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4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뒤에는 베트남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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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가 21,20-28)
When these signs begin to happen,
stand erect and raise your heads
because your redemption is at ha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대바빌론이 무너졌다는 천사의 소리와 하느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는 소리를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되는 징벌의 날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심리학자 베르가드는 남성 7,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끝에 좋은 남편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찾았습니다.
첫째, 침착하다. 다툴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갈등을 대강 끝내지 않는다.
둘째, 성실하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약속을 꼭 지킨다.
셋째, 안정적인 삶을 중요시한다.
어떻습니까? 이 글을 보신 남편은 자기 자신이 ‘좋은 남편’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이 좋은 남편의 기준으로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자기는 다르다면서 거부하겠습니까? 혹시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남편’이라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는 엄격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위의 세 가지 좋은 남편의 공통점은 결국 아무렇게나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자신의 진정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나의 불행이 아닌, 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도 계속 우리에게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말고 ‘남’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 순간에는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엄청난 선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환난에 대해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 분노의 날은 곧 닥쳐올 것이고, 그날에 예루살렘은 짓밟힐 것이며,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거나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에 잡혀갈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이렇게 끔찍한 종말의 메시지가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해주십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또다시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와서 선택된 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단, 주님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될 때만 끔찍한 종말의 세계에서도 주님을 통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 특히 주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물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예루살렘엔 들어가지 마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CvAttF8_Oo
바빌론이 무너졌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QCqCelVGts
-조재형신부-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부르던 노래 중에는 양희은 씨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멜로디가 감미롭고, 가사도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꽃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꽃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꽃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바람아, 비야 알고 있니,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겸손으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버지의 자비로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다사다난했던 이 세상, 마치 한순간 가슴 설레던 소풍 같던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떠나시는 분들의 마지막 모습이 참으로 천차만별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미처 준비되지 못한 분들의 죽음입니다. 살아생전 그저 죽음은 아직 내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려니, 아직 멀었으려니, 생각했던 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전혀 준비되지 못하다 보니 끝까지 죽음을 거부하고 도망가다가 마지못해 맞이하는 죽음, 떠나기 싫어 죽기살기로 발버둥치다 맞이하는 죽음은 너무나도 불행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죽음을 바라보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한없이 스산하고 찹찹합니다. 그들에게 역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요, 극심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완벽하게 준비된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런 분들에게 죽음은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선물이요 기쁨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더 큰 빛을 보기 위한 작은 빛의 소멸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성 안토니오)
“사랑하는 하느님,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저를 어디로 이끌어 가실지를,
저의 다음날이
저의 다음주가
저의 다음해가
어떻게 될지 정말 모릅니다.
손을 펴려할 때,
당신이 제 손을 잡고
당신 집으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사랑에 감사합니다.”(헨리 나웬 신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 곧 종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재림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를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침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유혹은 달콤합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반영억신부-
지금 이 순간, 나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했는가?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인생의 여정에 아쉬움이 있든 그렇지 않든 어느 날 마지막에 직면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에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준비한 사람은 알곡으로 하늘 곳간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쭉정이로 불에 태워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합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자연의 고마움도 사라지고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종말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환희와 희망입니다. 마지막 매달릴 곳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가톨릭성가445)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목요일-하늘 정신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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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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