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3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5,31-47)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you have eternal life through them;
even they testify on my behalf.
But you do not want to come to me to have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희망을 걸어 온 모세가 그들을 고소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부부 모임에서 한 가지 게임이 진행되었습니다. 4종류의 와인이 있는데, 부부 중 한 명이 각 와인을 마셔본 뒤, 그 와인에 대한 시음기를 적습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이 시음기를 읽은 뒤에 와인을 마시면서 시음기에 맞는 와인을 맞추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부는 와인 애호가 부부입니다. 남편이 시음기를 적는데 ‘미디엄바디, 오크, 아스디얼, 버터리, 허메이셔스’ 같은 전문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작성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4개의 와인 중에서 몇 개를 맞췄을까요? 단 하나 맞췄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부 차례입니다. 역시 남편이 시음기를 적는데, 영문학과 교수인 남편은 시적 표현을 쓰면서 작성했습니다. 결혼 기념일에 여행 갔던 계곡의 물줄기에 비유했고, 어려웠을 때 아내와 고통을 함께 나눌 때의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교수의 아내는 하나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부부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결과는 4종류의 와인을 모두 맞췄습니다. 어떻게 해서 다 맞췄을까요? 남편은 이렇게 시음기를 적었습니다.
“가장 달다.”, “두 번째로 달다.”, “세 번째로 달다.”, “안 달다.”
사람과의 소통이 잘 안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통이 잘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것도 이해해주지 못하냐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소통은 잘 될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와 눈높이를 맞춰주신 것입니다. 우리와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님과 눈을 맞추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계속 늘어놓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들어야 소통이 됩니다. 주님과도 또 이웃과도 잘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2,000년 전,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정말로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주님을 반대하고 제거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과의 소통도 잘 듣는 데서 시작합니다. 주님과의 소통도 잘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면서, 주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기대한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행복이란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하지 않을까?(요슈타인 가이더)
-조재형신부-
요한복음 8장에는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정한 여인은 사람들에게 끌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부정한 여인에 대한 판결을 묻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하라고 대답하면 부정한 여인은 이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땅에 무엇인가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였던 핏발은 사라졌습니다. 돌을 들고 있던 손의 힘도 빠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부터 자리를 떠났습니다. 걸리지 않아서 그렇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던 ‘부정한 여인’은 예수님 말씀처럼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렸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의 빈 무덤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보았습니다.
루카복음 15장은 ‘되찾은 양, 되찾은 동전,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잘못한 이를 벌하기 보다는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아온 아들에서 우리는 ‘큰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은 돌아온 동생이 반갑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새 옷을 주고, 반지를 주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평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했는데 잔치를 벌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탕한 동생이 돌아오니 잔치를 벌이시다니요?” 큰 아들의 모습에서 돌을 들고 부정한 여인을 심판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돌아온 아들을 변호합니다. “얘야! 나의 것은 이미 모두 너의 것이 아니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돌아왔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오늘 독서는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고 새로운 백성을 선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셨는데 광야에서 모두 벌하였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2번째 본당에서 보좌신부를 할 때의 기억입니다. 지구 교사들과의 모임을 마친 후 10시가 넘게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안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문을 두드리니 신부님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현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몇 시냐?”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것도 서운했는데, 현관에서 나무라는 것이 서운했습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이해 해 주었습니다. 4번째 본당에서 보좌신부를 할 때의 기억입니다. 월요일 새벽미사를 마치고, 본당 신부님과 함께 산정호수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운전을 하기로 했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가 그만 미사시간에 조금 늦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제의실에서 신부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수녀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 신부는 미사시간에 절대로 늦는 법이 없습니다. 늘 미리 와서 묵상하고 미사 준비를 했는데, 오늘처럼 늦으면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니, 미리 전화를 하세요.” 수녀님은 본의 아니게 본당 신부님에게 말씀을 들었지만 저를 믿어주시고, 이해해 주신 본당신부님이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해외로 성지 순례를 가셔도 기쁜 마음으로 본당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겸손하지 않는다면, 표양을 보이지 않는다면, 거짓과 변명, 비방과 질투의 말을 일삼는다면, 희생과 봉사를 하지 않고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이미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잘못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완벽하신 변호인이십니다. 우리들 또한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 심판자가 되기보다는 이해하고 감싸주는 변호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주님으로 고백하고 흠숭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사이비 종교로 깊이 빠져 들어간 자녀들 때문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부모님들을 가끔 뵙습니다. 그야말로 피눈물을 흘리십니다. 정말이지 사탄의 무리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착한 젊은이들을 현혹시키는 방법이 얼마나 교활한지 사탄의 무리가 따로 없습니다.
사탄이 그러하듯 그들의 수법이 고단수입니다. 한 젊은이를 포섭하기 위해 그들은 합동 작전을 펼치더군요. 다양한 달콤한 미끼를 던집니다. 한 인간의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듭니다. 삶에 지치고 외로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수도 없이 빠져듭니다.
너무 안타까운 것은 사이비 교주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부모 자식 간의 인연까지 끊어져 버렸습니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세뇌교육과 거듭되는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우리 젊은이들이 당하는 피해는 참혹할 정도입니다.
사탄보다 더 나쁜 사이비 교주로 인해 한창 꽃 피어나야 할 우리 젊은이들이 시들시들, 영혼이 다 빠져나간 좀비처럼 휘청휘청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기한 것 한 가지, 얼마나 세뇌시켰던지, 사이비 교주의 허황되고 추잡한 실상이 만천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추종자들은 헛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도 속상해서 사이비 교주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들여다봤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순식간에 견적이 나왔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과대망상증 환자였습니다.
“여러분, 하느님이 안보여서 답답하다구? 하느님을 보고 싶다구? 그렇다면 내 얼굴을 봐! 나를 보면 하느님을 본거나 마찬가지야!”
상판대기를 보니 참말로 거시기 하게 생긴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더 화가 났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어떻게 저런 허접한 사람에게 넘어가 인생을 망치는지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올바른 성경 읽기, 열심한 성경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 사이비 교주가 할 말이 아니라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이비 교주는 과대망상증에 빠져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것입니다. 수많은 청춘을 그토록 무참히 짓밟고 꿈을 앗아간 그의 최후는 영원히 불타오르는 지옥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복음 5장 43절)
우리가 유일하게 주님으로 고백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흠숭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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