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21일 연중 34주일 월요일

Margaret K 2022. 11. 21. 07:15

2022 11 21일 연중 34주일 월요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하였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성모님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전해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6-50)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즈카르야 예언자는 시온에게, 만군의 주님께서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대 로마는 다신교였습니다. 하나의 신이 아닌 여러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러 신 중에 부부 싸움의 수호신이 있습니다. 비리프라카 여신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비리프라카 여신을 모시는 사당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 번에 한 사람씩 차례로 여신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여신에게 호소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잠자코 듣고만 있어야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다 보면 상대방의 주장도 일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풀이하면서 호소하는 동안 흥분했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결국 여신을 찬양하면서 둘이 사이좋게 사당을 나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누군가와 다툴 때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이야기하기에 더 바빴던 것이 아닐까요? 내 말을 통해 상대의 이해를 바라기보다, 상대의 말을 통해 상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말을 듣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 말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말만을 통해서 어떤 화합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상대의 말을 잘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함께 사는 비결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를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하였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단순히 봉헌만으로 성모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는 봉헌을 자기 삶으로 더 거룩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율법학자들은 마귀 들린 자라고 떠들곤 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돌게 됩니다. 그 소문을 들은 성모님과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에는 자기 가문에서 사회적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성모님과 친척들이 서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특별한 분이시고, 하느님께 봉헌되신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끌고 집으로 갔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찾았을 때도 마음에 간직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내 이웃과의 관계는 어떠하십니까? 나를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서 마음 안에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각자 본 풍경을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다(마스다 미리).

 마리아 자현을 전례에서 기념하는 이유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BdhocwiF7A

 -조재형신부-

 

불교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결코 그 하나는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다른 것 모두와 저 구슬들처럼 그 빛을 주고받으며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이러한 연기적 세계관연기법의 진리를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인드라망의 비유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두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구조 속에서 더불어 존재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서양의 인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그러나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동양의 인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입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인 시애틀이 미국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시애틀은 땅을 팔라고 하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반짝이는 개울물과 강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와도 같다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우리 조상의 목소리이다강은 우리 형제이며 우리 목을 축여 준다향기로운 꽃은 우리 자매이고사슴과 말과 큰 독수리는 우리 형제이다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나우리는 땅의 일부분이며땅은 우리의 일부분이다." 결국 미국의 대통령은 땅을 샀지만 원주민 추장의 숭고한 뜻을 받아들여서 도시의 이름을 시애틀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도 있지만 시애틀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인드라망처럼 우리의 만남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곤 합니다제가 아는 분은 미국에 와서 서로 만났고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신랑과 신부의 부친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그리고 신랑과 신부의 할아버지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고 합니다어쩌면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의 우정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노스캐롤라이나의 한인 성당으로 지난봄에 사순특강을 갔습니다신부님은 6월에 제가 있는 뉴욕으로 잠시 여행을 왔습니다이렇게 서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 본당의 사목위원이 저와 함께 일하는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었습니다신부님이 뉴욕으로 오면 주방 자매님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었습니다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엘 가면 주방 자매님의 아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옛 어른들의 말씀이 맞습니다. “착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고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행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인연으로 만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인드라망의 세계를 알고 계셨습니다아메리카 원주민인 시애틀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우리가 인드라망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전쟁폭력증오분노원망불평불만은 사라질 것입니다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겸손나눔친절온유절제사랑희망이 가득할 것입니다그것들이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철학문학종교신앙은 바로 우리를 인드라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은 아닐까요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아메리카 원주민 시애틀의 마음처럼 살라는 것은 아닐까요?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예수님, 그리고 나자렛에 남아 계셨던 성모님, 두 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몸과 마음은 언제나 일심동체, 하나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성모님의 머릿속은 온통 아들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음식을 드실 때는 머릿속에 즉시 예수님 얼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끼니나 챙기며 다니나?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 식사나 제때 하고 다니나? 춥지는 않을까? 어디 아픈 데는 없을까? 성모님의 안테나, 주파수는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성모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마리아! 큰일 났습니다. 아드님 상태가 꽤나 심각한 듯합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유다 세력가들과 맞짱을 뜨는 것은 보통이고, 헤로데를 비롯한 고위층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명대로 못 살겠는데, 어쩌죠? 우리가 가서 데리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성모님은 형제들(아마도 사촌, 팔촌 형제들)을 앞세워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나와 있는 사도에게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놀랍게도 문전박대였습니다. 어머니가 오셨다고 분명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하시는 말씀이 성모님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었음일 분명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복음 12장 48절, 50절)

  

나자렛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모님께서 느끼셨을 비참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문전박대로 인한 수모와 상처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 입에서 나온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마음에 담고 또 다시 성찰과 숙고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비록 내 귀가 뚫리지 않아서 이해를 제대로 못 하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순간이 올 것을 확신하며, 또다시 깊은 침묵 속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노력 끝에 마리아의 신앙은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위대한 하나의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내 안에 가둬두어야 할 아들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백성을 위해 부단히 내어드려야 할 아들, 정말 아쉽지만, 떠나보내 드려야 할 아들입니다. 그는 내 아들이기도 하지만, 만민의 아들, 내 스승, 내 주님이십니다.”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곧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문전박대하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이와 같이 아들로부터 냉대 당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잃었던 아들을 성전에서 찾았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을 때도 그러했고,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을 때,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였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는 마치 옷가지와 음식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어머니를 돌로 쫓았던 성철스님 이야기를 떠올려줍니다.

이는 참으로 불효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진리를 향한 결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마태 12,48-50)

 

이 말씀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내치신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모님에 대한 외적인, 가시적인 이해를 뛰어넘도록 해줍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육적인 혈연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당신의 첫 번째 가족이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아기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모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분명 성모님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분으로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께서는 아렸을 때부터 또한 아기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봉헌하고 또한 축성 받으셨습니다.

결국 성모님도 예수님도 다 같이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아버지께 봉헌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성모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를 향하여 있는지, 그분의 뜻을 실행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 나라의 가족」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잘났건 못났건경건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상관없이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입을 수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행동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가족과 친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를 붙잡으려 나서기도 하였습니다(마르3,21).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섞이고 어울렸기 때문입니다아파하는 곳에 사랑이신 그분이 계셨습니다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고 반문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바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대한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가족은더이상 혈연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 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학연지연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의지입니다그러므로 설혹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그분의 참다운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아시죠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내려놓으려면 그분의 뜻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고그 신뢰가 믿음이죠아버지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7).고 말씀하셨습니다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응답하셨습니다그리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지닌 복된 분으로서 사셨습니다그러므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에 속하십니다비록 예수님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분의 가족이 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고백했습니다해와 달은 생겨난 뒤로 하느님을 거역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 예수님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서로가 형제자매입니다믿음으로 형성되는 새 가족의 품위를 지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50)

-한상우신부0

오르막과
내리막을
봉헌합니다.

봉헌을 멀리서
찾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생활의 봉헌이며
가장 가까운
관계의 봉헌입니다.

자발적인 봉헌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참된 봉헌입니다.

봉헌으로
시작하여
봉헌으로
마무리되는
봉헌의
이 여정입니다.

사랑의 봉헌은
흩어진 형제들을
하나로 모으는
일치의 힘이
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까지 하나로
이어주는 봉헌입니다.

봉헌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깨끗한
우리의
첫마음입니다.

인격은 봉헌을
통하여
더욱 깊어지고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봉헌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가장 고귀한
신앙입니다.

내어드려야
낮아질 수 있고
내어드려야
고요할 수
있습니다.

봉헌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봉헌이 우리가
누군지를
다시 알려줍니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봉헌은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놓쳐버린 것은
봉헌의 정신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봉헌이며
봉헌은 우리의
참된 실행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봉헌으로 오시고
봉헌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의 봉헌이며
사랑의 봉헌입니다.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모든 삶의 시간이
봉헌이며
회개입니다.

만남을 봉헌하고
마음을 봉헌하는
참된 평화입니다.

봉헌은 그래서
평화이며
은총가득한
삶의 기쁨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봉헌의 실행입니다.

오늘도 기쁜
봉헌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삶의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말씀 나누기 - 성모 자헌 축일-봉헌의 완성, 봉헌의 대물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