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Margaret K 2022. 11. 13. 07:09

2019 11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루가 21,5-19)

 

By your perseverance  

you will secure your li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을 불살라 버리는 날이 온다며,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허물어지고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나타날 것이며, 사람들이 박해할 때가 오리니,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전에서 어른을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다 자랐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만 19세가 넘으면 어른일까요? 여기에 자기 일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외형적으로는 어른인데, 하는 모습은 철부지 애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른이 훨씬 넘었음에도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것을 힘들겠다고 부모가 대신해 줬기 때문입니다.


정신 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고통을 겪는 일.

2)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깨닫는 일.

3)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

이를 경험하지 못하면 자기중심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볼 것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더 큰 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어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어른답게 살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말론적 훈계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의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모두 허물어진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멸망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조국의 멸망을 뜻합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두려워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성전의 파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정신적인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큰 혼란에 빠집니다. 또 이와 같은 혼란 뒤, 민족적인 혼란으로 전쟁과 반란이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큰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긴다고 하십니다. 고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한다면서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겪어야 하는 이치처럼, 제자들의 박해는 새 나라인 하느님 나라가 태어나는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을 새기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내로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고, 매일 사랑하는 일을 한다(김지연).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법: 그리스도의 말을 하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HedryjWiqa8

영화 ‘게임 플랜’(2007)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조 킹맨은 영화 내에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선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선수들을 믿지 않고 독립적인 플레이를 계속해 우승 트로피는 따내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파티를 즐기며 솔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딸이라며 한 아이가 찾아옵니다. 예전에 이혼했던 아내는 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조는 크게 당황합니다. 

  

    딸 매디슨 페티스는 어머니가 갑자기 아프리카에 봉사하러 가서 어머니가 아빠 집에 있으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조 킹맨의 메니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조는 인기 절정의 미식축구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조 킹맨도 갑자기 나타난 딸의 존재로 생활에 균열이 생기게 되어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페티스는 아빠 조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끊임없이 묻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지금 또 다른 여자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이고 당장인 인기와 돈과 명예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페티스는 언론 앞에서 아빠를 옹호하는 말을 해주기도 하고 또 그러는 가운데 조도 페티스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며 조는 조금씩 더 솔직해집니다. 페티스 때문에 애인과 헤어질 위기에 처하자 조는 페티스가 엄마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항상 불평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페티스는 엄마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는 언제나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다고 말합니다. 페티스가 울자 조는 기타를 쳐 주며 페티스를 위로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다. 나는 아버지다”를 외우며 이상한 복장을 하고 딸이 원하는 발레도 같이 해 줍니다. 

  

    그러다 일이 발생합니다. 아이가 분명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는데도 디저트에 땅콩이 들어간 것을 모르고 페티스가 그것을 먹고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킵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다행히 딸이 안정을 되찾자 페티스의 이모가 찾아옵니다. 사실 엄마는 6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뒤였고 아프리카에 간 것은 이모였습니다. 이모는 페티스를 미식축구에 미친 아빠에게 맡길 수 없다며 아빠의 양육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페티스도 아빠의 커리어를 망치고 싶지 않아 이모의 집에 머물겠다고 합니다. 

  

    조는 점점 진지해집니다. 딸의 양육권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 딸보다 사랑하는 건 없습니다. 축구를 포기해도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슈퍼 볼 경기가 열리는 당일 매니저는 만약 경기에서 이기면 기자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할 때 “전 이제 패니 버거를 먹으러 가겠어요”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패니 버거가 스폰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페티스 생각에 좀처럼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던 조는 결국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하고 맙니다. 이번 경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 페티스가 나타나 아빠에게 힘을 줍니다. 아빠는 솔직하게 말해 줍니다.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딸 페티스를 만난 것이라고. 그리고 경기에 나가 우승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우리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갈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조 킹맨의 삶은 그 자체로 거짓이었습니다. 그가 솔직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딸을 받아들여 아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더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때에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까요? 프랑스 속담에 험담꾼은 듣는 이들이 만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을 들어주는 이들이 있기에 재림 예수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교리를 몰라서 사이비로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뱀의 거짓말에 넘어갔을까요? 그들이 거짓말쟁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왜 재산의 절반을 교회에 바쳤음에도 죽었을까요?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이는 말을 받아 전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아는 사탄의 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 뜻대로는 예, 아니요, 말고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을 하는 것 외에는 다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조 킹맨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믿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진실할 수 없었고 남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진실 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임에도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지 못하면 인간으로 하는 모든 말은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45)

  

    우리의 말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변한 나의 정체성으로 나오는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는 말이 됩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더욱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4-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진리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진리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마지막 때에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쟁이가 되면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됩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람이 되면 그들의 말은 거북해서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되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내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사라질 때 세상은 거짓 예언자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지금 사이비를 공부할 때가 아닙니다. 성체성사로 내가 진리에 참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를 버리고 그분의 말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좋은 공부는 없습니다. 내가 말하며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조금씩 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와 가난의 신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yNXnB773WI

 조재형신부-

 

어릴 적의 기억입니다자주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우리 집을 마련할 때까지 9번 이사를 갔습니다주인집이 있고 작은 공간에 세를 들어 살았습니다세를 들어 살면 알게 모르게 주인집의 눈치를 보기 마련입니다장독대로 있고등나무도 있고다락방도 있고작은 마당도 있던 새 집으로 이사 갔을 때는 기분이 좋았습니다저는 형들이 쓰던 가방옷도 물려받았습니다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어머니는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쌀가게연탄가게마트밥장사를 하였습니다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충실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정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가난해서 굶주리고가난해서 병들고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가난해서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도록 권고하는 날입니다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도와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부자가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지만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편히 쉴 수 없었던 것은 집 앞에 머물던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도와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최후의 심판 날에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언제 저희가 그렇게 했습니까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배고프고가장 목마르고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하나는 자발적인 가난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수도자들은 독신순명청빈을 서약합니다부유함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부유함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부유함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부유해진 나라들의 교회는 비어가고 있습니다부유해진 나라들의 성소는 줄어들고 있습니다제국주의는 그들의 부유함을 채우기 위해서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식민지의 역사는 약탈과 침략의 역사입니다교회는 권력을 가지고 부를 축적했을 때 분열하였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인 가난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다른 하나는 구조적인 가난입니다흙수저로 태어나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가난입니다궁핍한 지역에서 태어나서 굶주리는 가난입니다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태어나서 기회는 박탈당하고 있는 것 마저 빼앗기는 가난입니다국제사회는 구조적인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병들고배우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교회도 선교사를 파견하여 병원학교보육원을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합니다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구조적인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도우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입니다. 왜 우리가 가난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까?

  

답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 가난을 살 것을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쭉 묵상해보면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신 분이 또 없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봤을 때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은 절대로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를 축척하려면 한곳에 오래도록 터를 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땅값도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은 신혼 초부터 헤로데의 영아 살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삶의 기반을 옮겨갑니다.

  

거기서 꽤 머물렀는데, 이집트에서 공짜로 밥 먹여줬겠습니까? 요셉은 외국인 근로자로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아기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갖가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세상을 떠나자 나자렛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새롭게 거주지를 옮긴 두 분은 또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삶도 절대 부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노숙인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이 노숙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시면서 굶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끔씩 기회가 닿으면 양껏 드시는 장면이 종종 목격됩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그리고 사랑밖에 없었던 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누군가를 대신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놓는 일 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노숙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시다 보니 또 다른 노숙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셨습니다. 나병 환자들, 거지들, 갖은 종류의 병자들, 죄인들, 어린이들,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한번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주 드물게 고관대작의 집에 초대도 받으셨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받은 민중들 사이에서 지내셨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 편에 서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편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를 성찰케 하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합시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된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삶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 은총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 성요한). 내가 믿음으로 굳건하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 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근심 걱정 없이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없음을 염려해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주님의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은‘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래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천국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할 것입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작은 선, 사랑이라도 수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징검다리를 놓다 보면 길이 되는 것처럼, 내가 놓은 수천, 수만의 징검다리를 밟고 안전하게 천국의 풍요로운 아름다움 속으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이태원참사와 같은 세상의 혼란을 접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조심해야 할 것은 어지러운 상황이 아니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속임수’입니다. 그리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길은 참 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거짓말과 속임수가 난무하고 또다시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을 보면서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는 두려움 없이 진실을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의회에 끌려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 고 말합니다.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 하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버려진 자식이 아니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있는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우리에게 다가오는“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모두가 생명의 화관을 쓰고 기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한상우신부-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한 해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사랑입니다.

종말은
사랑입니다.

삶의 마지막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사랑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소중한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은
인내가 필요하고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가장 소중한
기쁨입니다.

생명은 기다림과
인내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여정의 끝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삶의 방향을
알게하시는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입니다.

인내는 우리를
자기중심과
자기만족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는 것이
탄생이라면
종말은 가장 좋으신
생명의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거듭 우리를
새롭게 하는
은총입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창조이며
종말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하느님께서는
최상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입니다.

인격의 반성으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사랑은 실천의
기쁨이며
성장의
변화입니다.

결코 정지된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새로운 삶의
뜨거운
시작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33주일-믿음과 인내로 얻는 생명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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