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2. 11. 26. 06:55

2022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가 21,34-36)

 

Be vigilant at all times
and pray that you have the strength
to escape the tribulations that are imminent
and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며 부르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몇 명을 만났습니다. 초등학생 때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데,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숙하고 반가웠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리에 있는 친구들, 그 자리에서 나름의 위엄을 보이면서 지냈을 텐데 이곳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애가 되어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한 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놀자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바쁘게 일만 하면서 지냈던 친구들, 그래서인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몰라 노래방 책자를 한참이나 뒤적이다가 겨우 번호를 찍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모두 느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분명히 빠른 노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린 노래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어느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 나이가 들면 박자 맞추기가 힘들어서 느린 노래만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은 다시 초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 역시 나이는 모두 먹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합니다. 받아들여야 “그러려니” 할 텐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불공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니’라는 마음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마지막 주님의 날에 대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찾아오며,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그날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거부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냥 포기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주님의 날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은 무조건 거부하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고, 또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도 안 됩니다. 그보다 마지막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는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말하는 대림 제1주일을 보냅니다. 이 땅에 강생하여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는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묵시록 말씀처럼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묵시 22,5 참조), 다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 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오서서, 주 예수님!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G-_opaoazo

 -조재형신부-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전부터 시작됩니다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전입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주님 앞에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10월에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사고의 원인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예상했지만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예전에는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예상했고경찰들이 질서유지를 했다고 합니다지난 2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그럼에도 시와 구청 그리고 경찰은 그에 대한 안전대책을 세우지 못 했다고 합니다예전에도 별 일없이 끝났으니 이번에도 별 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백조가 호수 위를 우아하게 떠 있는 것은 물 밑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오리 발이 있기 때문입니다다중이 모이는 축제가 안전하게 마무리 될 수 있는 것 또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활동하는 안전요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사후의 약방문일 수 있지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책임있는 사람들은 안전대책을 숙지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봉화의 아연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광부 2사람이 매몰되었지만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캄캄한 갱도에서 9일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0년 경력의 노련한 광부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습기가 많은 갱도에서 위험한 것은 저체온증이라고 합니다광부는 입사한지 5일 된 신임광부와 비닐을 모아서 작은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천막 안에서 지내면서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습기를 먹은 나무른 산소 용접기를 사용해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늘 가지고 다니던 커피포트의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내고 물을 끓였다고 합니다일하면서 먹는 커피믹스는 허기를 견디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다행히 아연광산은 통풍이 잘 되었고 호흡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주변의 물건들을 적극 활용하고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캄캄한 갱도에서 9일을 버틸 수 있었고 마침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본당에 25인승 버스가 있었습니다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대형버스 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본당 교우 두 분과 함께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교우분들은 합격을 했고저는 시간 초과로 불합격 했습니다다시 한 번 도전하려고 준비를 했는데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노력할 만큼 했으니 이제 운전면허 시험은 그만두고합격하신 분들이 버스 운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버님은 제가 불합격 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저는 차량 봉사자들을 위해서 주일 아침이면 커피를 준비해드렸고잘 다녀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였습니다대신에 저는 9인승 승합차를 운전하였고동네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곤 했습니다신발은 발의 크기에 맞추어야 하듯이제게는 9인승이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강사는 스키를 잘 타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넘어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그리고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억지로 스키를 타려고 하지 말고 넘어지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면 스키를 재미있고 안전하게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강사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잘 넘어지고 곧 일어날 수 있으면 스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재물권력명예성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율법학자바리사이파 사람부자청년대사제빌라도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그러나 몸을 팔았던 여인도눈이 멀었던 소경도나병환자도하혈하던 여인도중풍병자도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죄인으로 불렸지만 예수님을 만났고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종말인 우리 각자의 죽음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집약하고 또 집약하셔서, 딱 한 문장으로 만들어 건네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6절)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루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두고, 그럼 대체 언제 자고, 언제 일하고, 언제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해결하라는 것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밥도 먹지 말고, 사람들도 만나지 말고, 일상의 삶을 포기하며 살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삶을 기도화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을 기도하듯이 해나가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아침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억지로, 마지 못해 식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식사를 하게 될 가족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준비하면, 그곳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잔뜩 취해서 주저리주저리 술주정을 하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성찰하고 감사하면서, 성모송이라도 한번 바치고 잠을 청하는 것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난데없이 닥쳐온 큰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절대 낙담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하며, 고통과 시련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곧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매 순간 볼 줄 안다면,

우리 마음이 갈망할 수 있는 모든 것도 거기서 얻게 된다.

현재는 늘 무한한 보배로 가득 차 있다.

기도로 하느님께 몰입하면 매 순간이 기쁨과 감사의 성사가 된다.

그 순간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수용하면 성사가 이루어진다.

현 순간의 관상을 받아들이고

기도 중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대면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마음은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갈망하고,

많이 갈망할수록 더 많이 받는다.”(장 피에르 코사드)

 <“너희는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사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다림의 자세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되, 무엇보다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러지다’는 것은 ‘무디어지다,’ ‘각성하지 않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물러지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은 바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심걱정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부족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티모 4,16)

 

둘째 말씀은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라' 함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함이요, '깨어 기도하라' 함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음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 함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앞에 서 있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음입니다.

 

결국 ‘주님 앞’에 서 있다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자신 앞’에 서 있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마음이 물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깨어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주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전히 근심걱정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가 ‘이방인의 땅 전쟁터’ 같아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님께 의탁하면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서 있음’, 곧 ‘하느님에 대한 현전 의식’이요, 주님 면전에 나서 있는 대면의식입니다.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이요, 그분의 눈길, 그분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있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오늘의 말 · 샘 기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방심하는 날 심판을 받는다」

 -방영억신부-

 

때로는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마음껏 즐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21,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간곡히 당부하셨는데 그 말씀을 외면하면 결과는 뻔합니다. 저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흔들비쭉입니다. 사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7,15).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 하여라”(루카21,36).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육체를 따라 삽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며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몸은 예수님 앞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8,5).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영적인 것보다는 육적인 것이 더 매력적이고 가까이 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유난히 빛나는 빨간 십자가를 등지고 유혹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한 잔술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후회할 것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자신의 꼴을 봅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는 말씀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유혹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재앙의 길을 피하게끔 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루카4,13). 하물며 연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자주 접근하겠습니까? 그러니 회개의 삶도 한 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통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 5,8-9).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따르고 그분과 일치되기 위해 깨어 있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시간을 모르니만큼 언제나 깨어 기도하고 잠시라도 방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방심하는 순간이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있으십시오”(에페6,18). 세상에 너무 푹 빠져 있어도 문제요,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고 하늘은 세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영생을 희망하는 만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끝날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이 결정합니다. 천국을 희망하면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 36)

-한상우신부-

늘 기도하는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기도의 힘 없이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에
묶여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방탕과 만취가 아닌
절제와 질서가
필요한 우리들
인생입니다.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우리들 삶에
찾아 옵니다.

평상시의 삶이
그만큼 소중하고
특별합니다.

일상의 삶이
무절제한
근심으로
가뜩이나 지친
우리들 마음이

또 다시
물러지는
일상이 아니라
소중한 가치를
나누고 실천하는

깨어 기도하는
삶이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특별함에서 벗어나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우리들과
기쁘게
나누셨습니다.

깨어있는 기도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특별함입니다.

특별함을
내려놓을 때
우리들 마음은
다시 열리고
다시 감사를
체험하는
깨어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삶의 소중한 시간을
이끌어 오신 주님께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진심어린 마음을
나눕니다.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죽음이 번개처럼
우리들의
마지막이
덫처럼
올지라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흐릿했던 하느님을
빛같이 또렷하게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일상을
다시 점검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이 바뀌면
내일은 더
좋아집니다.

기쁘게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저마다의
삶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특별하기에
기쁘고
소중한 것이 아니라

소중하기에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
나누는 우리의
시작과 끝입니다.

부족함과 기쁨도
어리숙함과 사랑도
모두 선하신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아버지 하느님!
진심으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하느님을
향하는
깨어 있는
기도의
기적같은
사람의 오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토요일-깨어 기도한다는 것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2월 1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