전입니다.

  

오늘 하루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님의 강론이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이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쁨 속에 지내고 싶다면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우리의 이 성전과 우리 각자의 영혼과 육신을 파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전의 청결을 보존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죄의 오물로 더럽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 성전이 광채로 빛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여러분 영혼에 암흑이 끼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대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영혼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반영억신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21,22-23).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 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합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예, 맞아요.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 하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