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19일 사순 제4주일

Margaret K 2023. 3. 19. 05:14

2023년 3월 19일 사순 제4주일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9,1-41)

 

“I came into this world for judgment,

so that those who do not see might see,

and those who do see might become bli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사이의 아들 가운데 막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게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보시고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게 하시어 보게 하시자, 눈이 멀었던 이가 예수님을 믿고 경배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참가자에게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조리한 소고기 패티를 제공했습니다. 단지 겉에 적혀 있는 라벨링 문구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참가자 절반이 받은 소고기 패티에는 ‘살코기 함량 75%’라고 적혀 있었고, 나머지 참가자가 받은 소고기 패티에는 ‘지방 함량 25%’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즉, 라벨링 문구만 다를 뿐 똑같은 소고기 패티였습니다. 그리고 이 라벨링 문구도 같이 보면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코기 함량 75%라는 것은 곧 지방 함량 25%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고기 패티를 시식한 사람이 맛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을까요?

‘살코기 함량 75%’라고 적힌 요리를 맛본 사람이 ‘지방 함량 25%’라고 적힌 요리를 먹은 사람보다 고기 패티가 덜 기름지고 더 담백해서 맛과 품질 모두 좋다고 평가했습니다. 똑같은 소고기 패티인데도 말입니다.

부정적 성향을 받아들이면 이렇게 올바른 판단을 하기 힘듭니다. 종종 물건을 사기 위해 인터넷 게시판에 적힌 상품평을 보곤 하는데, 부정적인 상품평을 보게 되면 이 물건을 사는데 망설이게 됩니다. 부정적 성향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부정적 성향은 주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분명히 신앙생활을 통해 많은 힘을 얻는데도, 남이 하는 부정적 말에 자신의 신앙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도 있지요.

‘종교에 빠지면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종교에 빠지면 이상한 행동을 한다. 종교는 아편이다.’

긍정적 성향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더 힘차게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고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이르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따른 이 사람은 이제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냥 그 자리에서 말씀만으로 앞을 볼 수 있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 눈에 바르셨을까요? 침은 은총을 나타냅니다. 즉,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를 보지 못하는 유다인들입니다. 태생 소경이 앞을 보게 되었음에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합니다. 그 부정적인 생각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증언하는 태생 소경처럼 우리도 세상에 용기 있게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너 자신이 되라! 다른 사람은 이미 있으니까(오스카 와일드).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한 첫 걸음은?

-전삼용신부-

https://youtu.be/253gQTob_fI

 

마더 데레사가 젊었을 때 어느 빈민굴을 방문하였습니다.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돼지 우리가 저리 가라 할 만한 방에서 술독에 빠져 게으르게 살고 있었습니다. 방엔 등잔이 있었지만 청년은 등잔을 켜지 않고 낮에도 어둡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더 데레사가 등잔에 불을 켜자 청년은 화를 내며 불을 끕니다. 성녀는 지지 않고 다시 불을 켰고 청년은 다시 껐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화가 난 청년은 등잔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성녀는 시장에 가서 새 등잔을 사서 돌아와서는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수녀원으로 돌아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찮게 한 젊은 수녀를 통해 그 청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청년은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착실히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마더 데레사와 같은 옷을 입은 젊은 수녀를 보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십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삶 안에서 빛나고 있다고.”

 

빛에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빛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보게 만들어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날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3 참조). 그 빛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실을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세상은 위 청년처럼 빛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눈먼자들의 도시’(2008)는 ‘80억 인구가 눈이 멀고 혼자만 앞을 볼 수 있다면?’이란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눈이 보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본래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이들에게 눈먼이들은 착취를 당합니다. 혼자 눈이 보이는 이는 그들에게 표적이 되어 숨어서 그들과 저항할 세력을 모아야 했습니다. 본래 앞을 못 보았던 이들에게는 눈먼자들의 도시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빛을 거부합니다. 자신들이 차지한 권리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태생 소경에게 눈을 만들어주십니다. 당연히 자신들 안에 빛이 있다고 믿었던 유다 지도자들은 그 눈을 뜬 소경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어둠을 더 사랑하여 빛을 보고도 눈을 감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어둠은 세상이 돈과 쾌락과 힘을 추구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러한 삶이 지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빛을 받아들인 이들을 세상에 파견합니다. 오늘 태생 소경이 눈을 씻은 실로암은 그래서 세례로 파견 받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동안의 삶이 어둠이었음을 받아들이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거짓의 두렁이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는 분명 행복한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감정을 긍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함을 벗고 거짓의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기들 스스로 고통이 행복이라고 믿기로 한 것입니다.

 

어떠한 죄와 그로 인한 고통을 덮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거짓말입니다.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요한 8,43)라고 하시며,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라고 하십니다.

 

거짓말은 세속-육신-마귀가 행복이라고 덮어버리는 어둠입니다. 거짓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라고 하시며 거짓이 없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GqomchlophA

 

​-조재형신부-

고인이 되신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하였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어머니는 배움이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를 만날 때 딱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배우자의 능력, 재력,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기에 어머니의 기준에 적합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5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재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사를 다 마치면 집으로 오셨습니다. 이사를 하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집안일을 잘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책을 가까이 하고, 서예를 하는 아버지를 존경하였습니다. 자식들에게도 늘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앙과 배움은 어머니 삶의 두 날개였습니다. 어머니는 야학으로 한글을 배웠고, 검정고시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레지오 단원으로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안목으로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고, 저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들어온 며느리는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고 합니다. 잘 못 들어온 며느리는 집안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정부는 인사를 할 때마다 ‘홍역’을 치르곤 합니다.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보자의 인격과 품성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업적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인격과 품성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 수사본부장이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자진 사퇴하였습니다. 정부는 임명을 철회하였습니다. 본인도 사퇴의사를 밝혔고, 정부도 임명을 철회하였기에 사퇴의 이유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인사를 할 때는 좀 더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때가 되면 주교님들의 고민도 깊어 질 것 같습니다. 꼭 보내고 싶은 사제는 겸손하게 사양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제는 굳이 찾아와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사이동이 별 무리 없이 이루어지면 그제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心眼”을 요구하십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智慧”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욕하고, 비난하고, 침을 뱉으며, 인격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난 과연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과 무조건적인 추종!

-양승국신부-

 

오늘 눈먼 사람을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꽤 색다릅니다. 땅에 침을 뱉습니다. 진흙으로 갭니다. 그 지저분한 것을 눈먼 사람의 눈에 바릅니다. 눈먼 사람이나 그 부모 입장에서 보면 꽤 불쾌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특히 눈먼 사람 입장에서 침에 갠 진흙을 눈에 바르니, 얼마나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까요? 눈도 따가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뭘 하시려고 그러시나? 내 눈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려고 그러시나?’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고 즉시 눈이 떠졌으면 아무 군소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난감하게 해놓고 그게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은 눈먼 사람의 속을 더 긁어놓았습니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그간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과정을 보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낫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즉석에서 오그라든 손이 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면 죽었던 사람이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하게 침으로 갠 흙을 바르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근처 아무 연못이나 찾아가서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럴경우 자존심 ‘팍’ 상해서, ‘이게 도대체 뭐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 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치유과정에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협조적입니다. 그 결과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눈먼 사람이 겪은 축복의 기적, 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으로 제조하신 ‘기적의 고약’ 때문일까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위생적인 고약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침과 진흙으로 만든 고약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재창조’, ‘말씀의 강생’, ‘인간의 자연생활에 대한 은총의 주입’

 

여기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그래도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서 그 눈을 더 확실하게 막아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다른 생각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예수님 자신만을 따르라는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 예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 예수님 외 부차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차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제4주일이며, 기쁨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묻혀 진흙에 개어서 자신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신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곧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분명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 나는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리사이들이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4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나의 주님!

아멘.

“신앙”으로 눈뜨는 사람들

-박진용신부-

​전·후반 경기인 ‘축 구’는 전반전이 끝난 시간이 참 아름답습니다. 감독과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새 로운 작전을 세우고, 후반전을 향한 희망과 용기로 경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은 지났지만, 아직도 반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의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초조하거나 두려운 마음의 게임은 질 수밖에 없지만, 사순 제4주일을 봉헌 하는 우리는 초조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죄가 많아 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말씀 처럼, 나약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비복음적인 것에 매 달리며 살아왔던 우리지만, 지난 3주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풍요로운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을 믿고 있었고, 앞으로 남은 사순의 시간 속에서도 주님의 은총을 믿는 까닭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오늘 복음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의 사건은, 소경의 간절한 기도를 넘어 소경을 향한 ‘예 수의 자비’였습니다.

세상에 눈먼 우리는 태생 소경 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우리는 지난 3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미약하나마 십자가의 예수와 내 안의 예수,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상의 빛’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후반전을 향한 희망과 용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진흙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본 것처럼, 태생 소경이 눈에 바른 진흙의 씻어냄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성사’인 예수를 본 것처럼, 이제 우리도 이 사순 제4주일에 ‘자비와 용서’로 다가오시는 예수의 구원역사를 바라볼 때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비겁함이 세상의 ‘진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세상의 어두움’을 탓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늘 ‘세상의 빛’은 신앙과 세 상에 대한 우리의 ‘영적 식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암 못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씻는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영적 식별’을 향한 ‘화해의 성사’를 희망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치유되는 ‘감사의 마음’으로 ‘화해의 성사’에 임하고, 통회와 속죄의 시간을 넘어 ‘자비와 용서’로 서로의 ‘화해성사’를 이루며, 아직도 남은 사순의 시간에 ‘희망과 용기의 시간’으로 죄인들 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청합니다.

동시에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는 이 은총의 시간에 우리도 눈뜬 소경처럼, 두려움 없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 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