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였다.
☆☆☆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루가 18,1-8)
Will not God then secure the rights of his chosen ones
who call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be slow to answer them?
I tell you, he will see to it
that justice is done for them speedil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가이오스에게, 형제들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며, 불의한 재판관을 조르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머니에게 혼날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집에서 시장까지를 땅바닥만 보면서 왔다 갔다 반복했습니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입니다.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 앞에서 울고 있는데, 노숙자(당시에는 거지라고 했습니다)로 보이는 사람이 저를 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나랑 같이 살래?”
집에 들어갈 용기가 없어서 이 사람을 쫓아갈까도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손에 끌려 집에 들어갔습니다.
울면서 돈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자 당연히 혼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무섭다고 노숙자 손을 잡고 가출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려움을 피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해결은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이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고통과 시련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그냥 피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어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만 그때까지 좌절하지 말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성가시게 졸라대서 결국 과부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외면하겠냐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늘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불평불만도 많이 표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피하려고만 했지, 정면으로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달리지 못하고 늘 피하는 데 급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매달릴 수 있는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니, 어렵고 힘든 시간을 현명하게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의 험담을 하면, 곧 당신의 험담이 돌아오는 줄 알아라(헤시오도스).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qYdQ9IDXYw
-조재형신부-
어려서부터 같은 본당에서 지내온 동창 신부님은 신중하고,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는 편입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여러 부서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지만 고사하였습니다. 그런 동창 신부님이 이번에는 고사하지 못하고 교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중한 성격이기에 많이 고심했을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의 기사와 평화방송의 인터뷰를 보고 동창 신부님이 맡아야 하는 일을 알았습니다. 공식직책은 ‘꾸라토르(Curator)'입니다. 교구 내 사제들의 영적 돌봄이나 고충 상담 등을 하는 직책입니다. ‘사제를 위한 사제’라고도 합니다. 아직은 시작단계이지만 교구장님의 사목 지침이고,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직책이기에 교구 사제들을 위한 영적인 쉼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휴양 중에 있는 사제, 해외에서 선교하는 사제, 갈등과 아픔이 있는 사제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꾸라토르라는 자리가 사제들이 지친 몸을 잠시 쉬고 힘을 낼 수 있는 곳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동창 신부님의 어깨가 무겁겠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리라 믿습니다.
저는 동창 신부님처럼 과묵하거나 신중한 성격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저를 필요로 한다면 가능하면 함께하는 편입니다. 2002년 봄입니다. 교구 사목국에서 국장신부님이 제가 있는 본당으로 찾아왔습니다. 교육담당 신부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생들의 30일 피정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영성지도 신부로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영성지도 신부로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로 바쁘게 지내면서 기도할 시간이 적었는데 신학교로 가면 신학생들과 함께 지내니 기도할 시간이 많을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는 방학이 있으니 방학 때는 여유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교육담당 신부는 생소했습니다. 강의를 해 본 적도 별로 없었습니다. 농촌에서 지내다가 복잡한 명동에서 지내는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교구청에서 지내야 하니 주교님들과 국장 신부님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사목국에서 저를 더 원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위에서 교통정리가 된 것 같았습니다. 저는 2002년 가을 교구 인사이동으로 사목국 교육담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비가 제갈 공명의 집으로 3번을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신중했던 제갈 공명은 유비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유비는 제갈 공명이라는 든든한 책사를 만나서 삼국지의 한 축을 단단하게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유비가 자존심을 생각하고, 체면을 생각해서 제갈 공명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유비를 몰랐을 것입니다. 삼국지의 웅장하고, 멋진 이야기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삼국지는 어쩌면 유비의 간절함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삼고초려가 아니라 삼십고초려라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청하는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을 자주 찾아가니 재판관은 가난한 과부의 청을 들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청원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의 질, 기도의 방향이 아주 중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여기저기 낙엽도 우수수 떨어지고, 계절에 걸맞게 연중시기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에 걸맞게 요즘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종말에 벌어질 상황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그 거룩한 은총의 날, 다시 말해서 마지막 날, 잘 준비되지 못한 사람은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에 직면하겠지만, 미리미리 잘 준비한 사람들에게 그날은 더없는 축복이요 영광의 날이 될 것을 강조하십니다.
학창시절을 돌아보니 예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저 같은 사람들은 시험 준비가 잘 되지 않았던 관계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시험 시간이 다가올수록 세상 괴롭고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그런 반면 평소 수업 시간에도 충실할뿐더러, 예습 복습에 충실했던 친구들은 시험이 기쁨이요 설렘이었습니다. 시험 시간이 다가오면 이번엔 평균 10점은 올려야지, 이번에도 준비를 잘했으니, 내가 당연히 1등이겠지, 하는 마음에 저와는 달리 시험 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날과 관련된 말씀을 하실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강도 높은 경고 말씀을 던지시는데, 그 이유가 다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명 각자 각자를 향한 극진하고 개별적인 사랑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구원의 명단에서 제외되는 일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당신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냉랭한 사람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과 관련해서 그토록 강경한 발언을 하시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절망과 낙담 속에 울고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평생 그리워했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밤낮없이 졸라대는 집요한 과부의 예를 드시면서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가 지니고있는 힘을 잘 알고 계셨기에, 더 간절히, 더 정성껏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열렬히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을 간절히 청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봅니다. 청원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의 질, 기도의 방향이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작고 이기적이며 옹졸한 청원기도가 아니라 크고 이타적이며 관대한 청원기도가 필요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없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기꺼이 수용하고, 고통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높은 자리, 물 좋은 자리,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남들이 가기 가장 꺼려하는 낮은 자리를 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그가 크게 바뀌고 회개하기를 기도하기에 앞서 나부터 먼저 바뀌고 회개할 수 있는 힘을 청해야겠습니다. 죽어도 용서 못하는 마음을 버리고 보다 큰마음으로 용서하고 더 적극적으로 화해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청해야겠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영적이며 더욱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Laus perennis), ‘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 전승 안에서, 주로 서방교회에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예수기도’(εύχη Ιησοû)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 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루가 18,1)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2,8)
그러니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지속되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가 18,1)
주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의혹과 조바심이 몰려오 때에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하소서.
어둔 밤일지라도 그 밤마저 몰아가는 당신을 믿게 하시고,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항구히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한상우신부-
가난한
우리들에겐
기도가 있습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도
우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삶이 뜨거운 것은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가 보아야
알게되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기쁨과
슬픔 사이에
끊임없이
기도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삶을
사랑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기도하는
기도의
선택입니다.
기도의 이야기는
희망의 간절한
이야기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로 사랑을
알게하시며
삶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로 태어나고
기도로 돌아가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기도는
공동체를 향하고
공동체는 기도가
중심이 됩니다.
매일매일이
기도의 날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2주 토요일-우리가 낙심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지체 없으신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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