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2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3. 3. 22. 05:47

2023년 3월 22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요한 5,17-3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in the on e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운전할 때 우리는 신호등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호등의 색은 어떻게 될까요?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맞습니까? 아마 맞는다고 대답하실 것이고, 이 대답이 틀렸다고 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틀렸다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란색이 아니라 오렌지색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색 계열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색입니다. 노란색은 레몬 빛을 띤 밝은색이지요. 그에 반해 실제 우리가 보는 신호등은 오렌지색에 더 가까운 짙은 노란색입니다. 그래서 주황색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빨간색은 정지, 초록색은 진행(통과), 노란색은 신호 변경 예고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란색이 아닌데도 노란색이라고 배우다 보니, 노란색이 아닌데도 ‘노란색’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고정관념을 자기도 모르게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이 틀린 것도 모르게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고정관념으로 인해 남 탓, 또는 내 탓만을 외치게 됩니다. 어떻게 남 탓만일 수 있고, 또 내 탓만일 수 있겠습니까?

카톡 문자를 보냈는데 ‘읽음’ 표시가 없거나, 읽은 것 같은데 답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단정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일까요? 문자를 읽지 못하는 상황을 비롯한 답장하지 못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듯이 곰곰이 생각하며 마음에 담아두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느님의 손길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100% 틀린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며 새로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많은 표징을 곰곰이 생각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 스스로 만드는 고정관념으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경에서 벗어나서, 삶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춰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위대함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데 있지 않다. 참된 위대함은 자신의 과거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는 데 있다(인도 속담).

성령께서 내리시는 자리의 조건

-전삼용신부-

https://youtu.be/hr4nN2LEObo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순종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라고 하시듯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게 됨을 시사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생명이기도 하시고 선물이기도 하시고 능력이기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성령을 받으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순종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은 권능이기도 하고 능력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며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은 누구에게 주어질까요? 성령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최대한 죽으려는 사람에게 내립니다.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장면은 참으로 극적입니다. 사실 그의 형 ‘아도니야’가 누가 보더라도 왕위를 물려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에게 “모후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는 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도 제가 임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가 뒤집어져 아우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에게서 그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열왕 2,15)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모든 백성으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았습니다.

 

하지만 왕권을 주는 사람은 왕입니다. 다윗 왕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는 이 모든 사실을 다윗 왕에게 알렸고 다윗 왕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게 하고 자기 나귀를 태우고 왕좌에 앉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결과가 어땠을까요? 그동안 한마디도 안 하던 솔로몬은 자기 왕권을 노리던 모든 이들을 처단합니다. 솔로몬은 그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답답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어머니 밧 세바가 다윗의 왕권을 자기 아들에게 오게 하였습니다. 밧 세바처럼 죽어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가져오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교회 내에서도 어떤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제가 그것을 보지 못할 것 같지만 다 보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자리에 앉히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 오는 은총은 가만히 있는 이의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리시는 자리를 ‘제단’이라 합니다. 요즘 ‘제대’에 대한 공경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아무 상을 펴 놓고 미사를 거행합니다. 미사를 거행할 때 성령께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아무 곳에나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자기 죽음을 합친 사람에게만 내리십니다.

 

야곱은 베텔에서 바위 위에서 잠들었고 그 위로 사다리가 내려지며 하늘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야곱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성령께서 내리시는 곳이 베텔, 곧 하느님 집이라는 뜻입니다.

사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오시도록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성령의 자리를 마련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역할도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제가 없으면 미사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십니다. 제단도 마찬가지로 여겨져야 합니다. 제단이 없으면 미사가 안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고 그 위의 제물은 나의 죽음입니다.

 

사도행전 5장 32절에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순종은 나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 뜻의 자리를 내어드림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처럼,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내 뜻으로 걱정하고 근심하는 우리는 모두 결국 내가 살아있으므로 성령께서 내리시지 않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못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우리 죽음을 결합합시다. 그 자리에만 성령께서 내리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령의 사람이 되고 충만한 행복과 능력을 발휘하며 살게 됩니다. 살아 움직이는 제단에서는 미사를 거행할 수 없습니다.

환성을 올리고 기뻐 뛰어라,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UUftzMvBb_0

 

​-조재형신부-

1984년 겨울입니다. 저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 있는 나환자 마을(한센인 마을)로 봉사를 갔습니다. 마을에는 공소가 있었습니다. 저는 공소에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지냈습니다. 마을 분들은 양계, 양돈을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때 함께 하였던 학생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학생들 중에 한 명은 수도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소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공소(公所)’에 대한 지면이 있습니다. 2월 19일 신문에 ‘신평공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봉사활동을 갔었던 공소입니다. 저는 공소 사택에서 머물었습니다. 학생들이 계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날 학생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대에 갔다 왔고, 사제가 된 뒤로는 한 번도 공소를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바쁘기도 했지만 한번이면 족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신평공소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선희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호주 출신으로 골롬반 선교회 소속이었습니다. 1939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은 1940년 한국으로 파견돼 홍천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자 조선의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연금됐습니다. 조 신부님도 5개월간 연금과 투옥 생활 후 강제 출국 됐다가 해방 후 1947년 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홍천본당 주임으로 사목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신부님은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950년 겨울 중강진수용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휴전 때까지 3년간 중강진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750명 수용자 가운데 5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수용소에서 풀려났고, 1953년 5월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몸을 추스른 후 1954년 8월 세 번째 한국에 입국해서 홍천본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신부님은 더 이상 사목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인 1998년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 2005년 3월 선종하였습니다.

 

포천 신평공소는 신부님의 한센병 환우에 대한 각별한 사목적 배려로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1940년 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연금과 투옥을 당하였고 본국으로 강제 출국 당하였지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죽음의 행진을 거쳐 3년간 중강진수용소에서 지냈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사목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홀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3번이나 넘어지셨던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넘어지셨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십자가를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게을러서 십자가를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더 크고 좋은 것을 찾기 위해서 십자가를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아예 십자가를 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고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선희 신부님은 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홍천본당 교우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정확하게 맞춰진 예수님의 순명과 겸손의 생애!

-양승국신부-

 

천부당만부당한 일,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 오늘 복음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갓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작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그리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도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일이 틀림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과 구원,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호시탐탐 그를 감시하고, 여차하면 고발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유다인들, 참으로 대책이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다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딱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① 신성 모독죄: 유다인들 입장에서 자신들과 다름없는 한갓 인간인 듯한데,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처럼 말씀하시고, 그분의 외아들임을 강조하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예수님을 늘 봐왔던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분의 메시아성을 백번 깨어나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② 안식일 규정의 폐기: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뭔가 어색하거나 경직된 모습들을 본성상 수용하기 힘드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눈에 안식일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던 유다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웃겼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인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 때부터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깨트리셨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만 골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 이삭을 훑어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다른 날도 많은데, 하필 안식일에 수십 년 된 고질병 환자들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유다인들 눈에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좋아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분기탱천했습니다. 어떻게든 율법 위반 혐의를 예수님께 씌워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지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지혜로움의 끝판왕이셨습니다.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결정적 수난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할 때였습니다. 치고 빠지는 데 명수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정확하게 맞춰진 순명과 겸손의 생애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매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송영진신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안식일에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신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창세기의 말을 해석하면, “하느님께서 쉬셨다.” 라는 말은,

창조 사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뜻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시는 분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인간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을

계속해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한 순간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반복해서 멈추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떤 이유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이 중단되는 날은 없습니다.

만일에 안식일이 ‘하느님께서 사랑을 멈추시는 날’이라면,

그날은 ‘하느님 없는 날’이 되어버리고, 하느님이 없는 날이면

거룩한 날도 아니고, 지키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서 지키고 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어떤 법이 하느님의 사랑을 중단시킨다면,

그 법을 없애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중단되는 것은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곧 아버지의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는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께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도 못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상’이신 분”입니다(콜로 1,15; 히브 1,3).

이 말을 그냥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말씀’도 같은데,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여기서 ‘죽은 이들’은 ‘죽어야 할 이들’, 즉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간들의 처지를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모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길을) 알려 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은 ‘나중’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실천해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이고,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중간에 멈추면, 그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은

모두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29-30).”

이 말씀은, “나의 심판은 곧 하느님의 심판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심판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때에 생명을 선고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유일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이것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멸망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내 의지로 선택할 일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냥 구원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라고 호소하십니다(에제 33,11).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뜻에 따라, 또 그 뜻을 이루려고,

예수님께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