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루가 15,1-10)
“What man among you having a hundred sheep
and losing one of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이롭던 것들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아홉보다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무서운 롤러코스터 옆자리에 앉아주는 일, 시내 중심가의 음식점에서 같이 카레를 먹어주는 일, 이혼 서류를 제출할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동행해주는 일….
이런 일에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누가 이 사람을 고용하겠느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일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대박이 났습니다.
일본의 30대 청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대여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즉, 자신의 시간을 타인에게 대여하는 서비스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필요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롭고는 싶지만, 외로운 것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조용히 가까이 있는 사람, 현대인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대부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까이에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이 모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님께서는 늘 조용히 우리 곁에 가까이에 계십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셔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할 때만 간섭하실 뿐입니다. 이 모습에 다시금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주인의 모습을,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집 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부인의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삶 안에서 힘들어서 주님 곁을 떠나는 우리의 모습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고, 잃어버린 은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려고 하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회개해서 당신 곁으로 다시 다가오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이라며 투덜거리지만,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인의 회개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이 당연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판단과 단죄는 멈춰야 합니다. 죄인이라고 해도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곁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임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판단과 단죄보다는 사랑으로 그 옆자리에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모습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구하는 법: 먼저 나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zpXlBfj6R4U
귀하디 귀한 진리를 대하는 방식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62FYJ-NiZg
-조재형신부-
강론을 하고, 강의를 하는 편이지만 때로 강론을 듣고, 강의를 듣는 것은 제게도 큰 기쁨입니다. 말씀을 통한 은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계속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강론하신 신부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공감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팔을 들고 기도하면 아말렉 군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 군사와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후르는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모세는 계속 팔을 들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었고, 결국 여호수아는 아말렉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부탁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불의한 재판관은 가난한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계속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어 주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가장 엄하게 책임을 묻는 것은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부대와 군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초소에는 경비하는 군인들이 시간을 정해서 지키게 됩니다. 만일 경계를 소홀히 해서 적이 들어오면 부대가 위험해 지기 때문입니다. 지휘관들은 야간에 순찰을 돌면서 초소경비를 잘하는지 감독합니다. 만일 이 때 지휘관의 순찰을 알아채지 못하면 경계를 소홀히 한 책임으로 엄중한 문책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소 경비는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저도 군에 있을 때 6초소의 경계 근무를 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적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지만 순찰하는 지휘관에게 경계근무를 잘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커다란 댐도 작은 틈새로 물이 새면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직책과 직분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과 재능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직책과 직분 그리고 능력과 재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깨어있는 처녀들이 신랑을 맞으러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계속의 영성’은 깨어 있는 영성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세상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깨어 있음’의 또 다른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했던 바오로 사도에게 세상의 직책과 직분은 이제 헛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비유는 죄인을 끝까지 찾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한 죄인 하나를 두고 즐거워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 속에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낼 때까지' 뒤쫓아 다닙니다.
여인 역시 ‘잃은 드락메’를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이는 잃은 것을 찾으시는 구원의 주체가 하느님이심과 또한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잃은 것을 되찾은 후에,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8)라고 말씀하심은 이 비유의 정점이 잃은 것을 되찾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되찾은 후에 ‘이웃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 '기쁨'은 너무도 커서 도저히 나누지 않고는 못 베기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마치 백 마리의 양을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아팠고, 은전 한 드락메를 잃어버린 슬픔이 마치 열 드락메를 전부 잃어버린 것처럼 슬펐기에,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기쁨은 마치 백 마리의 양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고, 은전 한 드락메를 되찾은 기쁨이 마치 열 드락메 전부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양들을 맡기신 아버지께 대한 ‘충실함’이요, 드락메를 결혼의 징표로 주신 신랑이신 예수님께 대한 ‘신의’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나 안에서의 전부인 사랑’, ‘전부 안에서의 하나인 사랑’, 바로 이 사랑이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전 인류를 구원하신 전부인 사랑입니다.
바로 이 크신 사랑을 만나면 그 누구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고, 나누지 않을 수가 없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회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당신과의 만남의 결과요, 당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쁨이요, 재회의 기쁨이요,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에 대한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요한복음 사가가 말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기쁨”(요한 16,22)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요한 15,2)하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9,10)는 당신 자신의 소명과 행위를 옹호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찾고 계시는 음성, 곧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6) 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목숨까지 바치신 당신의 외아들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었던 양을 되찾기 위해 광야를 쫓아다니며, 잃었던 은전을 되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목자의 사명도 깊이 새겨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미’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기쁨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이 구원자이심을 명심하고, 그분처럼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며,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하고, 소중히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6)
주님!
저를 먼저 찾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하나를 사랑하되 전부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고
먼저 사랑하되 끝까지 신실하게 사랑하시니 찬미를 받으소서.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이지만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니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최상의 기쁨입니다.
아멘.
「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반영억신부-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벌 나비일까, 똥파리일까?
-김찬선신부-
오늘은 다음 말씀이 제 눈에 탁 들어왔습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 죄인들이 주님 말씀 들으려 가까이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신앙인의 눈에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들이 실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사람이 죄인이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이 어찌 죄인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얘기한 죄인들이란 기준이 주님 말씀이 아닌 다른 것,
곧 율법이나 로마법이나 당시 실정법을 기준으로 한 죄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처럼 신앙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눈으로 본다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입니다.
또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한때 주님을 떠났었습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떠났었을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어서 떠났었을 수도 있고,
세속을 더 사랑하여 떠났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통하여 이제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주님 말씀이 향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벌이 꿀을 찾아 모여들듯
우리에겐 주님 말씀이 꿀이고 향기여야 합니다.
요즘 너무 향기를 찾지 않고 악취 나는 것을 찾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유투브를 보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데,
허비한다고 함은 그것들이 쓸데없거나 악의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왜 향기 나는 주님 말씀에 끌리지 않고
악취가 펄펄 나는 것들 곧 혐오를 조장하고,
극우든 극좌든 극단으로 치닫게 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노력하게 하기보다는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게 하는 잡글들에 끌리는 것입니까?
심하게 얘기하면 그들이 벌이나 나비가 아니라 똥파리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번 이태원 사건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려는 유투버들이
온갖 자극적인 사진이나 헛소문을 유포하는데
그런 잡글들에 끌리는 사람은 다 똥파리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말씀을 향기로운 말씀이라고 하며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전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잘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모든 사람의 종이기에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하며
내 주님의 향기로운 말씀들을 전해야 합니다.”
나는 벌 나비입니까?
아니면 똥파리입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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