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그가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8,35-43)
Jesus asked him,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He replied, “Lord, please let me see.”
Jesus told him, “Have sight;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글을 쓰면서, 에페소 교회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을 나무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눈먼 이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자 그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조금 전에 들은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면서 치매 초기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꼭 나이가 들어서 자주 깜빡깜빡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 기억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 마크 빅터 한센에 의하면, 들은 것의 64%는 하루 안에 사라지고, 98%는 일주일 안에 없어진다고 합니다. 즉,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지만, 기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의사 맥스웰 몰츠는 같은 생각을 열일곱 번 이상 반복하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기억의 한계.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잘못된 점은 잊어버려야 할 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각 자체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미움, 부정적인 생각들…. 분명히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열일곱 번 이상 반복해서 생각하기에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한 번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끝인 것처럼 생각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 잊어버립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감사의 마음을 전혀 갖지 않아서 잊음의 관계만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는 주님과의 관계조차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복음은 전해줍니다. 이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모습은 이제까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지요. 이제 그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또 죄인인 주제에 왜 큰소리를 지르냐고 꾸짖었겠지요. 이런 장애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자기 구원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계속된 그의 외침을 떠올려 봅니다. 이 외침의 반복을 통해, 그는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마음속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믿음의 외침으로 어두움을 걷어내고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은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진료비가 없는 환자야말로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HOlK0EVsk8
-조재형신부-
아이티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생생한 현장감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왜 나만’이었습니다. 매일 50여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새로운 입소자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기쁜 마음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이번에는 망설여졌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치안이 워낙 불안하고, 몇 달 전에는 강도를 만나서 죽을 뻔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환자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면허가 없고, 그렇다고 수녀님들이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비포장도로를 5시간 달려서 환자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환자는 차를 타면서 아기처럼 잠이 들었고, 도착해서는 성가를 부르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아이티에서 전쟁과 같은 선교를 하는 신부님의 ‘왜 나만’이라는 말은 불평과 불만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나만’이라고 말하는 신부님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천국에 쌓을 보화를 미리 마련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삶으로 실천하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중에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어려서 소아마비가 왔고, 평생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다리, 허리, 갈비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30번 이상의 수술을 해야 했고,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왜 나만’이라는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생생한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모두 멕시코의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도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억압과 탄압에 맞서는 혁명가였으며, 낡은 관습과 제도를 벗어나는 자유인이었으며, 고통 앞에 굴복하기보다는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열정의 여인이었습니다. 작품의 삼분의 일이 그녀의 자화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애정이 있었고, 자신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열정과 저항정신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에도 멕시코 인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멕시코 인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 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이번 생이 너무나 막막하고 힘겹더라도...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눈먼 이’는 가장 가련한 사람 중의 가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도 눈까지 멀었으니, 이 보다 더 가련한 사람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 한방이라고, 그 가련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순식간에 인생 역전을 이뤄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해 있었는데, 예리코의 소경이 인생 역전을 이뤄낸 비결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그의 호칭은 어느새 ‘주님’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눈먼 이’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을 넘어, 이스라엘의 왕을 넘어,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그래서 자신의 삶과 죽음, 인생 전체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당신 손에 쥐고 계시는 ‘주님’이 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곰곰이 살펴보니 여러 측면에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비록 눈을 뜨고 있었지만, 정작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 정말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네 인생 수백 수천 번 되풀이 되는 윤회의 삶이 아니라,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금쪽같이 소중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떵떵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만, 사실은 잠시 머물다 사라져가는 뜬구름 같은 존재임을, 이 보잘 것 없고 유한한 존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이번 생이 너무나 막막하고 힘겹더라도 잘 견디고 넘겨, 언젠가 이 삶이 지나가면 그림같이 아늑하고 따뜻한 하느님의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볼 줄 아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한상우신부-
간절히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보게 되는
오늘의
순간순간들입니다.
붙어있음도
떨어져내림도
나뭇잎의
구원임을 다시
보게 됩니다.
치유의 시작은
다시 보게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먼저 간절히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다시 볼 수 있게
하시는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간절함의
관계입니다.
간절함은
드디어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주님을 통해
사람과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새롭게
다르게
볼 수 있는 믿음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 즉시 새로워지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모두를 기쁘게
만듭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었던
우리들 마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보아야
제대로
감사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믿음이고
믿음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며
구원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매순간이 하느님
자비를 청하는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우리의 울부짖음을
우리의 눈물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건강한
믿음의 삶입니다.
감정의 구걸을
멈추고
우리자신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창조는 치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치유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다시 보아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다시 보게되는
새로운 삶입니다.
우리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이
치유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을
다시 보게되는
믿음과 구원의
오늘 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다시 하느님뿐임을
깨닫고 따르는
새로운 아침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3주 월요일-칭찬과 나무람과 권고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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