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11. 10. 06:53

2022 11 10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가 17,20-25)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cannot be observed,
and no one will announce, 

‘Look, here it is,’ or, ‘There it is.’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외로움을 홀로 간직하기 힘들기에 사람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습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서 무엇인가 채우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1) 물건으로 채우기: ‘제대로 된 옷이 없어.’ 식으로 ‘~제대로’에 꽂혀서 필요하지 않은 쓰레기들을 집안으로 들입니다. 쇼핑센터와 백화점을 유령처럼 떠돌다가 충동구매를 시전하여 카드값을 보고 현타를 맞는다고 하지요.

2) 사람을 채우기: 아는 언니, 동생, 선배, 후배 등 모두 소환해서 “내가 쏜다”를 외치며 사람들과 섞여 신나게 놀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허전함은 더 커집니다.

3) 새로운 모임 가기: 아는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아 새로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친해지려고 애쓰고 돈과 시간을 쓰고 허망하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4) 먹는 거로 채우기: 고독이 밀려올 때 허전함을 먹으며 채웁니다. 고독의 먹이가 음식이 아님을 알아차릴 때 이미 자신은 뚱보가 되어 있습니다.

5) 일과 공부로 채우기: 외로움을 느끼기 싫어 엄청 바쁘게 지냅니다. 일중독, 공부, 강의 중독으로 시간에 쫓겨 다니다 결국 몸이 상하고 나서야 더 큰 고독의 파도가 밀려옵니다.

이런 것으로 과연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외로움은 따뜻한 위로로 채워집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만 옆에 있어도 큰 힘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의 존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텅 빈 마음을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가 큰 관심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정치적으로 신음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 기대는 더 간절했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권이 반드시 재건되리라는 성경의 예언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와서 해방되어야 자기들의 텅 빈 마음이 채워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관점을 전해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속적으로 굉장한 팡파르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온다는 것으로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을 주님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텅 빈 마음을 세상의 것으로만 채우려고 해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에스토니아).

 지금 하느님 나라를 잘 키우고 계십니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gIIF1LLYaxg

캐나다의 한 거리에서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어미도 보호자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강아지 모조를 목격한 와그너 씨는 안타까운 마음에 서둘러 근처 병원으로 녀석을 데리고 갔습니다. 
다행히 모조는 와그너 씨 덕분으로 치료받게 되었지만, 어느 사람도 심한 피부병을 앓는 녀석을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렸습니다. 모조를 처음으로 구조했던 와그너 씨는 줄곧 녀석의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모조의 입양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병원에 연락을 취했던 와그너 씨는 심한 피부병 탓에 모조가 아직 입양처를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와그너 씨는 그 후 며칠을 고민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와그너 씨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와그너 씨는 모조의 구조자를 넘어 영원한 가족이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오갈 데 없이 병원에 머물던 모조는 와그너 씨가 등장하자 마치 아빠를 기다렸던 아이처럼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와그너 씨 얼굴을 연신 핥았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가족을 만난 듯 모조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와그너 씨의 집으로 옮겨진 후, 심각한 피부병을 앓았던 모조는 몸과 마음이 점점 건강해졌고 온몸에 뽀송뽀송한 털도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모조는 멋진 성견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출처: ‘어린 강아지는 자신을 구조해 준 남성을 만나자’, 유튜브 채널, 감동실화감동영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 나라는 다윗 왕국과 같은 외적인 강력한 나라입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국 행복입니다. 그들이 행복의 기준을 돈과 쾌락과 힘으로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느끼는 행복과 같습니다. 짐승들도 주인으로부터 그런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위해 희생한 주인을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부모가 나의 부모인지 의심스러울 때 항상 부모가 나를 위해 해 준 희생을 기억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야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안의 뱀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받은 사랑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도 바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기도는 하느님께 받은 것을 기억하여 감사와 봉헌의 마음이 생기게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안에 떨어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입니다.  
 
    2006년 3월 아르헨티나, 셰퍼드 카피탄을 기르던 주인 미구엘 구즈만이 죽어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카피탄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가족들은 카피탄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모두 돌아다니며 애타게 카피탄을 찾았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단념하였습니다. 
  
    일주일 뒤 가족들은 미구엘이 묻힌 카를로스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미구엘의 무덤 앞을 지키다가 가족들을 발견한 카피탄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며 가족들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가족들이 카피탄을 단 한 번도 묘지에 데리고 간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묘지 관리인은 개가 나타나 묘지를 한 바퀴 돌더니 자기 주인 묘지 앞에 섰고 아무리 쫓아내도 다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가족들은 카피탄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카피탄은 번번이 집에서 도망쳐 미구엘의 비석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발견되곤 하였습니다. 묘지 관리인은 그런 카피탄을 측은히 여겨 먹이를 주고 보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카피탄은 매일 저녁 6시가 되면 무덤 위에 올라가 감싸 안 듯 엎드립니다. 그리고 밤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둠과 추위로부터 주인을 지켜주려는 모습 같습니다. 죽은 미구엘의 아들 데미안 구즈만은 “카피탄이 ‘죽을 때까지 여기 있겠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2018년 10년 넘게 주인의 묘소를 지키던 카피탄은 미구엘의 비석 위에서 엎드려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죽기 4년 전부터 동물병원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그 와중에도 묘지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주인의 곁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공동묘지의 개’라고 물리던 아르헨티나의 콜리도 있습니다. 콜리도 9년간 주인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콜리가 무덤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가족들은 밧줄까지 가지고 와 콜리를 묶어 집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콜리는 도망다니며 무덤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돌아가기를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유족들은 콜리를 데려가기를 포기했고 콜리는 묘지를 집 삼아 묘지 관리인과 친구처럼 지내며 총 9년간, 조용히 주인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콜리가 죽자 묘지 관리인은 콜리가 주인과 함께 묻히고 싶었을 것이라며 콜리를 화장해 주인 무덤 위에 뿌려주었습니다.  
[출처: ‘죽은 주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무덤에서 오열하는 강아지’, 유튜브 채널, 이슈텔러]
  
    이러한 사례는 꽤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어도 동물도 당연히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분명 슬퍼할 것입니다. 개가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분명 주인이 자신에게 해 준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기억하기 위해 죽어도 주인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 가족으로 입양하시기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말씀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5) 
 
    우리도 미사 때나 기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럴수록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 행복이 커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 때 나에게 부족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뱀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명 감사로 끝나야 합니다. 자기 봉헌으로 끝나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올바른 예배입니다. 봉헌의 의미가 퇴색하는 전례나 기도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행위가 되지 못합니다.

 바오로, 오네시모와 필레몬으로부터 자유를 배우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w5iyBCsAfk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카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 공간이며,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 있으면 천국」

 -반영억신부-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김찬선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동문서답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시느냐는 질문에 언제라는 답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곧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대답이 동문서답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뜻이 되겠지요

 

사실 주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는 것도 복음을 믿는다는 것도

하느님 나라 관점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은

아직 회개한 사람이 아니요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요.

 

달리 말하면 회개를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회개를 해야 하는 거지요.

사실 회개에는 여러 회개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회개와 영적인 회개가 있고,

인간적인 회개에도 마음이나 습관을 바꾸는 개인적인 회개와

용서와 화해를 통해 나쁜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바꾸는 관계적 회개가 있습니다.

 

사실 이런 회개만도 우리에게 벅차기에 이 회개를 위해서도 낑낑대니

이 회개를 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훌륭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회개 곧 하느님 나라의 회개가 궁극적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깨어있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나라 무감각에서 깨어나는 회개라고도 할 수 있고,

영적인 감각 또는 하느님 나라 감각이 깨어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으면

아들에게 깨어있는 어머니가 아들의 냄새를 맡고 어둠 속에서도

아들이 곁에 있음을 알아채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알아챕니다.

 

호렙산의 엘리야에게처럼 바람결에 실려 오는 하느님 나라,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내려오는 하느님 나라,

새벽 실안개처럼 우리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하느님 나라를 느낍니다.

 

영적인 감각이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지인이 보내오는 문자 하나도 그저 문자가 아니라

사랑이 온 것이요 하느님이 오신 것으로 느낍니다.

 

문득 가을을 느끼듯

우리 가운에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제라도 문득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성찰을 하는 오늘 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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