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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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23,35-43)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
-키엣 대주교-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hWuQHXGwE8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IHPvuUCU0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한상우신부-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23,35-43)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
-키엣 대주교-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hWuQHXGwE8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IHPvuUCU0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한상우신부-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23,35-43)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
-키엣 대주교-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hWuQHXGwE8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IHPvuUCU0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한상우신부-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
-키엣 대주교-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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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hWuQHXGwE8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IHPvuUCU0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한상우신부-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23,35-43)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
-키엣 대주교-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hWuQHXGwE8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IHPvuUCU0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한상우신부-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23,35-43)
"Amen, I say to you,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며 아버지께 감사드리라고 한다(제2독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복음).
사랑과 자유의 나라 그리스도 왕국
-키엣 대주교-
그리스도 왕국은 효성스러운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마귀들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을 유혹했고 유혹에 넘어간 인간들은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인간을 다시 맺어주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의 효성스러운 아들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가장 처음하신 말씀입니다.
“부모님은 제가 제 아버지의 일을 살펴봐야 할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말씀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말씀이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땅에 사시는 평생 동안 예수님은 피를 흘릴지라도, 그 어떤 유혹에도 당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효성스런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온전한 ‘하느님의 왕국’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들만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 품을 벗어나 마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이 만든 고귀한 사람을 명예와 돈, 본능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게서는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으로 인간은 모든 두려움과 공포, 억압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자유로운 삶의 본보기이십니다. 물질적 사슬을 끊고 자유로운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공 생활을 시작하신 후 마귀들로부터 수 많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죽음을 맞이하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셨고 아주 자유롭게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명예도 없이 맨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치욕스런 순간에도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세상의 속박을 벗어나심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로운 세상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시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보살펴주셨고, 당신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원수를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며 가장 고귀한 사랑이고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진 십자가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승리입니다. 효성스러운 예수님의 삶의 승리이며, 자유의 승리, 그리고 사랑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묶이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회개하는 도둑을 주님의 나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활짝 문이 열려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명예와 이익, 본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왕이십니다. 주님 나라에 저를 받아주소서. 아멘.
1. 지금 명예와 돈과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까? 모든 욕망은 아니더라도 단 한 개의 욕망이라도 벗어나고 있습니까?
2. 효성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님께, 주님께 어떠한 자녀인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3. 다른 누가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거룩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1.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을 기다리는, 따뜻한 눈길을 기다리는, 따듯한 손결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나의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상 위가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된 집과 책상 위에 책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고 정리 정돈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집이 있습니다. 어느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일까요? 대부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사람이 부지런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 주위에 이렇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동창 신부입니다. 신학교 시절부터 방이 얼마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저는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합니다. 책상 위에는 많은 책이 늘 어지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부에게 부지런해서 정리를 잘한다고 칭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을러서 방이 늘 엉망이라고 말했지요. 이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내가 더 게을러. 사람들은 내가 부지런해서 청소를 자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마 네가 더 청소를 많이 할걸? 나는 게을러서 청소를 잘 안 해. 청소하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두고 있을 뿐이야. 게을러서 청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지.”
이 신부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부지런한 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의 방은 너무나 정신없거든요. 부지런히 살다 보니 늘 방이 어수선해졌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실제와 같다고 단정 짓는 우리는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인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정치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께 빈정거리며 조롱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큰 죄를 짓고서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모독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우측에 매달린 죄수는 그를 꾸짖으면서 동시에 자비를 청합니다. 자기 죄에 대한 뉘우침을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라고 하면서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을 하늘나라의 왕으로 믿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진정한 뉘우침 후에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주님 앞에 나설 힘을 지니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hWuQHXGwE8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마지막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심판관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일일이 심판하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미 우리는 양이나 염소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심판하시기 이전에 우리는 심판 받았습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이 이미 나뉘어 있는 오징어와 다른 물고기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오징어처럼 빛을 좋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이 나오는데, 한 명은 구원을 못 받고 한 명은 받습니다. 어떻게 두 범죄자가 하나는 구원되고 하나는 구원되지 못했을까요?
한 죄수는 예수님께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39)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어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메시아의 위에 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더라도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구원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죄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
이 죄수는 구원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는 것과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기억해 달라고 청한 죄수는 그에 합당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두 방법이 있습니다. 상처를 주거나 고마운 일을 하거나. 제가 신학생 때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제 가슴을 꼬집어 상처를 낸 자매가 있었습니다. 엄청 아프게 꼬집어서 손톱자국과 벌건 멍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일은 기억나는데 그렇게 한 자매는 누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공항까지 따라 나온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까지 거의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제가 악한 사람이었으면 아픈 것을 더 기억하려 했을 것입니다. 반면 굳이 아프게 한 사람을 기억하며 속 썩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 금방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상처를 주며 기억해 달라는 방법을 취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일을 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지막 때 예수님 앞에 설 힘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해보십시오.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찌 쉽게 형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쫓기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설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은 오늘 구원받은 죄인처럼 주님께 고마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일이 있는데, 오늘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죄수는 예수님께 고마운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한 것입니다. 그분을 모독하는 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1)
그분이 우리를 변호하시도록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서 변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지막 때 그분 앞에 설 힘을 얻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주님께 저를 불러 주신다는 증거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님이 진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감히 그분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고 바닥만 내려다보았습니다. 가끔 그분의 발가락이나 보며 그분이 가셨는지 안 가셨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 앞에 설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당에서 많은 봉사를 하였지만, 그런 것으로는 성모님 앞에 설 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분 앞에 서려면 죽기까지 당신 아드님을 변호한 고마운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설 힘을 얻으려면, 내가 고마워할 무슨 일이라도 하여라!”
유튜브 채널 ‘From SOLA’에서 감동적인 영상을 보았습니다. 암에 걸려 머리를 밀고 돌아온 주인을 본 반려견의 반응입니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반려견은 주인을 안아줍니다. 물론 다른 반려견은 3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준 주인을 못 알아보고 짖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분이 고마워할 만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께서 해 주신 엄청난 사랑 앞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 우리 앞에 오실 때는 우리는 더는 그분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안 됩니다. 반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앞에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예수님의 나라로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IHPvuUCU0
-조재형신부-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데쟈뷰(Déjà Vu)’라고 합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인데 마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4년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로 구원파의 유병언을 잡는다고 방송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중계했습니다. 유병언이 평소에 했던 말과, 그의 행동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자녀들과 자녀들을 보호하는 경호원의 이야기도 방송했습니다. 유병언의 아들이 무엇을 먹었는지도 중계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고의 원인 파악과 안전조치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유병언에 대한 보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를 끝까지 지켜야 할 선장은 도망갔고 주변에 구조 선박들이 있음에도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토끼머리를 한 사람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마치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수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고한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며 그 토끼머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112에 구조요청을 했던 전화가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일 것이 예상되면 책임 있는 기관에서는 안전조치를 했어야 합니다. 그전에도 할로윈 행사는 늘 있어왔고 안전조치가 있어서 아무런 사고 없이 할로윈 축제가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참사에 대해서 책임 있는 기관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200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대사제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긴 책임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분노가 자신들의 어리석은 결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하며 빈정거렸다.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에 교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왕권을 숙고하고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상에서 의미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그는 옷 벗김을 당했고, 두들겨 맞고, 가시관을 썼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주위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군사들은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심지어 죄수들 중 한 명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예수를 조롱합니다. 반면에 다른 죄수는 그분의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은총을 청하지 않았고, 구원도 구하지 않았으며, 기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회개한 죄수는 그의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시는 왕이심은 알아 뵈었고, 결국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한 형벌을 사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화해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용서와 자비의 왕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전해주는 우도 직천당 사건!
-양승국신부-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아 자비의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는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놀라운 사건, 우도 직천당 사건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유일무이한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지닌 왕, 으리으리한 구중궁궐 속에 거처하시는 왕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거리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속죄의 왕이셨습니다.
운명하시기 직전 단말마의 호흡을 내쉬는 상태에서도 대죄인을 용서하시고,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굳게 약속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를 향해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한 해를 끝맺고, 다음 주간부터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오늘을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심을 기리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언제나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성서주간’으로 정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감사송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는 성자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세우시어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모든 피조물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섬기며 끝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만물을 자신 안에 모아들여 ‘새롭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온 누리의 왕이심을 말해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을 단지 유다민족의 임금이 아니라(2사무 2,4 참조), 온 이스라엘 민족의 임금으로 인정하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
제2독서는 흔히 '그리스도 찬가'로, 그리스도의 우주적 온 누리의 주권과 다스림을 찬양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주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또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만물의 으뜸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시도록 하셨으며, 그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만물을 당신을 통하여 당신을 향하여 화해시키셨음을 밝히십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위에 새겨진 '유다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왕의 다스림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참된 의미를 밝혀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조롱받으신 이야기, 곧 당신이 ‘왕’이기에 조롱당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예수님은 조롱받고 모독당하시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그리스도라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곧 메시아요 왕으로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여 도저히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 곧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예수님의 다스림의 나라’를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 나라일까?
사실 오늘 복음은 죽음의 현장이지만,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말해줍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믿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에게 말합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온 세상에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사랑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이 회개한 강도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도가 하늘나라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하늘나라를 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하늘나라가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받게 되는 선물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사랑의 봉사직무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와 용서와 섬김의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면서 이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 일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직무에 충실할 것을 되새겨보며, 마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기 전에 한 유명한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서 세상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3,43)
주님!
당신 십자가와 함께 있게 하소서
비참하고 초라하고 조롱받고 모욕당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 나 자신을 내어주고 죽어야만 이루는 용서와 화해, 섬김과 사랑이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의 뜻을 이루려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정의와 진리, 생명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아멘.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오늘’ 이루어집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 왕국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왕국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내셨다고 했는데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1베드4,8)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늘 왕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삶의 자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구치소에 수감 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얼굴에 살도 붙고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 처지 환경 안에서도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희망하는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발 다가서는 기쁨을 이미 여기서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 43)
-한상우신부-
단풍잎이
아쉽게
떨어지듯
빠르게 한 해가
지나갑니다.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한
아픈
한 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주시는
그리스도왕께
이 아픔을
내어드립니다.
한 해의 마무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께
봉헌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주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은 낙원을
꿈꾸고 낙원은
현실을 위로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임금이십니다.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되찾아 주십니다.
혼돈 속에서
십자가를
풍랑 속에서
첫마음을
되찾아 주십니다.
부끄럽고
부족해도
또 한 해를
살았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부끄러움과
부족함까지
한 몸이
되게합니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의
뚜렷한 구분이
주님 앞에서는
마음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 누리의
임금이인
예수님을 닮아
더 깊어지고
더 따뜻하여지면
좋겠습니다.
마무리가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마무리는
감사(感謝)입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왕이입니다.
다시 우리들은
사람들 속에서
세상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반성합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세상은
지위나 권력이 아닌
사랑의 가치를
십자가처럼
들어올리는
삶입니다.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늘을 만나고
낙원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용서의 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왕께는
십자가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왕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왕께
욕심이 아닌
용서를 청합니다.
기뻤고 슬펐고
아쉽고 부족했던
이 모든 것이
십자가와 함께
성장하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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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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