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2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3. 3. 21. 05:53

 

2023년 3월 21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1-3ㄱ.5-16)

"Do you want to be well?"

"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는 것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자를 고쳐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송도에 있는 성 김대건 성당의 주임신부로 생활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저는 열심한 본당 교우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인사이동 발표가 났을 때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송도 신도시에서 꽤 큰 규모의 성당인데 저와 함께할 보좌신부도 없었고, 본당이 생긴 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할 일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왔기에 솔직히 이번에는 작고 안정적인 곳에 보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주교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조신부는 일 없는 곳에서는 답답해서 잘 살지 못할 거야. 성 김대건 성당은 한 5년 동안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거다.”

저를 이렇게 단정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 김대건 성당에 와서 보니 주교님 판단이 맞았음을 깨닫습니다. 일이 많아서 약간 몸은 피곤했지만, 교우들과 함께 신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저를 바라보는 제삼자였음을 깨닫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자극받아 더 나은 자신이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상대방의 말을 걸림돌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디딤돌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병을 고쳐줬다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죄인’이라고 말하고,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병을 고친다는 말도 했습니다. 특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이들의 말에 의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말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지만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으십니다. 특히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병으로 앓고 있었고, 이 병의 치유를 위해 벳자타 못을 떠나지 못하는 병자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도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에 집중할 때,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꽃은 꽃 그대로가 아름답다. 너도 너 그대로가 아름다움인데, 왜 다른 사람에게서 너를 찾으려고 하는가?(틱낫한)

​진심은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전삼용신부-

https://youtu.be/L4iaoiBoxiI

 

 

‘진’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누군가에게 제가 사과할 때 그 사람은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서 ‘진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과에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연 감정이 진심일까요?

 

이탈리아의 전 총리 실비오 베루스코니는 그의 불륜 및 성폭력 혐의 등 여러 가지 비리 사건들로 인해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며 “모든 이탈리아 국민과 특히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저의 불성실한 행동과 말들, 그리고 이에 대한 사과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이는 그가 여성 대상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때의 발언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진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과가 받아들여지자 사람이 바뀌었을까요? 다시 정치적 생명이 연장되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의 진심을 감정만으로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구나 눈물은 흘릴 수 있습니다.

 

영화 ‘사일런스’(2017)에 보면 기치치로는 로드르게스 신부를 끊임없이 배신하면서도 또 끊임없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합니다. 이것이 지나칠 정도로 반복됩니다. 감정은 그때그때 살아남기 위해 솟아날 수 있는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생존을 위해 언제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마귀에 씌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면 어떤 때는 집의 모든 물건을 밖에 가져다 버린 상태이고 어떤 때는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을 볼 때 매우 불안한 상태인 것은 알았으나 이성적인 사고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태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좋아지기를 원한다면 하루 한 시간씩 하.사.시.를 읽으며 성당에 앉아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지 안 할지는 미지수였습니다. 만약 원한다면 지금의 감정이 아닌 ‘의지’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그 후 그분은 매일 하.사.시.를 읽고 성체 조배를 하셨고 지금 한 달 이상은 된 것 같은데 표정이 매우 평화로워졌으며 죽을 때까지 성체 조배를 멈추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가족에게 걱정을 끼쳤던 그러한 증세가 더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성체 조배를 한 시간씩 꾸준히 해서 남편이 돌아오거나 자신이 그렇게도 밉던 사람이 용서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선물 받은 분들은 다 꾸준할 줄 알았던 분들입니다.

이제 명확해집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 진심인 사람은 꾸준합니다. 지금의 감정은 언제든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으로 진심을 측정하는 것은 오류에 빠집니다. 저는 눈물을 믿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던 많은 이들은 마치 잊기 위한 눈물인 듯 저를 금방 잊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이들이 오히려 꾸준히 연락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벳자타 연못의 치유 기적 사화입니다. 벳자타는 베데스타로도 불렸는데, 자비의 집 혹은 은총의 집이란 뜻입니다. 누가 은총을 받을까요? 은총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은총만이 영원한 삶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는 ‘40’이라는 숫자로 상징됩니다. 이런 새로 태어남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은총과 진리’를 주십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내리는 집이 베데스타입니다. 벳자타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은혜를 받습니까? 38년을 꾸준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치유되기를 원하는 지만 물으십니다. 우리는 38년 동안 매일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벳자타에서 일어난 일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8oWxkOL5Vjs

 

-조재형신부-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신앙체험수기’ 공모를 하였고 ‘대상’을 선정하였습니다. 저는 대상으로 선정된 수기를 읽으면서 고통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들은 어려서 백혈병을 앓았습니다. 누나의 골수이식으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들은 첫영성체를 하였고, 미사복사를 하였습니다. 아들은 예비신학생이 되었고, 사제가 되고 싶어 하였습니다. 아들은 천사와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키가 훌쩍 커진 아들을 위해 본당에서 따로 복사복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들의 백혈병은 재발하였습니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이 아들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아들의 수의는 아들이 좋아하였던 ‘복사복’으로 하였습니다. 본당신부님은 강론 중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모두가 그렇게 울면서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엄마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천사와 같은 아들을 너무 일찍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나가기도 싫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할까?’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엄마는 몸을 추스르고 성당으로 갔습니다. 본당신부님과 신자들이 엄마를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생각하며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 아들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지순례를 하였다는 도장이 늘어나면서 초췌했던 얼굴도 점차 밝아졌습니다. 이웃들과 대화를 하면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서 더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본당 레지오에 입단하였습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모두 엄마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저도 글을 읽으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라파엘과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서는 38년 동안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던 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짜타’라는 연못에 몸을 담그면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도 있었지만 그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건강을 회복하길 원합니까?” 환자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원하지만 아무도 저를 저 연못으로 데려가 주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누워있는 환자를 연못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직접 고쳐주셨습니다. 연못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연못은 하나의 도구였습니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분들은 하나씩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치 누워있던 환자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연못으로 갈 수 없다고 말한 것과 비슷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부님 제가 하는 일이 조금 잘 되면 성당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자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가난해도, 지금 힘들어도 하느님을 찾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가족들을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나오겠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남편이 나가면 함께 나가겠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지만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우들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이 있어서 성당에 안 나온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분들과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금전적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크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재정적인 이유가 있어도, 가족들과의 문제가 있어도, 이웃과의 문제가 있어도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에 반드시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벳자타 못 환자의 치유 사건은 다양한 병고와 상처로 신음하는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그 환자는 1년, 2년, 10년도 아니고 장장 38년 세월 동안 심각한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겨우겨우 기어 다닐 수 있었던 그는 매일 벳자타 연못가로 나왔지만, 치유는 희망사항일 뿐, 그 오랜 세월 그저 들것에 드러누워 누군가의 손길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40세 전후였습니다. 사실 우리도 몇십 년 전만 해도 60세가 되면 오래 살았다며 회갑 잔치까지 했었습니다. 어쩌면 그 환자는 태어나면서부터 평생토록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병고에 시달려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의 삶에 대한 의지,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떻게든 한번 인간답게 살아보겠노라며 발버둥쳤습니다. 매일 벳자타 못가로 나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치유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이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순간, 벳자타 못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의 은총을 입는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지체 장애로 인해 동작이 굼벵이보다 더 느렸던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다고, 이런 그에게 기적처럼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세상 가련한 그의 앞에 멈추시고, 천천히 내려다보십니다. 허리를 굽히시고 눈을 마주치며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설물로 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예수님께는 한 인간 존재의 극심한 고통 앞에 율법이나 안식일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는 주님, 우리의 눈물 앞에 눈물 흘리시는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에 반드시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38년이 아니라 50년도 더 된 우리의 심각한 고통 앞에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실 주님께 감사드리며,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며 그렇게 이 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사랑의 표지로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니라,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면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

-반영억신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 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배은망덕』

-송영진신부-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의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이고,

배경 상황이 좀 특이하긴 해도

다른 치유 이야기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은 그의 ‘배은망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 병자는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몰랐으니까 안 믿었고, 안 믿었으니까 은혜를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은혜를 받고 건강해진 다음에도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한참 뒤에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그 일은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안다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믿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을 알고 나서 배반했습니다.

만일에 모르는 채로 있었다면 배반을 안 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는 처한 상황은 거의 같은데,

신앙 면에서는 5장에 나오는 병자와 완전히 정반대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요한 9,36-38).”

그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도 바리사이들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나를 고쳐 주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다.” 라는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요한 9,30-33).

그러나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5-9ㄱ).”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맨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실제로 무슨 기적이 얼마나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지금 이야기 속의 병자의 말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도 원망하느라고 제대로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그가 너무 딱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먼저 병든 몸을 고쳐 주고,

그다음에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 병자는 청하지도 않은 은총을 갑자기 받았는데,

기뻐하는 모습도 없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모습도 없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기쁨과 감사를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9ㄴ-16).”

 

이 이야기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서른여덟 해나 앓던 사람이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되었는데도,

그들은 축하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있다고 꾸짖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자의 말은, “내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게 된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 탓이다.” 라고 변명하면서

책임을 예수님에게 떠넘기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안 지켰다고 처벌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건강을 되찾았다는 기쁨보다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 나쁜 일’은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몸의 병’은 ‘나쁜 일’입니다.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더 나쁜 일’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한 것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한 일이고, 몸의 건강에만 만족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겠다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