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루가 19,11-28)
Well done, good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in this very small matter;
take charge of ten citi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 하늘로 올라가 스물네 명의 원로들과 네 생물이 “거룩하시다!”고 외치는 가운데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을 뵙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왕권을 받으러 떠나며 종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 귀족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젊은 부부는 자기의 아기가 태어날 때, ‘기적’ 같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닮은 아기, 그래서인지 온갖 정성을 아기에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팔다리를 많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운동 신경이 너무 좋다고 말하고, 엄마 아빠를 빠르게 말했다면서 ‘천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성량이 좋아서 노래 잘 부를 것으로 예측합니다. 마구 휘저은 낙서를 보면서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렇게 자주 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기 운동선수 시킬까? 아니야. 머리가 좋으니 교수를 시키자. 노래도 잘할 것 같은데? BTS 같은 아이돌 가수는 어때?”
우리 아이는 커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으며,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의 생각을 충족시켜 줄까요? 아마 적당한 선에서 머무르는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 뜻대로 살지 않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노력보다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려고 하기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 뜻대로는 절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뜻을 말입니다.
미나의 비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면서 종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을 나눠주지요. 미나는 1탈렌트의 1/60에 해당합니다. 1탈렌트가 6,000일 치의 노동자 임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1미나는 100일 치의 임금임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이지만, 주인이 냉혹하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만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 한 미나 마저 빼앗기고, 가장 많은 미나를 벌은 사람은 그 빼앗긴 미나를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열 미나를 벌은 사람은 재능을 많이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은 첫 번째 사람보다 조금 덜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은 재능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딴전만 부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으면서도 자기 잘못 탓보다는 주인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절대로 제대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주님께서도 이야기하시지요.
여러분은 어떤 뜻을 따르면서 열심히 살고 계십니까?
내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 형성 단계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BCs0qMNLQM
오늘 복음은 소위 ‘미나의 비유’입니다. 한 미나는 약 100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한 1,000만 원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이 비유는 화폐의 단위만 다른 탈렌트의 비유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약 6억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는 다섯, 둘, 한 탈렌트를 주는 것과는 달리 미나의 비유에서는 모든 종에게 동일하게 한 미나씩 맡깁니다. 이는 동일한 구원의 씨와 같습니다. 구원은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키우는 것에 따라 각자 다른 심판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한 미나는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뿌려 주시는 말씀의 씨앗, 성체의 씨앗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세 부류의 종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인이 임금이 되려고 떠나는 것도 탈렌트의 비유와 다릅니다. 첫째 부류는 주인이 임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백성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한 미나를 땅에 묻어 놓은 종이고, 마지막 부류는 그것으로 주인을 영광스럽게 한 부류입니다. 오직 마지막 세 번째 종들만이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임금이 되어주시는 것에 우리가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나는 자아의 압제,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면 나는 못된 선장의 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그분이 임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처형하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그분을 임금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이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야곱은 불콩죽을 에사우에게 봉헌하는 것으로, 또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이사악에게 봉헌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치고 심지어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주님이 주님 되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분을 임금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내게서 자랄 수 없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한 미나를 땅에 묻어둔 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한 탈렌트를 받았던 종처럼 주인을 냉혹하고 두려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씨앗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키우지 않았습니다. 주인만 좋은 일을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키우기 위해서는 항상 ‘감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어떤 구원의 씨앗도 자라지 않습니다. 많이 말씀드린 이야기지만, 저는 신학교에 들어와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로 간신히 못된 종에서 벗어나게 된 것 같습니다. 불만이 가득했을 때는 나의 불만을 채우는 데 급급했지만, 감사가 나오니 그분의 뜻을 따라주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구약의 야곱은 어떻게 했을까요? 에사우가 자기의 불콩죽을 드시고 가죽옷을 내어주어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 야곱은 이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에사우가 살았듯이 삽니다. 에사우가 맺어야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20년 동안 갖은 고생하며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에사우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때 그분이 맺으셨을 법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분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2020년 3월 카자흐스탄 국적 20대 이주노동자가 알리 압바르 씨가 23일, 밤늦게 귀가하다가 자신이 사는 강원도 양양 원룸 건물 2층에서 불이 난 걸 목격했습니다. 곧바로 서툰 한국말로 소리치며 이웃과 함께 입주자 10여 명이 대피하도록 도왔습니다. 이어 불이 난 2층 방에서 50대 여성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안 알리 씨는 망설임 없이 건물 밖 가스 배관을 타고 올라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끝내 숨졌고 알리 씨도 등과 목 등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다쳐서 일을 못 하다 보니 치료비는 물론 고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매달 보내던 생활비도 막막해졌습니다. 딱한 사정을 접한 한 이웃이 앞장서 모금한 덕에 지금까지 병원비 700여만 원은 간신히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병원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난 후 당장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현장이 수습되면 자신이 불법체류자임이 드러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화마 속에서 손길을 내밀고 있는 생명이 훨씬 더 소중했습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알리 씨에게 영주권을 주자는 국민청원이 잇따라 올라왔고 양양군도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청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된 이들과 소식을 접한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체류를 인정해달라는 청원을 했고, 결국 의인상 수상과 함께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주권을 받을 때 불법체류자로 살던 어려웠던 삶의 기억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는 가족과 한국에서 함께 사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순서로 이어집니다. 그분이 먼저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해 달라고 우리의 것을 조금 요구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드리면 그분은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면 그분 안에 거하게 됩니다. 야곱이 베텔에 머물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은 하느님 나라 백성을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취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미나가 하나의 영혼이라 하면 다른 영혼들도 한 미나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구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주권을 얻게 됩니다. 만약 야곱이 열매 없이 에사우에게 돌아갔다면 에사우가 받아들여 주었을까요? 그 앞에 나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기간입니다.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 그리고 미나의 비유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by2o-skuUo
-조재형신부-
최근에 쉽게 수락하기 힘든 제안이 있었습니다. 웬만하면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고민이 컸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도 빨간 불이 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면서 홍보를 못 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뉴욕에 있는 ‘가톨릭방송’을 맡으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가톨릭방송도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팬데믹은 가톨릭방송이라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교구에 문의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도, 가톨릭방송도 미국에 있는 한인 사제들과 신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없으면 운영이 쉽지 않습니다. 신문을 구독하고, 방송을 시청하며 지면과 방송의 내용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35년 역사의 가톨릭평화신문과 30년 역사의 가톨릭방송이 앞으로도 미주지역의 한인 신자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입니다. 몇몇 뜻있는 신자들이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좋은 강의를 소개하고 싶어 했습니다. 요즘 ‘스타트 업’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자본과 조직이 없어도 참신한 아이디어와 산뜻한 기획이 더해지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몇몇 뜻있는 교우들이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와 저명한 강사들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고, 저명한 강사 사제들과 수도자를 섭외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은 취지에 공감했고 기꺼이 강의를 수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기보다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맡아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의 주최가 되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영적인 도움이 된다면 저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줌으로 들을 수 있다면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함께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솜사탕, 별’과 같은 동요를 남겨준 작곡가 이수인 선생님은 2021년 8월 23일 별세했습니다. 선생님은 생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화, 문학, 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동요와 가곡을 자주 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동요와 가곡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이라는 바벨탑을 쌓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정신이 황폐해지면 곧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동요와 가곡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도둑맞을 일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된 구성원들이 하느님 어좌 앞에 모여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하느님 나라!
-양승국신부-
심오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요한 묵시록에는 다양한 상징들이 등장하는데,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게 되면, 성경 말씀들이 더욱 큰 은혜와 축복으로 다가옵니다.
환시에 사로잡힌 요한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제일 먼저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어좌’와 어좌에 앉아 계신 ‘어떤 분’이었습니다. 어좌라 함은 왕이 앉는 자리를 말합니다.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앉아 계신 분을 하느님이라 칭하지 않고 ‘어떤 분’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유다 관습 안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차원에서 그분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은 하늘의 중심인물일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 인류의 중심이십니다.
요한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모습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강렬한 빛, 너무나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빛 속에 거처하십니다. 그분에게서 발산되는 엄청난 빛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와 권능,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에게서 발산되는 강렬한 빛은 값진 보석의 빛깔과 비유됩니다. 벽옥(碧玉)은 여러 가지 빛을 내는 흰 다이아몬드이거나 무지개빛깔을 발산하는 단백석(蛋白石, opal)으로 추정됩니다. 홍옥(紅玉)은 아마도 진홍색의 루비(ruby)일 것입니다. 어좌 둘레에 무지개처럼 펼쳐진 취옥(翠玉)은 에메랄드를 지칭합니다.
이처럼 묵시록의 표상들이 주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영광스럽고 전능하시며, 한없이 평화롭고 신비스런 느낌입니다.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묵시록 4장 4절)
스물넷이라는 숫자는 열둘에 열둘을 더한 숫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로 스물넷이라 함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대표자요, 더 나아가서 하느님 백성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된 구성원들이 지존하신 하느님 어좌 앞에 모여 앉아, 그분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어좌에서 터져 나오는 번개와 천둥소리는 시나이산에서 있었던 하느님의 계시를 연상시킵니다. 어좌 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 다시 말해서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은 네 생물을 봅니다. 그 모습이 꽤나 기괴합니다. 각각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같이 생겼는데, 다들 온몸에 눈이 가득 달려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습니다. 섬뜩한 모습입니다.
네 생물은 온 세상에 살아가는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눈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그들이 느끼는 황홀함과 놀라움, 감탄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요한이 들여다본 하느님 나라는 창조주이신 하느님, 엄위와 영광으로 가득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구원된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뿐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범 우주적인 전례가 거행되는 자리였습니다.
언젠가 우리 역시 성령에 이끌려 하늘나라로 인도될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하느님 어좌 둘레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이영근신부-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곧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 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루카 19,13)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 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 19, 24)
-한상우신부-
한걸음 한걸음씩
내딛는 우리들의
충실함으로
자라납니다.
충실함은
올바른
실천입니다.
올바른 실천은
올바른 믿음을
되찾게 합니다.
올바른 믿음은
착하고 성실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우리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가장
아름다운 실천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주어진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람직하며
적극적인 관계는
우리의 역할에
충실한 반성의
관계입니다.
십자가의 소임에
충실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정직한 여정입니다.
하느님과 너무
멀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반성합니다.
본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인격성숙의
관계입니다.
자기자신과의
편안한 관계는
하느님과의
건강한 관계로
이어집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다운
우리들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그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는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삶입니다.
자유로운 삶은
현실을 바탕으로
구체화시켜 나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일상이란 없습니다.
일상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한
여정입니다.
삶의 시작부텨
삶의 마침까지
이어지는
일상입니다.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우리의 일상을
기쁨과 감사
기도로 새롭게
닦아나가는
오늘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기쁜 날
되십시오!
말씀 나누기 - 연중 33주 수요일-하느님은 내게 어떤 분? 나의 사랑은 어떤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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