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11. 19. 07:04

2022 11 19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40)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힌 두 예언자가 죽음을 당한 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최근 통계청 ‘생명표’(2021) 발표를 보니, 한국 평균 기대수명(평균 생존 연수)이 남자는 80.5세, 여자는 86.5세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은 51.1세, 여자는 53.7세였습니다.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평균 수명이 는 것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도 기대수명 순위가 2위라고 하니 전 세계적으로 ‘장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문제는 나이를 먹을수록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면 고집만 세진다고 하면서 특히 성격이 괴팍한 노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힘이 점점 없어져서 일할 기회 역시 사라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외로움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내몰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우선 인정해야 합니다.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고독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힘든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음의 장점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영성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후손에게 지혜를 넘겨줘야 할 때입니다. 이 지혜는 계속된 생각으로 깊어지는데, 계속해서 자기 처지를 부정하며 고집만 부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연스럽게 사람들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를 간직하는 삶이 먼 미래에도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만이 고독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두가이파와 함께 부활 논쟁을 하십니다. 사두가이는 솔로몬 왕 때의 대제관 사독의 후예를 자처하는 유다의 귀족 계급이며, 에제키엘서에서는 경건한 레위족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마카베오 시대에 바리사이가 세력을 증대함에 따라 예수님 시대에는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침략군 로마와 가까웠고, 종교적으로는 모세와 율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불멸성, 육신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을 존중하는 현세주의자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라는 자부심이 있던 사두가이는 사실 편협되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읽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편적으로 한 곳만 떼어 읽으면서 자기 뜻이 하느님의 뜻인 양 했습니다.

또한 결혼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기에 산 자의 하느님이지 죽은 자의 하느님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편협된 성경 이해가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게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삶, 지식이 아닌 지혜를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물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라(에픽테토스).

-이기우신부-

 부활신앙, 이전과 이후의 삶과 죽음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95Ztu8MXJmI

 -조재형샌부-

 

퀸즈에 있는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였습니다신부님과는 지난 3년간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당연히 모친을 위한 연도에 함께 했습니다연도는 부제님이 말씀의 전례를 주례하였고고인의 큰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그리고 고인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습니다제단 앞에 모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인사하면서 마쳤습니다오늘은 유족께서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나눈 일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고인은 103살 이었습니다. 1919년에 태어났습니다할머니는 불교를 믿다가 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당시 미국에는 사찰이 없었다고 합니다할머니는 큰 딸의 권유로 성당으로 왔습니다할머니가 성당으로 오면서 자녀들도 모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와서도 제단 앞으로 와서 불교식으로 엎드려서 큰 절을 하였습니다사람들이 말을 하니 딸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하고 하였습니다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절하면 안 받아 주신다니성경에 보니 엎드려 절하나이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자 딸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신자들도 제단 앞에 와서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할머니는 언제든지 성당에 오면 제단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막내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엄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혼하지 마세요마음 바꾸지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마음 바꾸지 마세요계속 한 길을 가세요.”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저의 어머니도 신학생인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어머니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고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신앙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신앙은 지식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백인대장은 신앙이 없었지만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부하를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향해서 일찍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강하다.’라고 하셨습니다과부의 헌금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부유함과 지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척도는 아닙니다갈망과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입니다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적자생존약육강식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존재의 차원은 믿음희망사랑의 세상입니다정결순명가난의 삶입니다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더는 슬픔도아픔도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알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있고움직일 수 있습니다알과 병아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저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나비가 된 애벌레는 더 이상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애벌레와 나비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게 됩니다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실에서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부활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어둠에서 빛으로 나갈 수 있다면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다면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양승국신부-

 

죽음 전문가셨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께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제 인생도 돌아보니 참삶을 살지 못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했고, 숨을 부단히 쉬고 있었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살아있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육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이, 정신이 죽어버렸던 순간들입니다. 

 

여기저기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좀비 영화의 등장인물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은 축복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20장 38절) 

 

그러나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구차스러운데, 오늘 내 인생길이 이토록 가시밭길투성이인데, 이런 내 삶이 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와 예수님의 신적 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곧 영적 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 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 22,39-40).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을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고서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 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3,6)를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1코린 15,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주님!

저희를 깨우쳐주소서.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임을!

생명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함을!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됨을!

「언제나 생명을 주시는 분」

 -반영억신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더 소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묶여 삽니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잘못 집착해서 오늘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약속된 미래가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미래가 없이 오늘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밝아 자기 잇속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2,9)하며 약속된 부활의 삶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몸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도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희망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견디어 냅니다. 그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약속을 믿기에 현세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현세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망하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면 곡식 단 들고 올 제 춤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손길을 막지 못한다”(집회39,18)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이에게 언제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산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결국 깨어 있는 이에게 능력의 하느님으로 다가오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흔들비쭉일 뿐입니다. 이 시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하느님을 모시듯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이고, 지금 이 세상 삶은 소풍입니다. 소풍 끝나는 날 하느님을 대면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산 삶이 기억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ofmkorea.org)

-김명겸OFM-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24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