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루가 19,45-48)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proceeded to drive out
those who were selling things, saying to them,
“It is written,
My house sha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thie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천사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파리에 가보고 싶다는 분이 많습니다. 파리의 야경, 센강,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볼거리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파리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파리는 상하수도 시설이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왕궁에조차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가에 아무 곳에서나 일을 보았습니다. 여성들의 치마가 펼쳐진 우산처럼 되어 있는 이유는 아무 데서나 일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습니다. 양산을 들고 우아하게 서 있는 부인이 사실은 일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하수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파리. 그래서 전염병이 시작되면 계속된 확진으로 언제 그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파리였지만, 나폴레옹 3세 황제 명령에 따라 대대적인 구조 개혁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아름다운 파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수세식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재래식 화장실 이용은 도저히 못 할 정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우리 각자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요? 좋은 쪽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예수님의 폭력행위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던 분이 폭력을 쓰셨을까요? 기도하는 집이 아닌 장사하는 집이 되어 있었고, 사랑이 충만한 곳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향한 불의와 차별이 있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근본적으로 자기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성전에서 죄를 짓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말로써 백성을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군중은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죄가 점점 환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점점 그들의 죄가 확대되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힘들이지 않고 기도 오래 할 수 있으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D-SFnglbQHI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6)
성전은 분명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우리 내적 성전에서 기도가 충만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사는 게 기도이니 특별히 기도 시간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내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있다면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욕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먼저 내가 기도의 집이 되려면 우선 기도를 오래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쇠붙이가 자석에 오래 붙어 있어야 자기에게도 자성이 생깁니다. 쇠를 풀무 불에 잠깐 넣었다 빼면 속까지 뜨거워지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오래가 결국 모든 삶이 기도가 되면 그제야 삶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로 한 시간을 합니다. 그래도 어떤 때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전의 기도를 생각해보니 내가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가 아닌 내 뜻을 하느님이 아시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청하면 기도가 길어질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 어떤 신자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굉장히 외로운 삶을 사시는 할머니셨습니다. 저와 면담하자며 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성당 직원분은 신부님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면담할 시간은 안 될 것이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꾸리아 강복을 주고 점심에 맞춰 올라오는데 그 자매님이 저를 잡았습니다. 면담하고 싶은데 점심을 드셔야 해서 안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내용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으로 치자면 10분도 안 되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오래 당신 말씀을 하지 못하실 것을. 고해성사에 들어오셔서 일사 후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셔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오래 하지 못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렇게 금방 지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여섯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자녀 간의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 거짓말 안 하기, 음식물 방으로 가져가지 않기, 형제간의 서열 지키기 등 몇 마디 하니 회의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금쪽 처방받고는 오래 회의가 지속되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지 눈치를 보며 아주 천천히 말합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자 오랜 대화가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형제들 간에도.
기도를 오래 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 됩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수학자처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미 다 아시고 계신다고 가정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한마디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아무리 길어져도 지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발표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결과였습니다. 이들이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상대의 희망에 내 희망을 걸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래서 깊어질수록 말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해서 자신이 먼저 제사를 지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왕위에서 쫓아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되도록 나의 뜻을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아듣지 못해도 주님의 기도만 바쳐도 굉장히 유익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면 금방 끝납니다. 하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섀클턴을 기다렸던 선원들이 기다리던 나를 살리는 한마디여야 합니다.
입에서는 달지만 먹으면 배가 쓰린 두루마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0i28U7uDu0
-조재형신부-
2014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에 참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많은 승객들이,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는데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호 사고 8년이 지난 10월 29일 토요일 또 다시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또 다시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하시어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억울한 죽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성장과 발전도 필요하지만 정부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빨리 무너지고 재건되어야 할 교회의 모습!
-양승국신부-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오늘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예수님의 경고 말씀이 오늘 제게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여파로 사무실 직원도 없다 보니, 피정 신청 전화도 직접 받습니다. 씁쓸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먼저 ‘누굽니다’ 라고 밝히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전반적인 통화 분위기가 아랫사람 다루는 듯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무실 직원들, 감정 노동자들의 기분과 마음이 어떠할지 생생히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피정 비용이 큰 관심사다 보니 정확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최근 물가상승을 고려해서 1박 2일 세 끼 얼마고 2박 3일 여섯 끼 얼마입니다.”
그런 안내에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또다시 곰곰이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데.’, 하는 생각에 즉시 꼬리를 내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렇죠. 너무 비싸죠? 요즘 유류비, 식자재비 폭등으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인상했답니다. 그렇지만 부담스러우시면 내실 수 있는 만큼만 내시면 됩니다.”
“저희 피정 센터 절대 저희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 백성의 집입니다. 특히 가난한 분들의 집입니다.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 편히 오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태도는 사뭇 의아합니다.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의 처신과는 크게 차별화됩니다. 당시 제한적이었지만 세속의 권력자였던 헤로데 왕궁을 찾아가지도 않으십니다. 빌라도 총독과의 면담 스케줄도 잡지 않으십니다.
가장 먼저 보여주신 행동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소요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의 장소였던 성전은 당시 완전히 본질을 망각한 채 크게 타락해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세속화의 극치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막대한 권리금을 상인들로부터 받고 성전 마당에서 이런 저런 물건들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상인들은 성전 마당에 가판대를 쭉 늘어놓고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환전상들도 이에 뒤질세라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되는 시세로 돈을 바꿔주고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은 시끌벅적, 티격태격, 옥신각신, 바글바글...마치도 재래시장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우스꽝스런 성전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평소와는 다르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그저 분노에 그치지 않습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죽치고 있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리치시며 밖으로 쫒아내십니다. 이어서 던지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들려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복음 19장 46절)
오늘 우리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호된 채찍질을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오늘 우리 교회 역시 크게 한번 정화와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저는 하느님 크신 자비 없이 단 한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기서 나 보다 더 잘 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쳐대는 교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심각한 쇄신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던 중죄인들, 극빈자들, 상처 입은 자들, 중환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은 교회는 지금 당장 정화가 필요한 교회입니다.
구성원간의 격의 없고 활발한 소통의 문화가 사라진 교회, 일방통행식, 일인독재식의 전근대적인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 낡은 교회는 빨리 무너져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고통스런 절규에 귀를 막고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면서 우리끼리 높디높은 담벼락을 쌓고 그 안에서 화사하게 웃으면서 지내는 무늬만 성전인 그런 교회는 첫 번째 정화의 대상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을 당신과 만나고 대면하는 ‘기도의 집’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행실이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시고,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영혼이 언제나 당신이 머무는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성전을 지킵시다」
-반영억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 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물방이나 카페가 물질적 이익의 창구가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권과 체면을 지키려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예수님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지킵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한상우신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감사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강도들에게는
강도의
소굴이 있듯이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기도의 몸
기도의 마음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기도의
길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도의 길을
신앙인인
우리가
가로막았어는
안됩니다.
기도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우리자신들입니다.
먹고 사는
행위도
기도의
영역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땅에는
기도의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삶의 질서를
잡아주며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기도의 집에서
기도를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목적지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몸이
기도의
성전이었듯이
우리의 몸도
우리의 마음도
기도로 사랑을
전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위협하고
협박하는
강도들의 소굴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성전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집은
기도하는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의 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하루를
봉헌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3주 금요일-성전, 따로 또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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