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성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고,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루가 17,26-37)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And there will be two women grinding meal together;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속이는 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왔으니,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나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정신과 의사 ‘에릭 번’은 인간에게 3가지 인생 각본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각본은 평범한 각본입니다. 나답기보다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러하게 하는데….’, ‘내가 뭐 특별하다고….’ 등의 말을 합니다.
두 번째 각본은 패배자 각본입니다.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기억에 사로잡혀 삽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고,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나는 나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각본에 따라 사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승리자 각본을 따라야 하는데, 오히려 평범한 각본, 패배자 각본에 더 가깝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절대로 평범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명도 똑같이 만들지 않으신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 각자를 보면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과 비슷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분명히 다릅니다.
패배자 각본 역시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아오스딩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진 시간입니다. 후회하며 뒤를 바라봐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닥치는 날이고, 모든 가치 판단이 뒤바뀌는 날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구원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람은 그 소명만을 향하여 가야지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롯의 아내가 구원의 길을 따라가다가 남기고 온 재산이 못내 아쉬워 뒤를 돌아다보고 죽었다는 기사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구원의 피난 길을 떠났으면 그저 그 길만을 향하여 가야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하십니다.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랐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만이 승리자 각본에 맞춰서는 사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이 세상의 법을 뛰어넘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느님 나라의 법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각본은 ‘승리자 각본’입니다.
소돔에서 탈출했더라도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kr1iEFDofpA
박해윤 작가는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4년간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가족과 함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의 한 시골에 들어왔습니다. 박해윤 작가가 박사학위를 마친 2013년에 남편도 갑자기 퇴직을 선택합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마흔이었습니다. 박해윤 씨도 교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초등학생이었고 둘째는 취학 전이었습니다. 모아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이전 경쟁의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시골 생활이 7년이 지났고 아직은 괜찮다고 합니다.
지금은 시애틀에서 한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의 오래된 조립식 집에서 삽니다. 서울에서는 방 한 칸도 얻지 못하는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집입니다. 먹기 위해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처음에 시도했다가 사슴들이 채소 순을 다 뜯어먹어 아예 수렵 채취하며 삽니다. 곳곳에 자라나는 블랙베리와 야생초를 채취하고 통밀을 갈아 빵을 구우며 야생 동물들이 먹지 않는 깻잎이나 방울토마토를 반야생으로 야산에 키워 먹습니다.
네 식구가 한 달을 지내는 데 사용되는 돈은 100여만 원이라고 합니다. 물가는 서울과 비슷합니다. 통신비는 약 10만 원입니다. 스마트폰은 없고 통화와 문자만 되는 2G 휴대전화 두 대를 네 식구가 나누어 씁니다. 전기세는 여름에 2만 원 겨울엔 15만 원입니다. 에어컨은 없고 난방, 급수, 취사, 모두 다 전기입니다. 물은 우물물이고 정화조를 이용합니다. 유류비는 15만 원보다 조금 덜 나오는 수준입니다. 자동차 유지비는 월평균 10만 원 정도입니다. 4인 가족의 한 달 식비는 40만 원입니다. 필요한 돈은 시간이 날 때 쓰는 글을 메일로 보내거나 시골 생활과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은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의 인쇄비로 충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신없는 경쟁사회에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인물 중에 붉은 여왕이 나옵니다. 붉은 여왕은 항상 앨리스의 손을 잡고 달립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앨리스는 무척 힘이 드는데 여왕과 신하들은 아무리 오래 달려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붉은 여왕과 신하들은 쉬지 않고 달리는데도 언제나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여왕이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여기에서는 말이야, 같은 자리에 있고 싶으면 있는 힘껏 달려야 하는 거야.”
여기서 박해윤 작가는 깨닫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나를 잃게 만든다는 것을. 모두가 열심히 달리지만 결국 그 욕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붉은 여왕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돈과 쾌락과 권력일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욕망을 줄이는 일이 나에게 불가능한 고행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욕망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욕망을 줄이면 ‘나’가 사라집니다. 내가 사라지면 그제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27년간 사람을 마주치지 않고 혼자 산에 숨어 살았던 크리스토퍼 노마스 나이트(Christopher Thomas Knight)의 사례를 들기도 합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집을 나가 혼자 살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 먹을 것과 입을 것 등을 훔쳐 그 오랜 시간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27년간 혼자 살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외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박해윤 작가는 이러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욕망만 남으면 나가 사라지고 그러면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그녀는 완벽한 자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완벽한 자유란 곧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크리스토퍼도 27년의 여정이 끝난 후,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독은 저의 지각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죠. 늘어난 지각을 스스로 적용하니, 제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관객도 없었고, 저를 보여줄 대상도 없었죠. 저 자신을 정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 완벽히 무의미해졌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가 사라지면 자유롭습니다.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요? 크리스토퍼는 외롭지는 않았지만 “완벽히 무의미해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모기처럼 산 것입니다. 남의 음식을 훔치며. 자유롭기는 하겠지만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 때 노아의 배에 들어가지 못해 수장당한 사람들이나 소돔 땅에 그대로 머물러 유황불에 죽은 사람들처럼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그들이 노아의 배, 곧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세상 욕망과 함께 달렸기 때문입니다. 붉은 여왕에게 잡혀 자기 자리를 지키려다 그렇게 멸망한 것입니다. 소돔 땅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고 비록 교회 안에 들어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더라도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처럼 세속, 육신, 마귀의 욕망을 버리지 않고 교회에 머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교회는 박해윤 작가처럼 세상 사람들을 붉은 여왕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진정한 자신으로 살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욕망만 버린다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불교의 교리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버리는 이유가 자기 정체성이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것을 알려줍니다. 롯과 그 가족을 데리고 소돔 땅을 빠져나올 때 그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에서 하느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배가 곧 교회를 상징하는데 교회 안에 들어오면 성체를 영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머무는 것이 곧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욕망을 버린다고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욕망이 곧 나인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붉은 여왕이 추구하라고 하는 욕망과 반대입니다. 그것이 사라져야 사랑의 욕망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랑하면 하느님이 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이 말씀과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우리 정체성을 바꿔줄 은총과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오늘 복음에서 노아의 방주와 소돔의 두 이야기를 한꺼번에 해 주셨을까요? 하나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이고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여 사랑의 욕망대로 살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소돔을 탈출하지 못하면, 곧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사랑의 욕망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곧 삼구에서 벗어나 사랑의 욕망으로 나아가야 구원되는 것입니다.
마르티노의 외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r-l52e85A
-조재형신부-
하느님께서는 제가 생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제게 길을 보여 주신 적이 많습니다. 몸이 조금 피곤하고, 지쳤을 때입니다. 일주일 전에 잡힌 약속을 취소하기 어려웠습니다. 신부님들과 전임 사목위원들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루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일정을 취소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일 날 날씨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2020년의 코로나19는 신문사의 운영에도 커다란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문 홍보는 신문사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데 전혀 홍보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신문의 광고도 도움이 되지만 예년에 비해서 광고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함께 지내는 사제들과 돈독한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니라면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사위는 사람이 던지지만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이 젖는 경우도 없습니다. 아직 내리지 않는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경우도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보다는 감사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인 성당이 생길 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을 도와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겨울 여행을 가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고 합니다. 주말에 가면 가족들이 모두 함께 갈 수 있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니 주말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주중에는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교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주중에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갈 수 있는 사람만 가자고 하였습니다. 주일에는 본당 미사를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결정은 본당 신부님의 몫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결정을 하였고, 그 뒤로 본당의 봉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다시 대학에 입학하여 교사가 되었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한인 공동체에 한국학교가 생겼고, 아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열정이 결실을 맺어서 한국어가 제2외국어로 고등학교 교과에 채택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신부님과 의견이 달라서 섭섭했지만 돌아보면 이민사회에서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라는 말이 제게는 깊은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부부는 함께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부부는 엄연히 ‘이심이체(二心異體)’입니다. 단정하고 깔끔해서 좋았고, 자유롭고 편해서 좋았지만 결혼하면 깔끔한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것은 질서를 깨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과 몸을 가진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삶의 기반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문제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나의 의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공동체는 부족함에도 하느님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 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 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루카 17,37)
<오늘의 말 · 샘 기도>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반영억신부-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죄악이 있는 곳에 심판이 있게 마련이고, 심판이 있는 것은 죄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 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지금은 참과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은 없습니다. 올바른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 37)
-한상우신부-
잎들을
떨어뜨리는
11월의
나무들을
봅니다.
불타올랐던
나뭇잎도
나무이며
나무가지도
나무입니다.
이것과 저것의
구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뿐
결국 하나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단 한 사람,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죽음까지
넘어서는
따뜻한
사랑이십니다.
무한히
열려져 있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살려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
삶의 자리를 떠난
다른 곳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과
죽음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사람의 삶을
다시금
하느님 안에서
묵상하는
기도의 새로운
시간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2주 금요일-두 개의 밧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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