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루가 16,9-15)
I tell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with dishonest wealth,
so that when it fails,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교 때 그녀는 키 160cm에 몸무게 90kg였습니다. 또 지저분하고 꾸미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지요. 잘 씻지 않았으며 늘 편한 체육복만 입고 다녔습니다. 사교적이지 않아서 말주변이 부족했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무려 1년을 쫓아다녀서 사귀자고 했지요. 남자는 “네가 너무 뚱뚱해서 같이 다니기 쪽팔려.”라고 말하면서 철벽을 쳤습니다. 첫사랑의 실패로 방에 틀어박혀 가슴을 치며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결심합니다.
1년 뒤, 실연당했을 때의 절반 몸무게가 되었습니다. 과체중에서 벗어나자 건강이 좋아지면서 피부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남자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너 말투가 이상해. 우리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또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나운서 학원에 등록해서 말투를 고치면서 사교적으로 변했습니다. 스피치 지도사가 되었고, 얼마 뒤에 다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그녀의 옷차림이 여자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피부관리와 화장, 멋진 옷까지 그녀는 점점 아름다워졌습니다. 얼마 뒤에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살림을 못 한다고 결혼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헤어졌습니다.
이제 울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두문불출하며 살림에 몰두했습니다. 다음은 영어를 못한다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웃습니다. 영어 공부를 할 것이니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남자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울기만 했다면 ‘패잔병’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승전고’를 울릴 수 있는 변화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에 온 마음을 두는 열성과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빛의 자녀는 영성 세계를 위하여 배우고 그에 합당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재물은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육신 생활과 이웃 사랑의 방편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통해 생활을 향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재물만을 요구하는 열성만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쓴 소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jROv-Jjqggs
-조재형신부-
뉴욕에는 미네와스카 주립공원이 있습니다. 가을 단풍이 참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공원 정상에 있는 호수는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입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맑고 푸른 호수, 색색의 단풍은 도시의 맨하턴 뉴욕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멋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단풍을 3번이나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엠이에서 소풍으로 갔었고,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가을 나들이로 갔었고, 답사로 갔었습니다. 날씨도 달랐고, 단풍의 색깔도 달랐고, 같이 한 사람들도 달랐지만 제게는 다르면 다른 만큼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답사에서는 처음 접하는 설렘이 있었습니다. 엠이 소풍에서는 잘 준비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가을 나들이에서는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대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사람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나누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날씨를 바꾸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엄하다고 힘들어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너무 편하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사목을 하니 힘들다고 했었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지내는 것이 버겁다고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주어진 환경에 자신을 맡기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 주어진 환경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일을 많이 시키면 배울 것이 많다고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일이 적으면 책 읽을 시간이 많다고 좋아했습니다. 주임 신부가 되어서 성당을 신축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간다고 즐거워했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같이 있으니 힘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청에서는 주교님의 운동 상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높은 산은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는 매우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활력이 넘쳤습니다.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팔 수 있고, 사막에서도 온풍기를 팔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4년 전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뉴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위로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어디에서든지 잘 할 거야’ 아마도 저의 낙천적인 성격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친구들의 말처럼 코로나가 왔어도 아직까지는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없어지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물은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물이 원하는 대로 그릇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더우면 수증기가 되어서 바다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바다보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순응하면서 바다로 가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주님, 우리가 잘못하여 세상이 병들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주님, 우리가 잘못하여 세상이 병들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불찰로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들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주님, 희생자 부모들의 가슴을 쥐어뜯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주최 측의 부재, 자발적인 행사, 개념 없는 놀이문화,
책임은 정부가 아니라 개인에게...
그보다는 일촉즉발의 순간 또다시 국가가 부재했습니다.
책임자들이 잠들었습니다.
침이 마르도록 외쳤던 국민의 안전은 뒷전이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 의상을 고르던 청년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 웃던 우리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청년들이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마음껏 젊음을 발산하도록
도와주지 못했음을 가슴 칩니다.
주님, 마치 악마 같은 우리를 제대로 벌하십시오.
주님 야수(野獸) 같은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한 스님이 당신 체험담을 쓰셨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제목도 특이합니다. 겨울 부채! 부채는 통상 여름에 사용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겨울 부채라니요? 겨울에 부채는 별 의미나 존재감이 없는 물건이지요.
우리 인간 존재가 때로 겨울 부채 같습니다. 지금은 떵떵거리며 난다긴다하지만, 길어봐야, 80년, 90년입니다.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때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그 모든 것들, 우리가 하늘 높이 쌓아 올렸던 높은 탑들, 몇백 년 써도 모자라지 않을 은행 잔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면서 너무 무의미한 대상들에 집착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과도하게 몰입합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부질없는 것들에 지나치게 연연해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스님의 가르침은 정말이지 소중합니다.
생선을 즐겨 먹지만, 생선이 없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재물을 즐기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졌다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식을 탐구하되 남보다 더 안다고 해서 뽐내지 않고
남보다 덜 안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산속에서 밤하늘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태연하다.
바오로 사도 역시 살아생전 스님이 체험했던 그 ‘넘어섬’을 온몸으로 이뤄낸 분이었기에 오늘 우리를 향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외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피서 4장 12~13절)
오늘 우리도 넘어서는 작업에 충실하면 좋겠습니다. 매일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일에도 충실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이 세상을 초월해서, 이 세상 너머의 것을 내다보면 좋겠습니다.
무척 어려운 과제인 듯 보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이영근신부-
오늘날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을 비롯하여 삶의 온 국면이 시장화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시장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돈’이 우상화 되고 신격화 된 것입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55항)
그래서 교종께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풍토를 강도 높게 질책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모는, 소위 말하는 '돈의 제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다.”(바실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경제제도는 극도로 높은 소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려 한다.”(국제민중운동회의, 2014.10.28)고 지적하시며, “사람이 돈을 숭배하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것”(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회의)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볼리비아 방문)라고 질타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돈과 이윤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정책을 철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인간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라.”(파라과이 방문에서 세계 지도자들에게)고 주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혹 우리의 속마음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돈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 꼴이 됩니다.
사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은 재물의 노예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맬 뿐입니다.
결국 '주님을 섬길 것인지, 우상을 섬길 것인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이유는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이며,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듯이, 재물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재물도 모두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루카 16,15)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잘 벌어서 잘 써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몇몇 분에게 돈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먼저 봉헌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상점이나 식당, 사업장에 오시는 첫 손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 몫이 얼마가 되었든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하겠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한 달을 모은 것이라고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순명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달 매상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재물의 축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주어진 선물 덩어리를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주시는 분은 외면한 채 주어진 선물을 가지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다툽니다. 재물의 용도는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는 도구일진대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의 노예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재물은 분명 이용해야 하는 도구이지 섬겨야 하는 주인은 아닙니다.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6,17-1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내 영혼을 비추어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고 했습니다. 혹여 물질이 우리의 보물,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집회서는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 황금은 그것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고 어리석은 자는 모두 황금에 사로잡히리라. 아무 흠도 없고 황금을 밝히지도 않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31,5-8).
이런 의미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불의함조차도 거부하지 않고 만나 모두를 하느님의 충실성 안에 초대하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단죄와 판단으로 자꾸만 갈라놓고 제 선함과 의로움을 내세우는 세대 안에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과 한계를 보듬고 살펴 여유와 자비를 갖추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칩니다"(함께야). 물질은 함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선을 만들어 내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이 크더라도, 허물을 안고 사는 죄인이라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제 입맛에 맞는 이들만 찾는다면 신앙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잘 벌어서 잘 쓰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요.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루카 16, 10)
-한상우신부-
작은 단풍들이
모여 가을 숲을
이룹니다.
이와 같이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실한 과정이
성실한 결과를
만듭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되는 삶의
참된 행복입니다.
조금만 붙잡아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우리들 이웃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작은 일에
우리가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작은 나눔의
시간입니다.
다시 삶을
배우는 사람의
시간입니다.
짧은 보폭이
모여 긴 보폭이
됩니다.
삶과 생활은
아주 작은 일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총결합체입니다.
아주 작은 일들이
사실은 가장 소중합
일들입니다.
아주 작은 일들이
실은 가장 큰
일들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에 성실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삶의 시작과 끝은
아주 작은 일에
우리가
성실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으로
채워지는
큰 사랑입니다.
큰 일에만
마음을 쏟고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다시 성실해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성실한
날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주 작은 일들에
성실한 사람이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1주 토요일-안분지족安分知足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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