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11. 25. 06:35

2022 11 25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에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루가 21,29-33)

 

 Consider the fig tree and all the other trees.
When their buds burst open,
you see for yourselves and know that summer is now near;
in the same way, when you see these things happening,
know that the Kingdom of God is nea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천사가 사탄을 결박하여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어좌에 앉으신 분이 죽은 이들을 그 행실대로 심판하고, 새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무의 변화를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아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를 위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것저것 따져보면서 후회를 줄여나갑니다. 그럼에도 후회스러운 일은 너무나 많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한 자매님께서 잘 아는 지인을 통해 좋은 투자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우리도 투자하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정보를 믿는 것은 어리석다면서 화를 내고 투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인의 말을 듣고 투자했던 다른 친구들 모두 큰 이익을 본 것입니다.

얼마 뒤, 남편이 지금 있는 아파트를 팔고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합니다. 그 지방의 집값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라면서 빠르게 일 처리를 한 것입니다. 결과는 원래 살았던 집값은 많이 오르고, 이사 간 곳은 폭락했습니다.

계속된 후회 가득한 선택에 잠도 잘 오지 않고,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선택한다는 것은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한 선택이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더라도 그 대가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최악의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최상의 결과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후회가 더 커져서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세상의 관점으로 행복해지는 길일까요? 어떤 분께서는 성당 다니는 날부터 일이 꼬인다면서 제게 세례받은 것 취소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는 최악의 결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는 날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이 말씀을 들으면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이 무섭게 느껴지면서 절망에 빠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상징적입니다. 그것은 그 무서운 일들을 예언하시면서 위협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산고 후 산모의 기쁨처럼 그 고통 후에 하느님 나라가 동녘에 떠오르는 해처럼 나타나는 기쁨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희망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통해 하신 말씀처럼,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가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올 줄 알게 되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후회를 줄이는 선택,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더 큰 후회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현재에 충실해야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후회를 줄이면서 기쁨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매일 아침 눈뜨며 생각하자. ‘오늘 아침 일어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나는 살아있고, 소중한 인생을 가졌으니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타인에게 나의 마음을 확장시켜 나가기 위해 모든 기운을 쏟을 것이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이다(달라이 라마).

 나의 장례를 어떻게 미리 준비할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WyoQebAU-M

오늘 복음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설명하신 이 모든 일이 순차적으로 다 일어나게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변화를 예로 들었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넘으면 가을, 겨울로 간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조금 황당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2-33)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금까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한 세대 안에서 다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는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종말의 내용이 각자의 죽음에도 적용이 된다는 것으로 밖에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가 부임한 본당은 연령대가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장례도 많이 납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여름에 부임하고 나서 스무 분 정도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말씀드리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많이 돌아가셨는데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 분은 한 분 밖에 안 계셨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후 코로나가 있어도 성당에서 장례가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편의상 부모의 장례미사를 빈소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전 아무리 그래도 평생 다니던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하고 신자들에게 기도를 받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인들도 그러한 생각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모습이 있을까요?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리고 코로나의 영향도 크겠지만, 어쩌면 한 번도 자녀들에게 당신의 장례미사는 꼭 성당에서 하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무리 장례미사가 번거롭기는 해도 부모가 남긴 유언을 자녀들은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냉담하는 자녀들도 성당에 나와 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데 그 한마디 말씀을 안 하고 가신 것입니다.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무언가를 할 때 잘 되는 일이 있을까요? 시험공부를 안 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요? 연습을 전혀 안 하고 운동하면 잘 될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죽음이 쓸쓸하게 되는 이유는 준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오듯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순서대로 좋은 장례가 되게 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몇 번 말씀을 드렸지만, 제가 본 가장 위대한 장례미사는 이태리 마체라타 교구의 톨렌티노 본당에서 한 장례미사입니다. 3개월 암 선고를 받고 3년을 사시며 돌아가신 한 자매님의 장례미사였습니다. 성당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례미사는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3년 동안 자신의 장례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장례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지표가 됩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웃고 모든 이가 울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우리의 장례미사는 자녀들이 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없다면 자녀와 같은 사람들을 만들면 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힘만으로는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부모가 준 명령, 곧 생존의 명령을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편영화 ‘아바리야’(Avarya)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로봇과 함께 우주를 배회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지구가 멸망하자 이 노인은 자신의 로봇에게 자신이 살 지구와 가장 비슷한 행성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노인은 지쳐 있습니다. 이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는 일을 멈추고 그만 죽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리고 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하지만 로봇은 그것 까지도 계획해 놓았습니다. 주인이 죽으면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주인을 사이보그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로봇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해야 해서 주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죽어도 계속 살려냅니다. 그렇게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신세가 됩니다.  

 

    자녀가 우리에게 받는 명령은 그저 생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그 본성상 누군가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로봇을 자녀로 보았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모에게는 지옥이 됩니다. 같은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의 네 번째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인데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지 않으면 사랑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신앙을 잃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부모에게 소홀히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장례에 충실히 하려고 하지만 결국엔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가 신앙을 잃어갈수록 노인들은 대접을 못 받습니다. 자녀가 마치 모기처럼 돈만 알고 자기 편안함만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최저이고 노인 빈곤율이 최고입니다. 그만큼 신앙교육이 안 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내가 효도를 받고 싶다면 자녀가 신앙인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머물던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효도를 받게 될까요? 자녀를 주님께 바침으로써 효도를 받게 됩니다. 모세가 그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해 자신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저는 저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매우 이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는 부모님께 해야 할 의무를 최대한 다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비난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은 물론이요, 부모님과 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지려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가 되지 않았다면 아버지 장례미사에 그렇게 많은 신자가 와서 기도해 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러한 장례를 치르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저를 사제가 되게 허락하신 때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자녀에게 효도를 받고 싶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십시오. 이웃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첫 번째 이웃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가졌다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무가 아닌 하느님께 대한 의무입니다. 왜 이러한 상황에서도 부모들은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보다 학원에 보낼까요? 부모의 마지막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마지막 때 부모의 영광은 자녀들의 신앙의 수준에 비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녀 명령 시스템을 신앙으로 바꿔주십시오. 아니면 육체적 자녀가 아니더라도 신앙의 새로운 자녀들을 탄생시키십시오. 이것이 미래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천년왕국과 새 하늘 새 땅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mGWGRI28qAU

 -조재형신부-

 

언제나 자리를 지키는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늘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성당에 굳은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힘든 내색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 위한 밥과 반찬을 척척 만들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썰물처럼 사람들이 나간 성당에서 주보를 정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피정이나 교육이 있으면 제일 먼저 신청하고 맨 앞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적당이 일하고 쉬는 사람들에게는 약간 어리석어 보이기도 할 겁니다세상의 좋은 것들을 먼저 찾아다니는 그래서 가끔은 주일 미사에도 빠지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으로 보일 겁니다자기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는 생색을 내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열심히 봉사하고나누는 사람들도 가끔은 놀러가고 싶고쉬고 싶고대접받고 싶고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저도 사목을 하지만 제가 쉬고 싶을 때는 쉬고휴가가고 싶을 때는 휴가가고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꼭 해야 할 일도 미룰 때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외할머니 보고 싶다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습니다./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도 세상에서 기쁘고 즐겁게 지내고 싶었을 겁니다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를 선택했습니다봉사자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대접받고 싶었을 겁니다다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를 선택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한 이들봉사하는 이들가진 것을 나누는 이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인간 정신의 놀라운 능력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기 때문입니다인간은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첫째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이지만그 욕망은 절제되어야 합니다.

둘째인간은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하지만 그 모순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것도 인간이고남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도 인간이고자신의 욕심 때문에 타인을 죽이는 것도 인간입니다.

셋째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선과 악 사이에 있고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혼자서 살 수 없고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넷째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을 생각하는 초월적 존재입니다명상과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섯째그래서 인간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나그네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듯이인간은 삶의 여정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전달기계가 아니고인간은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인간은 시편 8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사보다는 못하게 만들어졌어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고선과 악 사이에 있으며 중간자입니다또한 인간은 천성을 따르는 존재입니다천성을 따르는 사람은 인성을 갖는 것이고이 인성을 잘 닦는 것이 입니다이 도를 알아 과는 과정은 라고 말을 합니다인간은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유기체가 아니라하늘의 뜻을 따라서 도를 공부하는 성품을 지닌 존재입니다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말씀의 특징 중 가장 우세한 것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도 잘 이해할 정도로 쉽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지역의 주변 환경과 자연 현상들도 자주 활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와 더불어 근동 지방의 주요 나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이 돋고 지는 것을 통해 종말,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시골에 살면서 주변 자연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실생활에 적극 활용하는 편입니다. 개구리가 합창하면 곧 비가 오겠구나, 하며 이런저런 대비를 합니다. 아침 해무가 자욱하면 날이 낮에는 햇빛이 창창하고 덥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은 물고기들도 불안해져 입질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애써 출조를 하지 않습니다. 폭우가 내려 흙탕물이 바다로 유입되면 아무리 물때가 좋더라도 돌게나 골뱅이들이 모래 깊이깊이 숨어버리니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징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하게 관찰하고 대비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주님의 날에 대한 준비는 소홀한 저를 향한 예수님 말씀이 날카롭습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복음 21장 29~31절)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표징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 삶을 다시 한번 정리정돈해야겠습니다.

  

지상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천상의 일도 생각해야겠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조금씩 줄이고, 천상의 것들, 정신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늘려가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루 온 종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나칠 정도로 엉뚱한 것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단 한치 눈앞의 이익이나 재미에 온 신경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

 -이영근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세상의 종말과 하느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곧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루카 21,30),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루카 21,31) 한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혹은 안 올지, 추울지 혹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표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대의 징표를 진정 깨닫는다면, 세상을 달리 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을 바라보고, 모든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나 혹은 이 세상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언젠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오신 주님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아니한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가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받았음을 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발견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그것이 우리를 발견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베풀어진 하느님의 선물'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맛보기 시작한 그 무엇을 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사랑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늘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먼저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으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주님!

제 영혼이 당신의 자리이오니, 말씀을 이루소서.

당신께 승복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활기차게 하소서.

저에게 뿌리신 말씀이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시고, 당신의 말씀이 저에게서 사라지지지 않게 하소서.

아멘.

「앞을 볼 수 있는 눈」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면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 영적인 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 속을 알면 누구보다도 부끄러움이 많고 자비를 간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사라질지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나 자신의 한계 속에 내 옆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종말의 정확한 날짜를 감춘 것은 공포를 갖게끔 하기 위한 것이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주님의 주권과 통치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금요일-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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