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2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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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가 21,5-11)
Jesus said,
“All that you see here?
the days will come
when there will not be left
a stone upon another stone
that will not be thrown dow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구름 위에 앉아 계신 분이 땅 위로 낫을 휘두르시어 땅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인데, 그때에 하늘에서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직 처음이라 몰라서 실수한 거잖아. 괜찮아.”
그리고 몇 달 뒤에 똑같은 실수를 또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절했던 선임은 인상을 쓰면서 말했습니다.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 지금 얼마나 지났는데 이렇게 실수하면 안 되지.”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다면서 언제까지 멍청하게 생활할 것이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알면서도 실수했다면서 선임으로부터 심하게 혼났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체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알면서도 계속 실수합니다.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다이어트에 실패하지 않습니까? 다이어트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또 좋은 성적을 맞는 방법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원하는 성적을 맞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못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에서 오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기계는 알면 실수 없이 곧바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알면서 못하기도 하고 또 모르면서도 할 수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할 때, 이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 악에 속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죄를 따라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셋째, “무서워하지 마라.”(루카 21,9) 지금의 상황, 특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주님이라는 희망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끝이 아님을 깨닫고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구원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해, 더 나은 삶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 지금까지의 삶과 이별하기 가장 좋은 날입니다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도 너를 진심으로 대할 것이다. 누군가를 훌륭한 사람으로 대하면, 그들도 너에게 훌륭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랄프 왈도 에머슨).
멸망의 표징과 부활의 표징의 차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4XQ5c9tq0Z8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여러 표징이 나타날 것이라 하십니다.
첫 번째는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고, 두 번째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며, 세 번째는 큰 지진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이 있을 것이고 마지막 네 번째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의 방식은 바로 우리 자신에서 시작하여 세상과 자연, 그리고 하늘로 시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 방위적인 표징이 있을 것이란 뜻입니다.
한 사람의 힘든 죽음을 생각해봅시다. 불교 신자였던 이지은 씨는 말기 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보살피며 병원에서 함께 입원하였던 다른 암환자들의 임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남편과 함께 입원하고 있던 그 환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의 이름은 정자였다고 합니다. 그분은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고 있었고 몸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어서 천만 하나 덮어놓은 상태였으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소변이 빠져나와 주위에 소변 냄새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분의 아내와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도 못 하던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자야, 정자야! 무서워, 정자야!”
그리고 그 아내의 목을 팔로 두르더니 “나 무서워서 혼자 못 가, 함께 가자!”라고 하며 놓아주지 않더랍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이지은 씨는 갖은 방법을 써서 아내를 그 남편으로부터 떼어놓았습니다.
계속 그런 두려움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자기 남편의 귀를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보통 심박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망하는데 그분은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사흘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이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지은 씨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 사람처럼만 죽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환자처럼 남편도 아내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위에 무서운 사람들이 둘러섰다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남편의 눈은 처음 보는 공포에 질린 눈이었습니다. 이지은 씨는 불교 신자였음에도 ‘이 사람 지옥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병원이기에 무조건 사람들을 불러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언니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돌아가기 2주 전에 그분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후 두 달 반을 굶어 뼈만 남고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었는데도 맥박 30이 되었을 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셨습니다.
[출처: ‘말기암 임종 환자들의 죽음을 보며 겪은 충격적인 사실’, 유튜브 채널, ‘아빠 품 안에’]
이지은 씨의 남편은 죽음 앞에서 이전에 죽은 분의 죽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뻔하였습니다. 죽음이 다 그런 모습처럼 여겼고 자신도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거짓 그리스도에게 속는 일입니다. 꼭 그런 죽음을 따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멸망하는 이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곧 잘못된 믿음, 부정, 반란,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그리고 하늘의 징조까지 따릅니다. 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결국 멸망하게 될 이 세상에 관한 예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라 이 과정을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죽음도 있습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전쟁과 반란도 없으며 큰 지진이나 전염병도 그리고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징조도 없습니다. 말기 암 환자를 18년 동안 보아오던 김범석 교수의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이야기입니다.
일흔 살의 암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는 병원에 왔을 당시 이미 폐암 4기로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가족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사자인 할머니도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습니다. 비록 완치 목적이 아닌 생명 연장 수단의 항암치료일지라도 씩씩하게 잘 따라와 주셨습니다. 진료 때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면 할머니는 옅게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만 하셨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우리 애들이 걱정이지. 어린 손주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 살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할머니는 그렇게 항암치료 받으면서 의연하게 일상을 이어 나갔습니다. 가끔 안부를 물을 때면 딸과 같은 동네로 이사 가서 손주들 볼 일이 더 많아졌다며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해 보이는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좀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정밀검사를 해보니 할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한 상태였습니다. 종양은 이미 너무 커졌고 이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할 때 환자들과 가족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합니다.
“분명 좋아진다 했잖아요.” “왜 나만 약효가 없는 거예요?” “치료 열심히 받았는데 왜 나빠져요?”
가장 처음 반응은 부정, 그리고 분노, 마지막은 원망이라고 합니다.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마음 안에서 전쟁과 반란이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과 병이 창궐하고 헛것까지 보다가 결국엔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란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선생님이 잘 치료해주려고 애썼는데 내가 미안해요. 오늘도 치료 잘 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는 당신의 죽음을 선고한 의사를 오히려 위로해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할머니는 오늘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그 어떤 표징도 없으셨습니다. 착잡한 의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그날도 씩씩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마지막은 일찍 찾아왔습니다. 할머니도, 가족들도, 헤어짐이 가까워졌다는 걸 받아들이고 호스피스 상담을 받으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날 할머니의 딸은 김 교수에게 생각지도 못한 편지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이제 엄마와의 작별 시간이 다가오나 봅니다. 아프기 전과 똑같이 우리를 돌보던 대단한 엄마가 자꾸 약해져 갑니다. 이제는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는 때가 온 것이 아닌가 해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 갈까요, 하고 선생님께 물었을 때 선생님이 엄마랑 꼭 붙어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저랑 가까운 곳으로 이사 와서 아이들 등원도 함께 시키고, 사우나도 가고, 산에도 갔던 지난 1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야속하게도 이 편지를 받은 후 얼마 못 가 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모습처럼 할머니의 마지막도 의연하고 씩씩했고,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김 교수는 말합니다.
“나는 그동안 할머니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짐작하건대 가방끈이 길거나 넘치게 부유한 삶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권력자도, 엄청난 부자도 예정된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 자주 봤다.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받아들이고 본인 몫의 남은 삶을 평소처럼 살아내는 일. 이 평범하지만 어렵고 특별한 일을 해 낸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있다.”
[출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중 ‘18년 의사 생활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암 환자’, 유튜브 채널, ‘책썰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위 할머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멸망의 표징도 겪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을 그냥 평소처럼 살고 잠처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삶의 모습입니다. 김범석 교수는 이 평범하지만 비범한 죽음이 의사 생활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이 할머니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죽음 선고를 받은 지 며칠 안 되어 제가 예수님을 믿느냐고 했을 때 “그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표징을 말씀하신 것은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멸망하는 사람과 이 세상의 미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표징을 겪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잠처럼 평화롭게 만들 믿음을 청합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z-o3UifAZIQ
-조재형신부-
묘지를 산소라고도 불렀습니다. 산소는 말 그대로 산에 모신 무덤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죽은 분들을 산에 묻기도 했지만,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죽은 이들을 묻어왔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선산엘 간 적이 있습니다. 산 위 양지 바른 곳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험하기 때문에 연로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밑에서만 인사를 드린 적도 있습니다. 선산이 따로 없는 사람들이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묻히기도 합니다. 묘지는 목적에 따라서 이름이 정해지기도 합니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위해서 조성된 묘지는 국립묘지입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희생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조성된 묘지도 있습니다. ‘5.18 민주묘지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묘지를 조성하기도 합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모시는 성당묘지가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용인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묻힐 것입니다. 요즘은 매장보다는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주로 추모관에 모시기도 합니다.
위령성월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죽음의 이유도 다양합니다. 죽은 나이도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새로운 거처가 마련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과 수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굴욕과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한 죽음, 때 이른 죽음, 박해로 인한 순교자들을 위로하시고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마련하신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런 안타까운 죽음마저도 주님께 기꺼이 봉헌합니다.
인류의 역사에도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힘과 조직을 가졌던 나라, 어둠을 밝히는 철학과 사상을 가졌던 나라, 고도의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흥망성쇠로 인한 단절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사상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깨달음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바라는 걸 남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건, 남에게도 권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도 역사의 이어달리기에 함께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행복은 희망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행운은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선배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순간을 살아도 우리 인생은 흑자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은 모두 날려버리고, 희망의 날개를 달아서 주님께로 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 예고된 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치유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겠소.”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이나 능력 혹은 세속 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나의 생각과 견해, 편견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내 자신과 내 자신의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속임수에 휘둘리지 않는 삶」
-반영억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사실 혼란이 올 때 조심, 또 조심할 것은 혼란을 틈타서 극성을 피우는 속임수입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게, 저렇게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오늘여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왕국도 역시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늘을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고, 아직 그 완성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최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기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 8)
-한상우신부-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뿐입니다.
이 사랑의 빛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허물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이며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로운 탄생은
언제나 역사의
진통(陳痛)을
건너 뛰지
않습니다.
동요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참된 사랑으로
서로를
속이는 법이
없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전의 화려함보다
하느님을 향한
내면의 성전(聖殿)이
더더욱 중요함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표징들은
모두 하느님을 향한
회개의 초대입니다.
회개로 다시
세워지고
다시 시작되는
참된 희망입니다.
참된 희망은
허물어지고
자주 속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희망은
우리를 저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희망입니다.
오늘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참된 희망을
노래합니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놀랄 것이 아니라
새로워질
순간입니다.
삶이란 다시
하느님 안에서
모순의 옷을 벗고
더 기쁜 새로움을
향하는 변화입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기도처럼
진실함의 기도는
모두를 기도가
되게 합니다.
기도는 속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성전은
인격의 성전이며
공동체의 성전입니다.
인격을 인격답게
변화시키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방식은
기도입니다.
끝까지 기도하는
삶에서 희망은
탄생됩니다.
희망을 탄생시키는
기도의 새날이
허물어지는 어둠을
뚫고 솟아오릅니다.
사람의 희망이 아닌
하느님의 희망을
아침기도로
찬미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화요일-지푸라기에 속아 지푸라기를 잡지 않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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