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3년 3월 20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Margaret K 2023. 3. 20. 05:40

2023년 3월 20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한 의로운 요셉 성인을 기리고, 성인의 믿음과 덕을 본받기로 다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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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 1,16.18-21.24ㄱ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다윗이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다고 한다(제2독서).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로 기억됩니다. 당시에 선 묵상이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특히 수도자들이 이 묵상을 위해 절에 가서 선 묵상을 했습니다. 불교의 참선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켜 하느님께 향한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아예 개종하는 수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소중한 가치를 간직하지 못했기에 개종한 것입니다.

종종 개신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는 분을 만납니다. 가톨릭 안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없어서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2,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 안에 그런 프로그램이 왜 없겠습니까? 그보다 쉽게 영적 갈증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다른 종파의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분명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구원으로 이끈 하느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역시 하느님을 쉽게 만나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진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사와 묵상 그리고 각종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것이 마치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뜻인 양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너무 쉽게 하느님을 만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좀 더 우리의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것에 집중할수록 일상 안에서도 쉽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라는 말처럼, 남의 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무는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요셉 성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법대로 사는 사람,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법대로 살기가 더 쉽습니다. 원칙대로만 살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뜻대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셉 성인이 대단한 것은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인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따를 수가 있었고, 끝까지 가정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는 길은 쉬운 길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의미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 어디에 가장 있고 싶은지 생각하라(빈스 롬바디).

구세사에 빛나는 조역, 요셉들의 이야기

- 이기우 신부​-

https://www.youtube.com/watch?v=x8_wvYsbGnc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구약의 예언자 중에 한 명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엘리야라고도 하였고, 예레미야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도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이끄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호칭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느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였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앙인은 모두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도 가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신문사 직원들은 저를 ‘사장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동북부 ME 부부들은 저를 ‘동북부 엠이 대표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부르클린 공동체에서 교우들은 저를 ‘본당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저의 직책은 다양하지만 저의 정체성은 ‘사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 시대와 공간은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제가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마귀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병자를 고쳐주기 위해서는 병자들의 아픔을 공감해야 합니다. 사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양승국신부-

 

마리아의 배필이자 예수님의 양부(養父)셨던 요셉이었습니다. 비록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요셉은 이 세상 그 어떤 친부(親父) 못지않게 예수님을 양육하는데 있어 지극정성이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기묘한 동거였지만, 요셉은 이 세상 그 어떤 남편보다도 마리아에게 자상하고 충실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크게 기여한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 탄생 전후, 아주 제한적으로 요셉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과월절을 맞이하여 소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것을 끝으로, 요셉은 완전히 자취를 감춥니다.

 

요셉에 대한 복음 사가들의 제한적인 기록,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요셉은 과묵하고 진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의로운 사람, 주님의 뜻에 충실했던, 주님의 명령과 초대에 절대 순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이 어떤 유명 인사의 부모처럼 말이 많은 사람이어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면서 이러쿵 저러쿵 인터뷰를 하고, 이 방송사 저 방송사 다 출연하고 다녔다면, 예수님께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을까요?

 

다행히 성모님과 더불어 성 요셉은 침묵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벌이기보다 조용히 기도하고 관조하며, 작게나마 주님의 구원 사업에 작은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침묵의 사도 요셉 성인 축일에 침묵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침묵할 때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식별할 수 있는 은총을 거듭 주님께 청해야겠습니다.

 

얼토당토않은 불의한 현실 앞에 침묵함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입니다. 무죄한 이웃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 침묵함은 죄악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성숙과 나약함, 위선과 이중성에 대한 신랄한 지적 앞에 침묵과 숙고, 성찰과 회개의 여정은 우리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미덕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자 비오 9세께서는 요셉 성인을 “보편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고(1870년), 가경자 비오 12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로,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요셉 성인에게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로 간구합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요셉 성인의 보편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을 기념하여 발표하신 교황교서 <아버지 마음으로>(2020.12.8.)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곤경에 놓일 때의 주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역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19)는 것과,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라고 할 만큼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다는 것과,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하는 순명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 세 번째 것인 “순명하하는 사람 요셉”에 관해서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위의 교서에서는 “순종하는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주셨을 때 하신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 (라고 하였고) ...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순종함으로써 ... 마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마태 2,13) (하자,) 요셉은 자기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주저하지 않고 천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 (그는 다시) 천사의 말이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그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마태 2,19-20 참조).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21).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길에 “...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23).

이것이 네 번째 꿈이었습니다.

...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탈출 20,12 참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루카 2,51 참조) 가르쳤습니다.

... 나자렛에서 지낸 감추어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성 요셉은 직접 자기 부성의 실현을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과, 이렇게 하여 ‘충만한 때에 위대한 구원신비에 협력하였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행동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실행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