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Margaret K 2022. 11. 27. 06:29

2022 11 27일 대림 제1주일

 

대림 시기

대림 시기는‘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4주간을 말한다. ‘대림’(待臨)이란‘오시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도착’을 뜻하는 라틴말‘아드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런데도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을 매년 되풀이하여 기억하고 있다.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새롭게 기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해의‘전례 주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올해 대림 시기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렸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도 묵상하게 한다. 이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12월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가12월17일부터 성탄 전야인12월24일까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두 부분으로 묵상하게 한다.
대림 시기에는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대영광송’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알렐루야’는 노래한다. 사순 시기는 회개가 강조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노래를 생략한다. 그러나 대림 시기는 기다림과 희망의 시기이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래서‘알렐루야’를 힘차게 노래하는 것이다. 

☆☆☆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오 24,37-44)

 

Therefore, stay awake!
For you do not know

on which day your Lord will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민족들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예고 없이 올 것이므로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제로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에 눈물의 기도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 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주님께서 저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짝꿍을 만나 결혼했다면 잘 살았을까요? 저의 부족한 능력과 저도 파악하기 힘든 성격을 볼 때, 마누라와 자식들 모두에게 큰 시련을 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을 저를 맡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품 안에 있어야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요.

이제 사제가 되어서는 특히 여성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극성스러운 여성 몇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저 좋다고 쫓아오시는 그분 덕택에 여성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 여성의 유혹도 없어졌습니다. 아마 이러면서 웃으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네가 뭘 하겠니? 나 아니면 먹고나 살 수 있겠어?’

불러주신 그분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주님밖에 모릅니다. 미리 알면 시간에 맞춰 잘 준비하겠지만,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 강생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지요. 이 기간에 주님 오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12월 25일이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성탄 대축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판공성사도 보고, 구유와 성탄 트리를 만들면서 예수님 오심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시 오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언제일까요?

만약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날 것을 사람들이 미리 알았다면 너도나도 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면 될까요? 다시 오시는 날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보다, 주님의 합당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지금 당장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며 사는 삶을 통해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인생은 잃는 것과 얻는 것으로 얽혀 있습니다.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정호승).

 어떤 삶이 깨어 준비하는 삶일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OImBWvRUe6M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그리고 복음 내용은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깨어 준비하던 이들은 구원받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를 알지 못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교회라는 방주에 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8-39)

  

    깨어 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그러니까 ‘바쁨’입니다. 우선 너무 바빠서 죽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며 노아의 홍수 때처럼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신이 없어 깨어 있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을 이 세상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도 용서를 청하러 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런 것이 놀라운 이유는 바로 ‘죽음’ 앞이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함이 놀라운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주님께서 오실 때를 아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 지는 몰라도 매일이 주님께서 오실 수 있음을 아는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따라서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행히 할머니의 돌아가심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어린 시절을 지냈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오늘도 죽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고 죽음을 무서워하면 잠도 무서워하게 됩니다. 잠잘 때 기분 좋게 잘 수 있다면 깨어날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처럼 기분 좋은 잠을 자려면 하루가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하루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내일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천상의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이휘재 씨를 질투했습니다. 나의 희망이 이 세상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지금 희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성공한 삶이다!’라고 생각하니 버티는 삶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희망’인데,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게 만드는 것도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하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이 세상 것들이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갖지 못해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나뭇잎을 찾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더니 나뭇잎이 없는 것에 대해 더는 절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천상의 것을 희망하게 되었고 그때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바꾸지 않으면 불러도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제의 길로 저를 아주 오래전부터 부르고 계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가 모든 사람을 배로 초대해도 그들의 희망은 이 지상 것에 있었기 때문에 노아의 부르심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사라져버릴 이 세상, 가라앉는 배에 집착하지 맙시다. 우리 희망은 하느님 나라, 천국에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희망을 품으면 이제 가지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주셨으면 나도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주셨기에 하느님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내가 하느님이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많은 실패가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 것에 대한 희망을 접고 천상의 것을 희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내가 천상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하느님의 자녀만 삽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결국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병에 걸렸음에도 “오, 아름다워라!”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내가 사랑이 됩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태양이기 때문에 뜨거운데 우리가 그 태양 덕분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 때문에 위로 오르는 사랑의 몸통과 같습니다.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없으면 사랑은 커지지 않습니다. 내가 천상을 더 희망하고 하느님임을 더 믿어야 사랑이 더 커집니다.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마치 오징어잡이 배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더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이 향주 삼덕에 기인합니다. 향주 삼덕을 닦는 오징어와 같은 존재만이 결국 방주에 탈 수 있고 천상 시민이 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과 믿음과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분 품에서 자라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 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혼자 어린 자신을 키우던 그 모습을 아들이 더 늦기 전에 눈에 담고 싶어서 였습니다. 아들은 다행히 어렸을 때 수술을 받아 한쪽 눈만 0.2의 시력을 가졌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해 준 희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아들은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이제 아버지의 눈이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 희망도 가질 수 없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을 수도 없으며 그래서 아버지나 친구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믿어주었고 희망했으며 사랑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쏟아지는 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깨어 준비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cwUAw75XzGE

 -조재형신부-

 

뉴저지 가톨릭방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방송미사 녹화를 부탁하였습니다아직 9월인데 대림 1주와 2주의 미사를 녹화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저는 미리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이렇게 2023년 대림 제1주일은 다른 해보다 3달 먼저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새로운 한 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시작합니다이 기다림의 시간을 대림(待臨)’이라고 합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고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입니다이스라엘 백성을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해방 시켜주실 분입니다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교회는 그 메시아가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그 메시아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대림은 2,000년 전에 오셨던 메시아를 기억하며우리에게 다시 오실 메시아를 깨어서 기다라는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 데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붉게 익은 대추 한 알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생명을 유지하고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문학음악미술건축수학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재물명예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의미는 진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섬기려고 오셨습니다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대낮에 행동하듯이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어라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

 -양승국신부-

 

내년 봄 화사하게 피어날 수선화며 튤립 구근을 열심히 심고 있습니다. 피정 오신 교우들이 군락을 이룬 청초한 꽃들을 보고 탄성을 올리고 사진을 찍고 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꽃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심는 입장이 되다 보니, 그 작업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화사한 꽃 무리 그 배경에는 누군가의 노고가 있다는 것, 그래서 꽃 한 송이 앞에서도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땅을 갈아엎은 후 고랑을 내고, 고랑 사이에 구근을 일일이 꽂고 나서 흙을 덮어줍니다. 혹한을 잘 넘기라고 볏짚도 덮어줍니다. 그리고는 꽃대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요.

  

기다림이라는 단어 참 가슴설레게 합니다. 오랜 세월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살다 보니 너그러움, 여유, 유유자적, 은근함, 결국 기다림의 영성, 기다림의 미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어떤 지향을 두고 열렬히 간구하고 또 실제적인 삶 안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면 이제 여유를 갖고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빠름’을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름’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는데 다른 죄들도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급함과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때 정말 한 3분만 참았더라면!’ 하는 교도소 수감자들 제가 한둘 만난 게 아닙니다. 이미 깨져버린 사랑,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인연들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대단하십니다. 인내의 달인이셨습니다. 성격 급한 저 같았으면 30년 동안 나자렛에서의 숨은 세월을 못 참고 폭발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아까운 시간 다 흘러가고 언제 공생활 시작할거냐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아버지께서 신호를 보내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사사건건 트집 잡고 늘어지는 적대자들, 저 같았으면 한번 싹쓸이를 하던지 판을 뒤집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대림 시기 첫날을 맞이했습니다. 영광스런 주님 부활에 앞서 그를 준비하는 사순시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대축제 성탄에 앞서, 그를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있습니다. 

 

그냥 기다림이 아닙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너그러운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결국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는 영적인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우리에게 지침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장 42절) 

 

많은 경우 우리는 외칩니다. 왜 빨리 하느님께서 내 이 큰 고통, 깊은 슬픔에 개입하지 않으시는지?이 비정하고 사악한 세상을 왜 빨리 깔끔히 정리하지 않으시는지? 왜 저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살도록 마냥 놔두시는지...

  

하느님은 우리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몇 사람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인류 전체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동작이 느리십니다. 대신 크고 여유로운 걸음을 걸으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충분히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주 천천히 시험지를 걷으십니다.

<“깨어 있어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때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는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37-41절)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대체 끔찍하고 잔인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심판을 받은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마구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사람들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안일한 삶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그들의 무관심과 타성에 젖은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 젖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는 죄를 피한다 할지라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선과 정의로 진리 편에 서서 이를 행하고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에로 나아가야 하고, 항상 빛 가운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주인과 언제 올지 모르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마태 24,43)

 

이는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으며, 하느님을 기다려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오실 것이니,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전례에서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 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셋째는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4,42)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분명한 사실은 주인님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오십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굳이 고대하고 기다릴 필요도, 깨어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그분이 오신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진정 믿는 자만이 진정 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언제 올지를 모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요, 오실 님을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24,44)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는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깨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깨어난 까닭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헛군데 눈 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얼차려 입니다.

곧 정신차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깨어있음’의 둘째 의미인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깨어있음은 한편으로는 빛을 향한 깨어있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한 경계로 깨어있음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로마 13,1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서야 비로소 깨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 사이에서 살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셋째의 의미인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깨어, 빚 속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대림초를 밝혔으니, 깨어 그 길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

(이사 2,5)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깨어 있어라.”

(마태 24,42)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군데 눈 돌리지도 말게 하시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시고,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대림 제1주일-위대한 깨어 있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2월 1일 대림 제1주일

 

생활 성서 듣는 소금 항아리 : https://www.youtube.com/@83biblelife

작은형제회 - 프란치스코회 OFFICIAL CHANNEL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